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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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77화
77화
벽여령이 나가지 않고 다시 차를 따른다.
그런데 검인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도 긴 속눈썹 속의 눈동자에 조금의 파장도 없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어찌 보면 벽수양보다 더 담담한 눈빛.
오히려 벽수양이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좌소천은 벽여령이 차를 따르고 다시 뒤로 물러서자 간단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세상에 다시 나오면서, 저는 하늘이 되고자 결심했습니다.”
순간 벽여령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벽수양은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찻잔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좌소천은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벽여령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부장님의 뜻, 잊지 않겠습니다.”
방에서 나온 좌소천은 마당에 피워놓은 화톳불의 불빛 끝자락, 목백일홍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옷자락 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은은한 국화향, 가느다란 숨소리. 벽여령이었다.
그녀는 다섯 자 옆에 멈춰 서더니 은방울 굴러가는 목소리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렸다는 거…… 아셨나요?”
“짐작만 했을 뿐이오.”
“제가 어리석게 느껴지지나 않았을지 모르겠군요.”
“검인보의 생사를 결정하는 말을 낭자가 직접 꺼낼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고개를 돌린 좌소천이 벽여령을 바라보았다.
화톳불의 불빛이 벽여령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좌소천의 눈초리가 잘게 떨렸다.
좌소천은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소?”
벽여령이 목백일홍 나뭇가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둘째 공자를 봤어요. 그를 보고 제천신궁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잠강에서의 일을 들었어요.”
그녀의 눈이 좌소천을 향했다.
“좌유승 태군사의 아들이라면, 제가 본 좌 공자라면, 작은 허명에 안주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좌소천을 직시한 그녀의 눈에 어떤 열망이 떠올랐다.
좌소천은 벽여령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위험할지도 모르오. 검인보가 폭풍우에 휘말릴지도 모르오. 그래도 괜찮겠소?”
“좌 공자께서 모르시는 게 하나 있어요.”
벽여령의 조용한 말에 좌소천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벽여령이 어둠속에서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말을 이었다.
“검인보는 이미 강호 한가운데 있어요. 뿌리째 휩쓸고 갈 폭풍우를 여러 번 겪기도 했지요. 오래전, 신월맹에 있을 때부터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이 그랬다. 한때는 신월맹에 흡수되기도 했고, 신월맹이 망한 지금은 제천신궁의 지부가 되어 있다. 약한 듯 보이면서도 어느 곳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곳이 바로 검인보인 것이다.
그런 검인보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
좌소천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벽여령을 바라보았다.
“내가 운이 좋은 것 같소. 인의의 가문이라는 검인보의 마음을 얻다니.”
벽여령에게는 그 말이 꼭, 자신의 마음을 얻어 기쁘다는 말처럼 들렸다.
슬며시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얼굴에 도화가 피었다.
그녀는 어둠이 가려주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좌소천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그대로 다 보였다.
“흠,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소. 벽 낭자도 피곤하실 텐데, 가서 좀 쉬시구려.”
공연히 헛기침을 한 좌소천은 조금 과장된 몸짓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얼굴을 든 벽여령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는 어둠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좋아하는 여인이 있나요?”
좌소천이 멈칫하더니, 한참 만에야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하아……. 있… 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순간 벽여령의 눈이 반짝였다.
2장 폭풍우를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1
패천단이 귀환하는 날.
제천신궁의 중앙 대로에 수천 명이 운집했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북향의 향주 좌소천.
태군사 신유 좌유승의 아들.
바로 그를!
마차에 실린 혁련호승을 데리고 남향이 돌아왔을 때와는 천양지차의 반응이었다.
제천전의 양옆으로 사십여 명의 간부가 늘어서 있다.
좌소천은 그 사이를 걸어 혁련무천 앞으로 다가갔다.
“북향주, 좌소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궁주!”
좌소천의 인사에 혁련무천이 환히 웃었다.
“잘했다, 소천! 너의 쾌거로 본 궁의 백 년 대업이 코앞에 이르렀구나!”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과찬. 당연한 칭찬이지!”
서로가 굳이 혁련호승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미 궁내의 모든 무사들이 알고 있는 일, 꺼낼 때가 아니었다.
“어느 누가 너처럼 짧은 시간 안에 전마성을 무찌르고 지부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더냐. 더구나 수하를 잘 돌봐서 그 피해마저 적으니, 내 칭찬을 아낄 수가 없구나.”
“모든 수하들이 저의 말에 잘 따라줬기 때문입니다, 궁주.”
“하하하하! 그것 또한 능력이지. 내 황창안으로부터 모든 사정을 들었다. 그대들은 들어라! 여기 있는 좌소천은 태군사의 아들로서뿐만이 아니라…….”
혁련무천은 좌소천의 행적을 일일이 드러내며 칭찬하더니, 마지막에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하기에 본 궁주는 북향의 향주 좌소천을 비어 있는 패천단의 단주로 임명할 것이다!”
간부들 중 일부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내오당 중 하나이자 정보망을 관리하는 천이당의 당주 호연금이었다.
“그전에 좌 공자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사옵니다, 궁주!”
“뭔가? 의문이 있으면 뭐든 물어봐라.”
“좌 공자가 전마성주의 셋째 아들인 사도진성을 내공까지 되돌려준 채 살려 보냈다고 들었사옵니다. 인질로 쓸 수 있는 그를 순순히 돌려보낸 이유를 알고 싶사옵니다.”
몇 사람이 의심의 눈빛을 빛내며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혁련무천이 그들의 눈빛을 대변해 물었다.
“말해봐라, 소천. 왜 그랬느냐?”
“간단합니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잠강과 천문을 뺏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강과 천문을 뺏긴다? 사도진성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사도철군은 단순한 성정 같으면서도 냉철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사도진성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들을 포기하고 잠강과 천문을 쳤을 것입니다. 그가 아들의 죽음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할 경우, 전마성의 무사들이 어떻게 나올지 뻔한 상황.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궁주.”
호연금이 눈살을 찌푸렸다.
“꼭 그렇게 되란 법은 없잖은가?”
“사도진성을 풀어줄 즈음, 전마성에선 성주인 사도철군을 비롯해 분노에 찬 이천 무사가 출정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전마성을 나섰다면 잠강과 천문뿐만이 아니라 응성과 한천까지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당주시라면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호연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도 모르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고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사도진성을 풀어준 것이 그 일과 연관되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럼 전마성이 무장해제한 이유가……?”
엉겁결에 입을 연 호연금이 힐끔 한쪽을 바라보았다. 사공은환을 향해서였다.
그러다 사공은환의 눈이 가늘어지자 흠칫 눈을 돌렸다.
좌소천은 상황을 대충 유추하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도철군이 아들을 살려준 빚을 갚기 위해서 일단 무사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것이지요. 덕분에 한 달 정도의 여유가 생겼으니, 사도진성의 목숨 값으로는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당주.”
여기저기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못마땅하게 여겼던 자들조차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무천이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더 물어볼 것이 있는가?”
“없사옵니다, 궁주!”
“그럼 좌소천을 패천단의 단주로 임명하는 바이다!”
좌소천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궁주! 제천신궁의 패천단주로서 신명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하하하, 곧 연회가 준비될 것이다! 오늘은 모두가 즐겁게 마시고 놀아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혁련호승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큰 죄라도 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비록 그로 인해 약간의 어색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분위기가 그렇게 부드럽게 흘러갔다.
하지만 다섯 시진에 걸친 연회가 끝나갈 즈음, 분위기는 기이할 정도로 침잠되었다. 몇 사람이 술기운에 혁련호승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거, 하필이면 왜 태군사를 모욕해서…….”
“어허, 조 호법.”
“음? 어험, 나야 뭐 안타까워서 한 소리지요.”
“사실이 그러니 뭐라 하지는 않겠소만, 거 눈치 좀 있으시구려.”
“아니, 말 못할 것은 또 뭐요? 그 정도 이야기도 못한단 말이오?”
“장 장로, 취했소? 취했으면 그만 가서 주무시구려.”
“취하긴 내가 왜 취해? 나 조금도 안 취했다니까? 꺼억.”
결국 날을 샐 것 같던 연회는 자시가 되기도 전에 파장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축시 무렵, 분노한 혁련무천의 외침이 제천전 깊숙한 곳에서 울렸다.
“멍청한 놈!”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공은환의 눈빛이 파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다.
어느 때에도 흔들리지 않던 혁련무천이다.
그런데 수십 년간 참았던 분노를 모조리 쏟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이 보는 앞에서 거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하나, 결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열 말의 술기운도 단숨에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혁련호승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좌소천 때문이었다.
오늘의 영광된 자리는 혁련호승의 것이 되어야 했다. 서벌에 혁련호승을 보낸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좌소천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혁련호승은 불구나 다름없는 몸이 된 채 천화원의 구석에 처박혀 있고.
거기다 좌소천의 잘못을 부각시키려던 일조차 거꾸로 좌소천의 뛰어난 지략을 칭찬하는 자리로 변하고 말았다.
하기에 제아무리 냉철한 혁련무천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것이다.
그도 아버지였으니까.
‘고양이도 자식은 자식. 하나, 당신은 그보다 다른 이유 때문에 더 화가 나는 것이겠지요. 호랑이의 자식이 결국은 고양이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더구나 그걸 드러낸 사람이 한낱 노리개로 여겼던 좌소천이었으니 그 분노가 오죽할까.
그때 혁련무천이 사공은환을 불렀다.
“은환!”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예, 주군.”
“방법을 찾아라. 호승이 놈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을.”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소천이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 봐라.”
그제야 사공은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뜻 혁련무천의 차갑게 번뜩이는 눈빛이 보였다.
“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거기에는 분명 연유가 있을 것이다.”
“복명!”
“방법은 너에게 맡기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조사해.”
2
“일대주 포규상, 단주의 취임을 경하드립니다!”
“이대주 모이산, 단주의 취임을…….”
“삼대주 여휘랑…….”
“사대주 반호…….”
“오대주 적사응…….”
“육대주 황신양…….”
대주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좌소천은 탁자 양쪽으로 앉은 여섯 명의 대주를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고맙습니다.”
패천단에 대한 인식은 좌소천이 남쪽으로 떠날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호북의 소식이 전해진 뒤부터 지원무사가 하루에 이십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위지승정이 말하길,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위해서 좌소천과 혁련호승을 향주로 삼았을지 모른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가슴 속에 불길을 담고 있는 강호 청년들이 너도나도 패천단을 지원해서 가려 뽑아야 할 지경인 것이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쓸 만한 자들이 제법 섞여 있었다. 공손양과 도유관처럼.
오대와 육대의 대주로 임명된 적사응과 황신양도 그런 자들이었다.
혁련무천이야 속이 쓰릴지 몰라도 좌소천으로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은 곧 나에게 패천단을 맡긴 걸 후회하게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