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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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86화
86화
지붕을 막 넘어가던 일호는 갑자기 자신보다 시커먼 안개가 너울지며 앞을 막자 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가 몸을 틀었을 때는 이미 시커먼 안개가 다시 앞을 가로막은 상태였다.
그는 더는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검을 앞세운 채 시커먼 안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켈! 제법이긴 하다만, 그따위 꼬챙이로는 감히 이 어르신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느니라.”
일호의 검이 일순간에 밤하늘을 수십 번 갈랐다.
하지만 무영자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퍽!
시커먼 손바닥이 가슴에 닿았다 떨어지고, 일순간 숨이 턱 막힌 일호는 입을 쩍 벌렸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검은 안개가 하얗게 웃고 있었다.
일호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흐, 흑살신 무영자?”
“알았으면 무릎을 꿇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무영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잠시 기분 내는 사이, 일호의 입가에서 시커먼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급히 다가간 무영자는 일호의 멱살을 잡고 목에 손을 대어봤다.
간당간당한 맥이 겨우 느껴졌다.
거기다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독향. 멱살을 놓음과 동시에 죽을 것이 뻔해 보였다.
“이 육시할 놈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분을 너무 내다가 그만 독단을 깨물 시간을 주고 말았다.
바로 그때, 아래쪽에서 동천옹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둥아, 잡았냐?”
‘지미, 저 칠삭둥이처럼 차라리 다른 놈에게 맡길걸.’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 그게… 잡으려니까, 나를 알아보고 그냥 죽어버렸다.”
“놈이 자결하게 놔두었단 말입니까, 선배?”
등소패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등소패에게 마저 밀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영자가 빽 소리쳤다.
“등가야! 내가 죽을 줄 알았냐?”
그러자 동천옹이 콧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명색이 흑옥의 태상이라는 놈이 그것도 생각 못했단 말이야? 킁, 너도 이제 늙긴 늙었구나. 쯔쯔쯔…….”
평소라면 칠삭둥이라며 마주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창피야?’
좌소천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오가기 귀찮다며 패천단에서 살다시피 하는 장로들과 직속무사들은 물론이고, 패천단의 주요 간부 등 단주의 건물이 있는 근처의 무사들은 모두 나온 상태였다.
그런데 암습자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은 자결하고, 한 사람은 도유관이 도끼로 이마를 쪼개고, 한 사람 목에는 능야산의 일곱 치 비도가 박혔다.
“이 자식들, 어째 하나같이 다 죽이기를 좋아하냐? 저 멍청한 친구야 상대가 자결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말이야.”
이번에는 무영자도 참지 않았다.
“그러게 직접 잡으라니까, 왜 애들한테 맡겨?”
“자결하는 걸 멀뚱히 눈 뜨고 지켜본 늙은이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흥! 나는 싸우기라도 했지. 뒷짐 지고 있던 너는 뭘 했는데?”
동천옹과 무영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한 채 좌소천만 바라보았다.
좌소천이 나서서야 두 사람의 눈싸움이 멎었다.
“짐작 가는 곳이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사로잡았어도 알아낼 게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자신의 잘못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처럼.
“하긴, 저런 놈들은 본래 입이 무겁지.”
동천옹이 그런 무영자를 흘깃 쳐다보며 비꼬았다.
“자네를 봐선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자네처럼 아무 데서나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지는 않아.”
동천옹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붉어졌다.
그때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무영자가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험,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자야겠다. 요즘 몸이 허해져서 말이야.”
그러더니 순식간에 장내에서 사라졌다.
동천옹은 무영자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왠지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도 들어갈란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
등소패가 좌소천에게 눈을 찡긋 하고는 동천옹을 따라갔다.
좌소천은 동천옹이 갑자기 시무룩해진 이유를 짐작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 등소패에게서 동천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십여 년 전, 술에 취한 동천옹이 술자리에서 자신의 친구가 은거한 곳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원수가 그 말을 듣고 은거지를 찾아가서 친구를 죽였다고 했다.
그 일 이후, 동천옹이 장난을 좋아하긴 해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무영자가 그런 동천옹의 조문을 찌른 것이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라 했는데, 아직까지 마음에 부담이 되시는 모양이군.’
하긴 가슴에서 맺힌 것이 어찌 쉽게 지워질까.
좌소천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안에서 들려 나온 것까지 다섯 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그만큼 움직임이 은밀했다. 사공은환의 노림수에 대비하지 않았다면 이리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짐작 가는 곳이 있다 하셨는데, 어디에서 온 자들입니까?”
곁으로 다가온 공손양이 물었다.
좌소천과 천외천가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어머니에 대한 것까지 아는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공손양도 좌소천이 천외천가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불구대천의 원한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것까지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좌소천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 말해주겠소.”
좌소천이 답을 미루는데 능야산이 다가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좌소천을 응시했다.
“저들이 왜 좌 아우… 아니, 단주를 공격한 것인가?”
단순한 물음이 아닌 듯 느껴졌다.
하지만 좌소천은 미처 그의 마음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저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요. 자세한 것은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기에 그렇게만 말하고 이자광을 시켜 뒷수습을 하게 했다.
“이 형, 이 형이 사람들을 시켜서 시신들을 한곳으로 옮겨주시오. 날이 밝으면 자세한 것을 알아보겠소.”
“예, 단주.”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내실은 피로 범벅되어 당분간 지낼 수 없을 듯했다.
좌소천은 사람들을 내실이 아닌 집무실 쪽으로 데려갔다.
공손양과 능야산, 도유관 등 직속무사들과 모이산, 포규상 등 대주들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
일이 벌어졌을 때 알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천외천가는 협상의 대상이 아닌 적이란 것을.
촛불에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좌소천이 입을 열었다.
“나는 저들을 천외천가의 사람들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공손양은 어느 정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머지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외천가의 무사들은 어깨에 표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암습자들은 아무 표식도 없었다.
그런데도 좌소천은 그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가.
특히 능야산은 표정마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천외천가의 표식도 없는 자들인데……?”
“이 자리에서 자세한 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오래전부터 천외천가에서는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 바람에 백부까지 저를 지키시려다 놈들의 손에 돌아가셨지요. 그런데 저들의 무공에는 당시 저를 공격했던 자들과 같은 류의 무공이 녹아 있었습니다.”
능야산은 뭔가를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걸 물어보기 위해선 자신에 대해서도 모두 밝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좌소천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그 일로 인해서 나와 천외천가는 견원지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본 궁과 천외천가와의 흐름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지만, 나는 천외천가와 어떤 식으로든 가까이 할 생각이 없습니다.”
공손양이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궁주께서 천외천가와 모종의 협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정말로 궁주께서 그들과 손을 잡으신다면 단주께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미 어떻게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공손양이다. 그런 만큼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이 기회에 자신의 뜻을 정확히 밝히라는 주문이다.
좌소천의 표정이,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궁주께선 나와 천외천가와의 일을 알고 있소. 그럼에도 그들과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더는 제천신궁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오.”
장내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갈라서겠다는 말.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좌소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입이 굳어버렸다.
침묵 속에 좌소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때 가서 나를 따르지 않을 거라면 지금 떠나라는 것이오.”
만 근의 바위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했다.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간 공손양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인지 크게 동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좌소천의 입에서 막상 그 말이 나오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손양이 침묵을 깼다.
“나는 단주와 함께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닥쳐도.”
도유관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시오. 붙잡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알고 가시오. 남자라면 자고로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걸. 밖에 나가서 입을 여는 자는 내 도끼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
적사응이 이마를 찌푸린 채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 말씀은, 제천신궁과 완전히 등을 돌린다는 것입니까?”
“나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과 한 배를 타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나 제천신궁을 적으로서 상대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소. 보다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주겠소.”
황신양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계획이 있으신 것 같은데……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좌소천은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며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입을 연 마당. 좌소천은 만 근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간단하오. 나는 새로운 하늘을 열 것이오.”
쿠궁!
가슴속에서 북이 울리는 듯했다.
알고 있었던 사람이나 모르고 있었던 사람이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된다는 것!
꿈이 있는 자의 영원한 바람이 아니던가!
이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간 사람도 없었다.
두어 명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를 지그시 깨문 그들도 고개를 끄덕여서 좌소천의 의지에 동참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자 모이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떠날 사람이 없는 모양인데, 피냄새도 씻어낼 겸 우리 술이나 한잔하면 어떻겠소? 밤이 좀 늦긴 했지만, 그럭저럭 술맛이 날 것도 같은데.”
좌소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한 고개는 넘어갔다. 술을 한잔해도 좋을 듯했다.
6장 제 목숨을 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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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을 손에 쥔 구포봉의 얼굴에 하얀 웃음이 번졌다.
“이제 시작인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하경이 벌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호북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요.”
“그러겠지. 새로운 하늘이 나타나기 위해선 천둥과 벼락이 치는 법이니까. 하지만 생각보다는 그리 소란스럽지 않을 것이야. 좌 공자는 힘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거든.”
“우흐흐흐흐, 좌우간 생각만 해도 떨리는군요.”
“벌써 떨면 어떡하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말입니다.”
“잘못하면 뒈질지도 모르는데 기분이 좋기는…….”
“커험, 그게 남자 아닙니까.”
장하경을 흘겨본 구포봉이 서신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늘부터 정신없이 사람들을 모아야겠군.”
“전부 끌어 모을 겁니까?”
“누구 망할 일 있어? 광한방 놈들이 눈을 흘기고 있는데, 사업을 유지하려면 놈들을 견제할 힘은 있어야지.”
“그럼 몇 명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