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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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96화
96화
간단한 몇 마디. 심장을 뛰게 만드는 대답이다.
북리환은 입술을 깨물고 벌떡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좌소천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일에 끼어줄 수 있나?”
좌소천이 한없이 깊은 눈으로 북리환을 바라보았다.
“천하가 넓은 만큼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총표파자는 저와 함께 천외천가를 쳐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벌게진 얼굴로 좌소천을 바라보던 북리환이 씨익 웃었다.
그는 당장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치듯 말했다.
“아마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네! 내가 누군가? 녹림왕이 아닌가?”
야망과 꿈이 있는 사람치고 ‘천하’라는 말에 가슴이 뛰지 않을 자 뉘 있을까!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싫어할 자 어디에 있을까!
북리환도 그랬다.
그저 꿈처럼 여기며 가슴속에만 묻어놨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려 한다. 그 주역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피가 끓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평정관이나 무승관 일은 걱정 말게. 내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제천신궁 놈들이 내려오면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겠네!”
북리환이 합류한 이상 잠강, 천문 지부와 대홍산이 이어졌다.
황파만 손에 넣으면 한수 동부와 장강의 북부가 좌소천의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천하를 아우르는 세력들이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이에.
거기다 무창 일대만 손에 들어오면 호북 동부가 완전하게 하나가 된다.
좌소천의 얼굴에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첫 번째 계획이 완성 직전이다.
하나가 완성되면 두 번째 길을 달려갈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백부님. 하늘에서 즐겁게 지켜보십시오. 아들이, 조카가 어떻게 하늘이 되어가는 지!’
9장 무창을 얻다
1
한수를 가득 메우다시피 했던 전마성의 이천 무사가 형주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갑자기 철혈무제 사도철군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나?
어떤 이는 전마성 총단에 급한 일이 생겨서 할 수 없이 돌아간다고도 했다.
또 다른 자는 사도철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반역의 조짐이 있었다고도 했고, 심지어 성주의 가족들이 모두 여름철 괴질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떤 소문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철군이 전마성의 무사들을 데리고 형주의 총단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늦은 밤, 한 사람이 동호장에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기천승이었다.
그는 아무도 몰래 좌소천의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좌소천의 방이 있는 건물에 올라서자마자 그럴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흐릿한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더니 묻는다.
“너도 좌가 꼬마를 죽이려고 왔냐?”
기척을 느끼기는커녕 상대가 누군지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기천승으로선 어이가 없었다.
“아니오.”
“아니기는? 딱 보니 자객이 분명하구만.”
본업이 자객이니 아니라 할 수도 없었다.
“그건… 그렇소만, 그래도…….”
“이 자식, 자객이 말이 많기는.”
순간 흐릿한 그림자가 갑자기 덮쳤다.
기천승도 은근히 화가 났다.
자신이 누군가! 천하의 귀영천살이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무작정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공격하다니.
그런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마음씨 좋은 그가 아니었다.
“그대가 자초한 일, 후회하지 마라.”
그가 싸늘히 외치며 허리의 연검을 뽑았다.
상대가 흑살신 무영자라는 것을 알 리 없는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무영자는 그런 기천승의 마음을 이해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런 건방진 놈이 감히……!”
오히려 자객이면서 자신에게 대드는 기천승이 더욱 괘씸할 뿐이었다.
더구나 잠깐 말다툼하는 사이 사람들이 방을 나와서 지붕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자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나름대로 위엄 있게 말했다.
“너 잘 만났다. 그러잖아도 애늙은이 때문에 요즘 기를 못 폈는데, 네가 좀 내 속을 풀어줘야겠다.”
순간 짙어진 먹구름이 기천승을 뒤덮었다.
동시에 먹구름 속에서 소리 없는 번개가 번쩍였다.
“어쭈? 이 자식 봐라? 제법인데?”
제법 정도가 아니었다.
오 초의 손속을 나누는 동안 하마터면 기천승의 검에 어깨를 다칠 뻔하기도 했다.
“오냐 오냐 봐줬더니 이게!”
결국 무영자도 전력을 다해서 기천승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래야 겨우 우세를 유지할 수가 있었으니까.
한편 좌소천도 자신의 거처 지붕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알고 있었다.
사실 좌소천이 그들의 싸움을 말리려면 몇 마디면 족했다.
그러나 ‘그’에게 하늘의 높음을 알려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어서 그냥 놔두었다.
무영자도 우둔한 사람은 아니니 죽이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행히 ‘그’의 실력도 뛰어나서 금방 당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좌소천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무영자 어르신, 너무 심하게 야단치지는 마십시오. 제가 불러서 온 사람이니까요.”
그 직후.
지붕에서 빡! 소리가 들렸다.
“하아, 이 자식. 정말 대단한데? 하마터면 옷이 또 찢어질 뻔했잖아?”
지붕에서 기천승을 떠메고 내려온 무영자가 정말로 놀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옷만이 아니라 가슴까지 갈라질 뻔했다.
그만큼 휘어져 들어오는 연검이 빠르고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애늙은이 동천자가 두고두고 씹을 테니까.
좌소천이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빙그레 웃었다.
“전에 저도 당할 뻔했지요.”
“그래? 근데 이놈이 누군지 아나?”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동천옹과 등소패와 위지승정이 들어왔다.
직속무사들은 고개만 슬쩍 들이밀었을 뿐 들어오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경계망이 완벽히 뚫렸다. 들어가 봐야 네 노인에게 구박받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때 위지승정이 기천승의 모습과 연검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헛, 혹시 귀영천살 기천승?”
그 말에 무영자가 다시 기천승을 바라보았다.
“요놈이 내가 없는 사이 살수계에서 이름 좀 날리며 깝죽거렸다는 그 천하제… 이살?”
“천하제일살이라 불릴 만한 자 중 하나지요.”
“흥! 내가 아직 살아 있는데 제일살은 무슨!”
자신의 사문인 흑옥의 아이들을 제치고 살문제일이라는 말을 듣는 놈이다.
‘확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천옹이 가만두지 않았다.
“곧 늙어 죽을 놈이 별걸 다 따지네. 너, 혹시 몰래 그놈 죽일 생각 하는 거 아니야?”
“흥!”
무영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동천옹의 약점을 건드린 일이 마음에 남아서 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들! 다 망해 버린 귀영문의 꼬마에게 제일의 자리를 넘겨주다니. 내 이놈들을 그냥……!’
그사이 위지승정이 물었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냐? 한동안 보이지 않던 자인데. 소문에 의하면 본 궁에 들어왔다는 말도 있긴 있었다만…….”
“앞으로 제 일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이자의 정체를 알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때다. 동천옹이 귀신같이 눈치 채고 물었다.
“혹시… 이놈이 저번에 너를 공격했다는 놈 아니냐?”
좌소천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인은 좌소천과 기천승을 번갈아 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자를 끌어들인 좌소천이나, 죽이려 한 자를 따르기 위해 찾아온 기천승이나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끄응, 도대체 뭐가 뭔지…….”
기천승이 깨어난 것은 네 노인이 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끄응…….”
그는 깨어나자마자 재빨리 몸을 가누고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기천승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숨을 내쉬었다.
살문제일의 살수 귀영천살. 이제 그 이름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나보다.
“대체 그 노인은 누구요?”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오래전부터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분이니까요.”
눈살을 찌푸린 기천승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 오랜 시간도 필요 없이, 점점 커진 기천승의 눈이 좌소천을 향했다.
“흑살신… 무영자?”
좌소천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하마터면 명대로 못 살 뻔했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심심하다고 이곳에 와 계십니다.”
전대의 절대고수, 팔신(八神) 중에 한 사람인 흑살신 무영자가 심심하다고 와 있단다.
그 말에 뭐라 답한단 말인가?
“…….”
기천승의 입술이 딱 달라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모르자 좌소천이 물었다.
“수하들은 괜찮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천승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소. 둘은 두어 달만 지나면 평소의 몸을 되찾을 것이고, 한 사람만 무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것 같소.”
“다른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어찌 모르겠소, 그게 살수의 운명인데. 그나마 그대와 같은 고수에게 고통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도 그 아이들의 복이 아니겠소?”
생포되면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살수들이 태반이다.
고통 없이, 그것도 절대고수에게 죽었다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었다.
“그리 생각하신다니 이야기하기가 편하군요. 한 가지 묻겠습니다. 사공은환의 수하가 아니라 하셨지요?”
“그렇소.”
“그럼 어떠한 조건이 있기에 살행을 수락했을 터. 그 조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들어드리지요.”
기천승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좌소천을 직시했다.
자신이 자결하지 않고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나의 사문인 귀영문은 무림맹에 공적으로 몰리면서 설 땅을 잃고 말았소. 물론 그 일이 나의 살행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는 하오만, 나는 본 문을 다시 재건하고 싶소. 나의 조건은 그것이 다요. 본 문의 재건.”
“다시 재건한다 해도 무림맹에 의해 공격을 받을 겁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오.”
“차라리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기천승이 말을 이으려다 멈칫했다.
좌소천의 눈빛이 그런 기천승의 눈동자에 꽂혔다.
“곧 새로운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한 축을 맡으십시오. 그리되면 무림맹조차 귀영문을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기천승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물론 귀영문이라는 문파의 재건을 전재로 한 조건입니다.”
무림맹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단 말인가?
말을 잇는 좌소천의 몸이 갑자기 커 보이는가 싶더니 일순간에 자신을 짓누른다.
기천승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어차피 한 번 죽은 목숨,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였다.
“그리만 해주신다면… 따르겠소.”
좌소천이 두 손을 들어서 공수의 예를 취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한 약속은 지켜질 것입니다.”
기천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귀영문의 기천승이 좌 공자께 충의를 맹세하오이다!”
좌소천은 포권을 취한 손으로 기운을 뻗어서 기천승의 구부러진 무릎을 세웠다.
“우선적으로 처리해 줄 일이 하나 있습니다.”
2
기천승이 모종의 임무를 띠고 떠난 다음날 저녁.
좌소천은 공손양과 두 시진에 걸쳐 계획을 점검하고는 도유관과 능야산을 대동한 채 천문 지부를 나섰다.
나머지는 군사나 다름없는 공손양을 보필토록 했다.
당연하다는 듯 따라나선 네 노인은 그냥 따라오는 대로 놔두었다.
장강 쪽으로 간다고 하자, 마치 유람 가는 아이처럼 미리부터 설치며 정문 앞에서 서성이던 노인들이다.
말린다고 듣겠는가?
그리고 사실 좌소천도 네 노인의 힘을 필요로 했다.
무력만 해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열댓 명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력 외에 또 다른 힘이 존재했다.
그들의 이름. 그리고 신분.
그것이야말로 네 노고수가 지닌 무공보다도 더 큰 위력을 지닌 힘이었다.
이번 길에 그 ‘힘’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피를 줄이기 위해서.
좀 더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
앞장서서 걸어가는 좌소천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귀찮으시겠지만 저를 돕기로 한 이상 목에 힘 좀 주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