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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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26화
126화
1장 능야산의 형제들
1
“하하하, 놀라게 해주려고 왔지.”
청의를 입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청년. 어이없게도 무림맹의 사자는 다름 아닌 무당의 정은이었다.
그의 거짓이 없는 표정에 좌소천의 표정도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다.
“그렇다면 실패했군.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거든.”
“무슨 소리? 조금 전에 눈이 커진 것을 봤는데?”
스스럼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공손양이 어리둥절해졌다.
“아시는 분입니까?”
정은이 도복을 입고 왔다면 공손양도 눈치 챘을지 몰랐다.
그러나 정은은 도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있었다. 그만큼 비밀을 요하는 만남이라는 말이었다.
좌소천이 빙긋이 웃으며 정은을 소개했다.
“무당의 정은이라는 친구입니다.”
그제야 공손양은 정은의 정체를 눈치 채고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은 들었소. 공손양이라 하외다.”
“무량수불, 정은입니다.”
좌소천이 도호를 외며 마주 인사하는 정은을 놀렸다.
“이제야 조금 도사처럼 보이는군.”
“험, 진짜 도사는 도복을 입으나 평복을 입으나 표가 나는 법이지. 나처럼 말이야. 하하하하.”
좌소천은 정은의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다음 조용히 물었다.
“무당의 일은 잘 수습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어쩌겠는가? 슬퍼한다고 해서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그나마 일찍 물러가서 더 이상의 피해가 없었다는 게 다행일 뿐이라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 그녀들이 물러가지 않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적어도 두 배 이상의 피해가 났을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날의 아픔이 어찌 말 몇 마디로 털어질까.
정은으로서는 그저 그날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싶을 것이었다. 원한에 매달려 복수귀가 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 무림맹에서 무슨 일로 자네를 보낸 건가?”
그제야 정은의 표정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무림맹의 군사께서 자네를 직접 만나봤으면 하시네.”
“만나자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내용에 대해 자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네. 다만 천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더군.”
“그 말뿐이던가?”
정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있네.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과거는 잠시 덮어두자고 하시더군.”
“잠시라…….”
언뜻 들으면 대의를 위해 과거의 일은 거론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어정쩡한 말이었다. 잠시 덮어두자는 말은 언제든 다시 문제 삼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정은은 그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듯했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 하던가?”
“열흘 후쯤, 제갈세가에서 만났으면 어떨까 하네만. 마음에 안 들면 장소는 바꾸어도 된다 하더군.”
공손양이 고개를 홱 돌려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역력히 보였다.
하지만 정은을 바라보는 좌소천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제갈진문의 의도는 분명했다.
자신이 있으면 오라는 말이다.
자신을 시험하겠는 뜻이다.
하기에 좌소천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제갈진문, 당신은 나를 너무 모르는군.’
제갈진문은 들은 정보만을 토대로 자신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이따위 시험을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좌소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정은을 바라보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친구가 나와 제갈세가의 관계를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군.’
생각 같아서는 휘둥그렇게 뜬 눈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정은이 먼저 제갈세가에서의 만남을 반대할 것이었다.
“만나서 나쁠 것 같지는 않군. 알았네. 가서 그렇게 전하게. 단, 우리의 만남은 철저히 비밀이 지켜져야 하네. 아직은 궁주에게 알려져선 안 되니까 말이야.”
“하하, 걱정 말게.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다섯밖에 없다네. 아니지, 이제 자네와 저분도 알게 되었으니 일곱인가?”
정은은 정말로 순수했다.
두 사람만 알고 있어도 비밀은 새어나간다. 하물며 무려 일곱이 밀담에 대해 알고 있다.
이미 이번 밀담은 비밀이 아니었다.
좌소천은 정은의 순수함이 깨질까 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번쯤 강호의 쓴맛을 맛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검성의 탄생을 위해서라도!
고난은 사람을 더욱 크게 키워준다 하지 않던가?
그때 공손양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주군,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을 대동할 수 없을 텐데요?”
혁련무천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판이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면 제천신궁의 정보망에 걸릴지 몰랐다. 천이당이야 걱정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밀천단도 호북으로 상당한 밀정을 내려 보낸 상황이었다.
하지만 좌소천은 애초부터 많은 무사들을 대동하고 제갈세가로 갈 생각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오히려 이 기회에 능 형의 형제들을 만나볼 생각이오.”
능야산의 형제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은 신농가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 해도 양양까지 사나흘이면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능야산이 그들을 만나러 가면, 오가는 시일을 생각해 볼 때 제갈세가로 가는 도중에 만날 가능성이 컸다.
‘자신과 비교될 만큼 강하다 했지.’
그렇게 말했었다.
능야산의 말이 반만 사실로 드러나도 제갈세가로 가는 일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물론 시일이 맞지 않아 그들을 만나지 못해도 큰 상관은 없지만.
제갈세가는 결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만일 나를 시험하려 한다면 그대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제갈세가여.’
2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폭포수가 이십 장 절벽에서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못 속에 처박히는 물기둥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만 같다.
신녀는 더 이상 냉정할 수가 없었다.
빙백한천소수공을 익히며 얼어붙었던 가슴이 아파온다.
목숨을 던져 활로를 뚫어준 정한녀들과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버려둔 채 도망쳐야 했다.
포위망을 뚫고 살아서 도망친 사람은 모두 열다섯. 그나마도 대부분이 부상을 입어 한동안 움직일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자신 역시 상당한 내상을 입은 상태.
천해의 유사와 흑암의 공격은 그녀 혼자 감당하기에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솟구친 분노가 그녀의 내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파파, 지금은 힘이 없어 도망쳤지만, 반드시 파파의 한을 풀어주겠어요.’
신녀는 폭포 옆의 동굴에서 몸을 돌보고 있는 정한녀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비롯해 성한 사람은 다섯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죽든지, 불구의 몸이 될 듯했다.
솔직히 저런 몸으로 이천 리 길을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생각될 정도로, 그녀들의 부상은 심각한 상태였다.
신녀는 이를 악물고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십이정한녀 중 살아난 여인은 둘, 이한녀와 삼한녀였다. 그녀들이 살아남은 여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일단 몸을 추스르고, 그대들이 먼저 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하오면 신녀께오선……?”
“강호에 나가 알아볼 일이 있어요. 그러니 그대들은 궁에서 몸을 치료하며 기다리도록 하세요.”
“신녀시여…….”
“잊지 마세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파파와 정한녀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목소리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러나 어찌 가슴까지 차가울 수 있으랴.
정한녀들은 신녀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져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찌,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몸으로도 적의 앞을 가로막았다.
갈라진 배에서 흘러나오는 내장을 움켜쥐고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명도 억누르고, 신음 흘릴 힘도 아껴 적을 상대했다.
덕분에 포위망이 뚫리고 일부나마 살아날 수가 있었다.
어찌 잊으랴, 그날의 일을! 처절한 한을!
이한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동굴 안에서 쉬고 있던 여인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천외천가여! 천해여! 내 반드시 그날 흘린 피의 대가를 받아내고야 말 것이니라!’
신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하늘 저편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를 바라보았다.
절벽, 한탄곡. 망설임없이 몸을 던져 자신을 구했다는 사람.
‘좌소천이라 했지?’
그는 자신과 무슨 관계일까?
무슨 관계이기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한 것일까?
그를 만난다면 잃어버린 세월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천외천가를 찾아가기 전에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기 전에!
문득 폭포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신녀의 눈이 잘게 떨렸다.
뭉게구름 속에서 한령파파가 조용히 웃고 있는 듯했다.
‘파파……. 파파가 옆에 없으니, 이제야 파파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자, 가서 내 운명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3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 속으로 들어선 지 하루가 지났다.
산길조차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능야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오 년을 살아왔고, 떠난 지 삼 년 만에 찾은 곳이다.
달라진 것이 적지 않지만 산의 모습만은 여전했다. 그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곧 만날 거라는 생각에 옮기는 발걸음도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홍강이나 종위도 이제 많이 컸겠군.’
두 아이는 그의 단 하나 있는 형인 능수산의 아들들이다. 떠날 때 열여덟, 열다섯이었으니 지금쯤 제법 청년 티가 날 것이 분명했다.
꿰에엑!
끽! 끽!
나무 위에서 털빛이 노랗고 얼굴이 하얀 금사후(金絲?) 서너 마리가 자신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아마 근처에도 수십 마리가 살고 있을 것이다. 놈들은 무리를 지어 사는 놈들이니까.
‘저놈들이 보이는 걸 보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능야산은 금사후의 환영 아닌 환영을 받으며 서쪽으로 근 한나절을 더 들어갔다.
오 리에 이르는 죽림을 지나고, 기암괴석이 양편으로 늘어선 협곡을 지나자, 갑자기 앞이 환해졌다.
저만치 산비탈을 따라 계단처럼 만들어진 농지가 보였다.
숙부들, 형제들, 조카들이 자급자족을 위해 땀 흘려 만든 삶의 터전에서 허리만큼 자란 곡식들의 열매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잘 자라고 있군.”
그는 산비탈을 따라 만들어진 농지를 지나 건너편의 산을 향해 눈을 돌렸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에 나무로 지은 집들이 보인다. 삼 년 전과 그리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서너 채 정도 집이 늘어난 듯하다.
‘응? 누가 혼인이라도 했나?’
그 외에는 집이 늘어날 이유가 없다.
어쨌든 가보며 알 터. 능야산은 궁금함을 누르고 숲을 벗어났다.
스스스…….
그가 숲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바람이 부는 듯 날벌레 날갯짓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주위로 청년 셋이 나타났다.
셋 모두 이십대 초중반의 나이.
그들을 바라보는 능야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이구나, 소청, 위산, 정평.”
세 청년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능야산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능야산의 정체를 알고 눈을 크게 떴다.
“능 숙부?”
키가 큰 청년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급히 인사를 했다.
“소청이 능 숙부를 뵈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능 숙부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머지 두 청년도 재빨리 능야산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완전히 청년들이 되었구나.”
“돌아오신 겁니까?”
정착하기 위해 왔냐는 말이다.
능야산의 착 가라앉은 눈이 절벽에 지어진 목옥으로 향했다.
“아니다. 어른들과 상의할 게 있어 왔다.”
낭소청은 뭔가 기대감을 품고 몸을 반쯤 돌렸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어르신들께서 아주 반가워하실 겁니다.”
과연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능야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부딪쳐서 해결해야 할 일.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이 있다면 움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