절대천왕 1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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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74화
174화
건너편 침상에 반듯하게 잠들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흰머리로 보아 제법 나이가 든 자인 듯했다.
그녀는 모든 기척을 죽인 채 잠든 자의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조용히 내려다봤다.
치켜 올라간 눈썹, 굳게 다물린 입. 강직한 인상을 지닌 육순가량의 노인이었다.
상당히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자. 십이정한녀와 비교해 봐도 윗길의 공력. 천외천가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것 같다.
첫 희생자로 적당했다.
‘죽음을 억울해하지 마라. 앞으로 많은 사람이 그대의 뒤를 따라갈 테니까.’
소영령은 침상 앞에 서서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정한녀의 한 맺힌 원혼에 그대의 목숨을 바쳐라!’
그때였다. 소영령에게서 일어난 한기를 느꼈는지 노인이 갑자기 눈을 떴다.
“누구……?”
찰나, 하얀 손 그림자가 노인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퍽!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헉!”
희디흰 소수가 가슴 위에 떨어지자 노인의 눈이 부릅떠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극한의 한기에 몸 내부가 얼어버리고 얼굴에는 하얀 서리가 깔렸다.
파르르 몸을 떤 그는 입을 벌린 채 서서히 몸이 굳어갔다.
“나를 독하다 욕하지 마라. 너희에게는 나를 욕할 자격이 없어.”
나직이 뇌까린 소영령은 심장마저 얼어버린 노인을 놔둔 채 전각을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일각.
양쪽 전각을 차례차례 방문한 소영령은 세 구의 시신을 뒤로한 채 더 깊은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천외천가는 소수의 공포에 떨어야 할 것이었다.
한 맺힌 여인들의 원혼을 위해!
소영령이 일곱 번째 희생자를 뒤로하고 전각을 빠져나올 즈음.
혁련호운이 천선곡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경비무사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벌써 들어갔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경비무사들의 시신이 아직 저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들어간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천외천가와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령’이라는 여인의 안전을 위해 온 것일 뿐. 하기에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진세를 통과한 혁련호운은 곧바로 은밀한 곳을 찾아보았다.
안쪽의 지리를 잘 모르는 이상, 함부로 움직이면 오히려 ‘령’에게 피해만 끼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행적이 밝혀질 터. 일단은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그렇게 조심스레 움직이며 숨을 만한 곳을 찾을 때다. 절벽 쪽에서 자라는 천년 고목의 중간 부분에 시커먼 공동이 보였다.
즉시 그곳으로 다가간 혁련호운은 공동 안을 살펴보았다. 공동 안쪽은 한 사람이 숨어 있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천외천가의 일각이 한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하늘이 나를 도와주는 것 같군.’
혁련호운은 그 안으로 들어가서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흩뿌려 놓은 듯 수억 개의 별이 구름처럼 흐르고 있었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무사히 나가기만 하면 무릎을 꿇고라도 자신의 마음을 말할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발을 붙잡고라도 매달릴 작정이었다.
그것도 못하게 하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쳇, 누구 고집이 센가 한번 해보자고!’
* * *
어스름이 밀려드는 묘시 초.
장로 순우민의 시비인 미추는 순우민의 방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대답이 없으시지?’
항상 이 시간이면 잠에서 깨어 차를 마신다. 지금쯤이면 깨어 있어야 했다.
‘오늘은 깊이 잠 드셔서 일어나지 않으셨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순우민의 버릇이 너무나 일정했다.
깨어있지 않은 날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했으니까.
“저, 장로님. 차를 가져왔사옵니다.”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미추는 조금 더 기다리고는, 용기를 내 문을 슬며시 열어보았다.
침상에 누워 있는 순우민이 보였다. 왠지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천장을 향해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습하는 두려움에 미추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자, 장로…… 님?”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때였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순우민의 얼굴에 하얗게 서리가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서, 설마……?”
더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순우민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한겨울 얼음보다 더 차가운 기운. 손끝이 얼어붙는 듯했다.
와장창!
미추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악!”
순우민의 죽음이 알려진지 일각이 지나기도 전.
천선곡을 경비하는 천수당 무사들이 간부들을 찾아보고 상황을 확인했다.
곧 여기저기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수가 열에 이르자 심장을 짓누르는 침묵이 천외천가를 뒤덮었다.
“가주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순우연은 호위장인 여곤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여곤이 해가 뜨기 전에 자신의 잠을 깨우는 경우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만큼 급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
침상에 걸터앉은 순우연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방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여곤?”
“곡 내에 자객이 침입했사옵니다.”
“자객?”
눈살을 찌푸린 순우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확인된 피해는?”
“그게… 아직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무슨 대답이 그리 어설픈가?!”
순우연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 나왔다.
여곤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희생자만도 열 명이 넘어서…….”
순우연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잠들어 있던 애첩 홍랑이 눈을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여곤의 보고가 이어졌다.
“순우민 장로님조차 당하신 터라…….”
심각성을 느낀 홍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순우연의 몸에 장포를 걸쳐 주었다.
순우연은 홍랑이 장포를 걸쳐주는 데도 방문만 노려보았다.
“숙부께서 자객에게 당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가주.”
“안으로 들어와라, 여곤.”
말상의 무표정한 중년 무사가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당한 사람이 누구누구더냐?”
여곤이 나머지 아홉 명의 이름을 말했다.
“장로님을 비롯해서, 영선당의 순우각 당주, 비각(秘閣)의 천가호령이 셋…….”
순우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각 아우에 비각의 천가호령들까지 당했다고?”
하나같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열 명이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를 향한 일보를 내딛기 하루 전이거늘, 이런 엉뚱한 일이 발생하다니.’
아무리 평정을 찾았다지만, 아들이 당한 것에 마음이 착잡하던 터다. 그런데 또 형제들이 당했다.
스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에 순우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현재 상황은?”
“천수당과 천밀당의 무사들이 곡 내를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천승원의 장로들 중 돌아가신 분은 한 분뿐이더냐?”
그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순우기정이 갈포를 입은 중년인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주, 곡의 경비무사를 비롯해서 현재까지 모두 스물여섯이 죽었습니다. 장로들 중에서는… 민 숙부뿐만 아니라 창 숙부도 당했습니다.”
순우기정의 말에 순우연의 이가 악다물렸다.
“창 숙부마저? 도대체 누가 들어왔기에 그분들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돌아가셨단 말인가?!”
갈포의 중년인, 천밀당주 순우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신녀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순우연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신… 녀가?”
“모두 극한의 음기에 당했는데, 세 구의 시신에서 소수가 발견되었습니다.”
순우연이 냉기를 풀풀 날리며 이를 갈았다.
“그 계집이 감히 이곳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단 말이지? 일행이 있을 가능성은?”
순우기정이 대답했다.
“현재로선 혼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인이 모두 같습니다.”
“찾아! 모든 사람을 동원해! 본 가를 완전히 뒤집어서라도 찾아내!”
“예, 가주!”
순우격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자 순우연이 순우기정을 바라보았다.
“천앙동을 열어라, 기정.”
“그들로 하여금 신녀를 상대하게 하실 생각입니까?”
“신녀는 유사도 단독으로는 이기지 못한 고수다. 본 가의 사람들이 그 계집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잡을 수는 없다. 지금 본 가에서 소수로 그 계집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뿐이야.”
천앙동의 괴인들을 제외하면, 천가에서 일대일로 신녀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두세 명뿐이다.
그중 한 사람인 대장로는 밖에 나가 있는 상태. 그렇다고 가주가 직접 나서서 신녀와 싸울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알겠습니다, 가주. 기왕이면 사로잡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사로잡으면 쓸모가 많을 거야.”
* * *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 명이 움직이며 소용돌이치는 기세는 그 어떤 소리보다도 혁련호운을 바짝 긴장시켰다.
‘어떻게 된 거지?’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 아직 발각된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어떤 일로 인해서 천외천가의 무사들이 곡 안을 급박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혁련호운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고목이 갈라진 사이로 상황을 살폈다.
건물 사이사이로 갈의와 흑의, 청의를 입은 자들이 돌아다닌다. 건물의 지붕, 전각의 천장 사이, 바위틈, 나무 위, 어느 곳도 빼놓지 않고 곳곳을 살핀다.
‘제기랄! 쥐구멍에 숨은 쥐새끼까지 잡아낼 기세군.’
조금 있으면 자신이 숨은 고목도 살펴볼 것 같았다.
문제는 당장 빠져나가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혁련호운은 틈으로 밖의 상황을 살피며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공력을 끌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 서너 사람이 고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먼저 고목 주위의 바위 뒤를 살피더니 고개를 들어서 고목을 올려다봤다.
“이봐, 저 나무는 가지도 몇 개 없어서 숨을 만한 곳이 없는 것 같네. 다른 곳을 살펴보세.”
한 사람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말에 나무 위를 살피던 자들이 몸을 돌렸다.
혁련호운은 내심 안도하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냥 가라. 나도 사람 죽이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한 사람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 생각났는데 말이야, 저 위에 상당히 큰 구멍이 하나 있어. 어릴 때 저 나무 위에 올라가 봐서 내가 잘 안다네. 내가 올라가 볼 테니까, 자네들은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혹시라도 내가 위험해지면 도와주게.”
혁련호운은 주먹을 와락 움켜쥐고는, 속으로 자신이 아는 온갖 쌍욕을 다 퍼부었다.
‘빌어먹을 새끼! 나쁜 놈! 자라 같은 놈! 왜 하필 지금 그 생각이 나는 거야!’
하지만 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발각당하면 상대를 최대한 빨리 때려눕히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머뭇거리다 적에게 포위당하면 끝장이었다.
‘어디 올라오기만 해봐라! 내 네놈의 대갈통을 예쁘게 부숴주마!’
혁련호운은 이름도 모르는 무사를 향해 이를 갈며 그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자객이다!”
계곡 안쪽 멀리서 외마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막 나무 위로 몸을 날리려던 자도 홱 몸을 돌렸다.
“발견했나 보군, 가세!”
혁련호운은 그들이 떠나가는 데도 좋아할 수 없었다.
좋아하기는커녕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멀리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그녀가 쫓기는 것 같다.
‘제기랄!’
슬쩍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구멍에서 뛰쳐나와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