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54화
무료소설 절대천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54화
54화
조용히 서 있던 사공은환도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좌소천의 말이 마치 ‘당신도 인연이 없는 것 같다’라는 뜻처럼 들린 것이다.
그러나 좌소천은 흔들림 없이 말을 맺었다.
“하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부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천하제일고수가 아니십니까? 곧 연이 닿아 풀릴 것입니다.”
“혹시 그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없었나 모르겠구나.”
“백부님이시라면 비록 금판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해도 그내용의 선후는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빠진 것이 있었는지요?”
좌소천의 되물음에 혁련무천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안다. 빠진 것이 없다는 걸.
제대로 해석을 할 수는 없지만, 시작과 끝, 하나하나가 이어지는 것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는 그다.
그런 그가 봤을 때 금판은 완벽히 시작과 끝이 있고, 모두가 연결된 것이었다.
게다가 하도 답답해서 삼 년 만에 사공은환에게 금판을 보여주고 함께 풀어보았는데, 사공은환 역시 중간에 빠진 것이 없다고 했다.
“으음, 참으로 답답한 일이로구나.”
좌소천은 혁련무천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눈을 내려 바닥을 보았다.
‘당신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때였다. 누구가가 제천전으로 들어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뒤에서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 그 목소리가 갈퀴가 되어 등을 긁는다.
좌소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조금 굵어졌을 뿐 그자의 목소리다.
혁련호승! 승냥이 같은 자!
아니나 다를까, 혁련무천이 눈을 들더니 묘한 표정을 짓는다.
“왔느냐, 호승아.”
‘혁련호승! 역시 너였구나!’
혁련무천의 눈이 좌소천을 향했다.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좌소천은 쓰라림이 밀려오는 것을 꾹 참고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백부님.”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한순간, 좌소천의 무심하던 표정에 파동이 일었다.
칠 년의 세월이 그를 많이 바꿔놓았다. 그러나 좌소천이 어찌 그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호승 형님.”
혁련호승도 의외였는지 얼굴색이 몇 번이나 변했다.
‘저 벌레 같은 새끼가 왜 저기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코앞까지 다가왔을 즈음에는 평소의 얼굴을 되찾은 뒤였다.
“반갑다, 소천. 이제 완전히 어른이 다 되었구나.”
“벌써 팔 년이 흘렀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형님이 전과 많이 달라져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좌소천의 눈빛은 이미 빛 한 점 없는 심해의 그곳처럼 깊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반면에 혁련호승의 눈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먹이를 앞둔 잔혹한 이리의 웃음이.
“자, 둘 다 이리 오너라.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혁련무천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눈싸움이 끝났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두 사람 다 모르지는 않았다.
‘혁련호승, 그 승냥이 같은 성격을 고치지 않았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비천한 거지새끼, 네놈은 나에게 영원히 거지새끼일 뿐이다.’
속으로야 칼끝을 서로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기회만 나면 상대의 목을 쳐버리겠다는 마음.
하지만 두 사람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란히 섰다.
언뜻 보면 다정한 형제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혁련무천도, 사공은환도 두 사람 사이에 천 장 높이의 만년빙이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입을 여는 혁련무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서쪽에서 정한의 혈풍이 불고 있다. 나는 그걸 호기라 생각하고, 그동안 방치했던 접경 지역을 정리하려고 한다. 너희 둘이 그 일의 선두에 서주었으면 싶구나.”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마침내 제천신궁이 서벌에 나서는 선가?’
좌소천과 구포봉도 예상을 했다. 그 좋은 기회를 그냥 버릴 혁련무천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러나 조금 빠른 감이 없지 않았다.
왜, 왜 혁련무천은 서두르는 것일까?
반면에 혁련호승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거지새끼하고 함께 움직이라고?’
벌레 같은 거지새끼 좌소천을 자신과 똑같이 취급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태군사의 아들이면 아들이지, 저깟 놈이 어떻게 자신과 비교된단 말인가!
그는 울컥 솟구친 감정을 억누르고 혁련무천에게 물었다.
“아버님, 하면 소천이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요?”
혁련무천이 옆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제야 사공은환이 말문을 열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둘째공자. 비슷한 곳에서 작전을 진행시켜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둘째공자와 좌 공자는 따로 떨어져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경쟁을 시키겠다는 거군.’
혁련무천과 사공은환의 계획을 눈치 챈 좌소천이 조용히 사공은환을 응시했다.
가족을 빼고 혁련무천의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제천신궁 내에 열 명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서 있을 뿐만 아니라 혁련무천을 대신해서 대답까지 하다니.
누군가? 저자는 누구기에 혁련무천 대신 입을 여는가?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저 옆에 섰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사가 된 자일 터. 문제는 저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자광도, 관추릉도, 언자홍도 저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두 분 공자는 각자 제천단과 패천단을 이끌어주십시오. 황파 총지부와 호북의 각 지부에서 선별된 무사 삼백가량을 지원할 것입니다. 두 분이 그들을 이끌고 전마성의 지부를 칠 때쯤이면 후속대가 갈 것입니다.”
사공은환의 말이 끝나자 혁련무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는 잡으려는 자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구경만 하고 있으면 그냥 날아가 버리는 놈이 기회지. 나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다. 너희들은 최선을 다해 내 뜻에 따라주기 바란다.”
4
식사를 하는 자리에는 혁련가의 식구들만 앉아 있었다.
그나마도 웃어른은 빼고 혁련무천 부부와 그의 자식들이 전부였다.
자리에 앉은 지 일각. 좌소천은 전면에 앉은 장년인을 보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군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서른 초반의 나이. 부드러운 인상이면서도 머리 위에서 만근 바위가 떨어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자.
그는 혁련호정. 차대 제천신궁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소천 아우를 보니 정말 반갑군.”
“소제도 제천신궁 제일의 기재라는 큰형님을 뵈어서 기쁩니다.”
“과찬이네. 듣기로는 아우야말로 진정한 기재였다고 하던데 말이야. 그래, 호승이와 함께 서벌에 나설 거라고?”
눈이 깊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 혁련호정은 혁련무천의 아들. 그것도 제천무제 혁련무천을 빼다 박았다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정말 조심해야 할 자.’
좌소천은 마치 그의 눈빛에 압도당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백부님께서 너무 과한 기대를 하시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하하하, 아버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나?”
혁련미려가 당연하다는 듯 거들었다.
“맞아요, 큰오빠. 아버지가 소천이의 실력을 둘째오빠와 비슷하게 봤으니 그리했을 거예요.”
“크음, 그거야 붙어봐야 아는 것이지.”
혁련호승이 콧소리를 내며 좌소천을 흘겨보았다. 차마 표현을 못할 뿐 분노가 서린 눈빛이었다.
그때 혁련무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공으로는 호승이가 밀린다는 게 이 아비의 생각이다.”
“아버님!”
혁련호승이 발끈했다.
좌소천은 의외의 말에 혁련무천을 바라보았다.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기에 단정하듯 말하는지는 몰라도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련무천이 혁련호승을 쏘아보았다.
“너는 내가 잘못 봤을 거라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
“너는 모이산을 단칼에 다섯 걸음 물러서게 할 수 있느냐?”
혁련호승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자식이 진짜 실력으로 그렇게 이겼을 리가 없어.’
자신이 귀혈도 모이산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크다 해도 일 검에 다섯 걸음을 물러서게 할 수는 없다.
“급작스런 일격에 그리되었다 들었습니다.”
“모이산은 철저히 단련된 사람이다. 아무리 급작스런 공격에 당해도 흔들릴 사람이 아니니라.”
“하오나…….”
“소천이는 그런 모이산을 다섯 걸음 물러서게 했다. 설마 너는 그게 소천이의 실력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혁련호승이 입을 닫고 탁자 위의 음식만 바라보았다.
“분발하지 않으면 더욱 그 차가 커질 것이다.”
“…예, 아버님.”
“하나 무공 외적인 것이라면 너에게도 충분한 장점이 있다. 그 점을 잘 살린다면 결코 소천이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혁련호승이 천천히 눈을 들더니 좌소천을 응시했다. 끓어올랐던 분노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그 즈음에야 좌소천은 왜 혁련무천이 엉뚱한 말을 꺼내는지 깨달았다.
함께 움직일 자신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멋모르고 자신을 짓밟으려 할지 모르는 혁련호승에게 주의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을 상대하려거든 스스로의 장점을 살펴서 대처하라는 말이었다.
그래야 만사에 더 조심할 것이고, 자신에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나 역시 모든 것을 알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요, 백부.’
좌소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호운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 아이는 여섯 달 후에나 제천동을 나올 수 있을 거다. 자!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 아니더냐? 모두 맛있고 즐겁게 식사부터 하자!”
5
혁련무천을 만나고 패천단으로 돌아온 다음날.
좌소천은 혁련무천의 곁에 있던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만박수사(萬博修士) 사공은환.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가 군사라는 것, 혁련무천이 오른팔처럼 여긴다는 것, 그리고 밀천단의 단주라는 것이 전부였다.
좌소천은 그가 밀천단의 단주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제천신궁의 정보 집단이면서도 드러내 놓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몰래 해결하는 곳이 밀천단이다.
어쩌면 제천신궁의 대소사가 모두 밀천단에 의해서 감시를 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라면 아버지에 대한 것을 상세히 알고 있을지도…….’
하지만 당장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좌소천은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얻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패천단 일대에 있었다.
방을 나선 좌소천이 찾아간 곳은 패천단 일대주인 포규상의 거처였다.
박룡수(搏龍手) 포규상.
그의 박룡구절은 전대의 고수이자 제천신궁의 장로인 신권 등소패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한 절기였다.
당연히 그의 무위도 대단했다.
한 번은 박룡수가 제천신궁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등소패가 찾아왔다.
둘은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누고 기량을 겨루었다.
그러나 포규상이 맞상대하기에 등소패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삼십여 초 만에 포규상이 패배를 시인했다.
그런데도 등소패는 오히려 포규상의 박룡구절을 천하의 절기라며 추켜세웠다. 공력의 차이만 없었다면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그 일 이후 포규상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아마 악청백이 혁련무천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면 패천단의 단주는 그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좌소천이 포규상의 거처로 다가가자 두 사람이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오?”
두 사람도 좌소천에 대해 알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대주가 된 지독히도 운이 좋은 청년. 비록 그것이 전부였지만.
“일대주를 뵈러 왔소. 말씀 좀 드려주시겠소?”
좌소천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한 중 하나가 턱을 치켜들었다. 비릿한 조소가 섞인 표정이었다.
“잠시 기다려 보쇼. 일단 말씀은 드려보겠소.”
잠시 후, 방 안에 들어갔던 장한이 나오더니 슬쩍 고갯짓을 했다.
“들어가 보슈.”
포규상은 당당한 체격을 지닌 데다, 굵은 얼굴선과 흑염이 어울려서 나름 묵직한 기상이 풍기는 자였다.
그러나 한 번 터지면 말릴 사람이 없다는 다혈질이었다. 남이 건들지만 않으면 쉽게 터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포규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인가?”
그와는 아침 조회 석상에서 두어 번 만난 사이였다.
별 이야기는 나눠보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오대주가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악청백과 모이산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말을 아낄 뿐.
“사람을 하나 데려갈까 해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