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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천왕 34화

무료소설 절대천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64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절대천왕 34화

 

34화

 

 

 

 

 

 

그에게 부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에 걸려 있어서 삼 년째 별거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혁련미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열기가 더욱 짙어졌다.

 

 

 

 

 

4

 

 

 

 

 

“정신이 드느냐?”

 

여인은 눈을 뜨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붉은 빛이 두 눈에 가득 찼다.

 

여기는 어딜까?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내가 보이느냐?”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노파의 얼굴. 그런데 염려가 가득한 눈빛이다.

 

저 노파는 누굴까?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여인은 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다시 눈동자를 돌렸다.

 

“아직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너무 오랫동안 기혈이 막혀서 그런 것이니까.”

 

“어어…….”

 

물어보고 싶었다. 여기가 어딘지, 할머니는 누군지.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충격 때문에 아혈이 막힌 것이란다. 시간이 지나면 뚫릴 테니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려무나.”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 얼마나 답답할까?

 

“이곳은 한이 쌓인 여인들이 모여 있는 정한궁이란다. 무산 깊숙한 곳에 있지. 몸이 나으면 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테니 지금은 쉬도록 해라.”

 

노파의 말을 듣고 있던 여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득히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피로 범벅된 중년인의 얼굴, 아픔이 가득한 소년의 얼굴.

 

두 얼굴이 떠오르자 눈물이 나왔다.

 

소리없는 울음이 가슴을 적시고 온몸을 적셨다.

 

그런데…… 두 얼굴이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굴까? 누군데 그 얼굴이 떠오르니 이리도 슬픈 걸까?

 

그리고 나는, 나는 누굴까? 내 이름은?

 

“아아아……!”

 

‘할머니! 저는 누군가요? 여기는 어딘 가요?’

 

 

 

 

 

 

 

4장 말코로 죽을 팔자, 뭘 더 망설이랴

 

 

 

 

 

1

 

 

 

 

 

승허암에서 생활한 지 한 달 보름째 되던 날.

 

좌소천은 영허 진인과 마주 앉았다.

 

“무당의 무공을 배워보지 않겠느냐?”

 

영허 진인의 말에 좌소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평생을 노력해도 제가 가진 것을 다 익힐 수 없을 것입니다, 어르신.”

 

“무당과 인연을 맺는 것이 부담스러우냐?”

 

“이미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 무당의 어른이십니다.”

 

인연은 이미 맺어졌다. 비록 영허 진인이라는 한정된 틀 안의 인연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더한다 해서 특별히 부담을 느낄 것도 없었다. 다만 마음이, 본능이 무당과 더 큰 인연으로 맺어지는 걸 거부하고 있을 뿐.

 

영허 진인은 무위의 눈으로 좌소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와 무당의 무공을 배운다는 것도 그렇지. 하나 이것만은 알아라. 하나도 둘도 무상(無想)에서 시작해 무상으로 돌아가니, 그것이 곧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걸.”

 

너무 크고 넓어서 당장은 몸으로 느낄 수 없는 말이다. 

 

세상의 사람들 중 그 경지를 맛본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기에 언젠가는 도달하고 싶은 경지이기도 하다.

 

“잊지 않겠사옵니다.”

 

영허 진인이 여전히 끄덕이는 모습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요 밑에 내려가면 아무도 찾지 않아서 혼자 무공을 익히기에 적당한 곳이 있다. 내 오래전 홀로 지내던 곳이지. 아마 너도 마음에 들 것이다.”

 

꼭 그래서 좌소천에게 그곳을 일러준 것은 아니다.

 

그걸 알기에 영허 진인은 웃음이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아직도 모든 것을 떨치지 못했으니 천생 빌어먹을 말코로 살다 죽을 팔자로다. 흘흘흘. 그래, 어차피 말코로 죽을 거라면 내 뭘 더 망설이랴.’

 

 

 

승허암이 있는 절벽의 아래쪽.

 

그곳은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아무도 가지 않는데다가, 옆에는 작은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소를 이루고 있어서 수련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절벽을 내려간 좌소천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순간 넋을 잃은 채 한쪽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절벽에는 모두 세 개의 그림이 다섯 치 깊이로 그려져 있었다.

 

노인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고, 앞을 가리킨다.

 

검이 그려져 있지는 않았다. 도가 그려져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검을 쥔 것처럼, 도를 쥔 것처럼 부드럽게 말려 있는 손을 본 순간, 좌소천은 그림의 노인이 뭔가를 쥐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또한 손에 도검이 없었기에 그 도검이 만변(萬變)이면서도 무변(無變)처럼 느껴져서, 무려 이틀 동안이나 그림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무연칠식.

 

좌소천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무연칠식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일곱 초식의 무공이 단 세 번의 손짓에 모두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랬다. 거기에는 무연칠식과 같은 길을 걷는 대오(大悟)의 경지가 담겨 있었다.

 

‘만류귀종이라 하더니…….’

 

좌소천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림을 마주한 지 이틀 만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영허 진인의 뜻을 짐작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인 지 얼마 되지 않는 걸로 봐서 영허 진인이 최근에 그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 뜻은 무당과의 연을 보다 확실히 이어놓고자 함일 터.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희석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듯했다.

 

복수를 위해서는 떨쳐야 할 연(緣)이다.

 

원수의 목을 치기 위해서는 더욱더 붉게 물들여야 할 마음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가슴속에 박혀 버린 그림인 것을.

 

‘그리도 원하신다면 무당과의 인연만은 끊지 않겠습니다.’

 

 

 

다시 그림을 관조하며 하루가 지났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사흘 만에 승허암으로 올라가자 영허 진인이 물었다.

 

“뭘 봤느냐?”

 

좌소천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허 진인이 흘흘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계속 봐라. 뭔가를 보려 하면 볼 수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보다 보면 언젠가는 보일 것이다. 다 보고 나서 지우는 거 잊지 말고.”

 

 

 

 

 

2

 

 

 

 

 

석 달째 되던 날 무당의 장문인 현고자가 달려왔다.

 

영허 진인이 연락을 하지 않자, 현오자가 참지 못하고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

 

“사백!”

 

“현오, 그 녀석이 일러바쳤더냐?”

 

“사백, 지금 그게 문제이옵니까? 대체… 어찌 이런 일이…….”

 

“클클, 조용히 도나 닦다가 등선하려 했더니, 사질들 때문에 다 틀려 버린 것 같구나.”

 

도가의 종주 무당의 장문인이 바로 현고자다. 현고자는 영허 진인의 말뜻을 깨닫고 창백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혹시……?”

 

“이 년을 넘기기 힘들 것 같구나. 하늘이 더 허락한다 해도 몇 달 정도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조용히 놔두려무나.”

 

“하오나…….”

 

“혹시라도 내게 검을 원하는 것이더냐?”

 

전해줄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전해줄 터였다.

 

욕심을 부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 소질이 그런 황망한 욕심을 부리겠사옵니까?”

 

영허 진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현고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현고자가 대제자가 아니면서도 무당의 장문인이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었다.

 

“이미 검을 잊은 지 삼십 년이니라. 인연이 전해지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그저 기다리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나.”

 

“그리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백.”

 

풍진세상을 돌아다니며 검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연이 닿지 않으면 전할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검.

 

하기에 좌소천에게 전했다. 어차피 무당의 검을 익힌 자는 익힐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검이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인연이 다가오고 있음이니…….’

 

그때 현고자가 슬며시 물었다.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신다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무당의 제자인지요?”

 

영허 진인이 조용히 되물었다.

 

“장문 사질, 무당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무당의 제자이던가?”

 

“아니옵니다.”

 

“장문 사질의 혈육이 모두 무당의 제자이던가?”

 

“그도 아니옵니다.”

 

“그럼 그 아이도 그리 생각하게나. 이 늙은이와 약간의 연이 이어져서 이곳에 있다 생각하면 될 것이야.”

 

“현오에게 말은 들었습니다. 손자로 생각하면 되겠사옵니까?”

 

“흘흘, 그리 생각해도 되고 아니라 생각해도 되네. 그 아이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까.”

 

현고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허 진인이 누구던가. 영허 진인이 그리 말한 이상 그리 생각하면 되었다.

 

“사백의 말씀대로 그리 생각토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그 아이를 박대하지는 말게나.”

 

“제가 어찌…….”

 

“어쩌면 그 아이로 인해서 무당에 시련이 다가올지도 모르네. 하나 견뎌내게나. 그러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음이니.”

 

막막한 말이다. 그러나 영허 진인의 말이다.

 

현고자는 흐르는 대로 놔두기로 마음먹었다.

 

“순행에 따르겠나이다.”

 

영허 진인은 조용히 웃었다.

 

분명 들고일어나는 제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흐름이 그러하니 어쩔 수가 없다.

 

현고자가 순행에 따르겠다고 말한 것 역시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고자에게는 들고일어나는 제자들을 누를 수 있는 덕이 있음이니, 영허는 그걸 알기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괜찮아. 아주 괜찮아. 사제가 현송 대신 현고를 택한 것은 무당의 복이로다.’

 

 

 

현고자가 돌아간 지 닷새 만에 허리가 구부러진 도인 둘이 찾아왔다.

 

그들은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을 본 듯 담담히 차를 마시고는 다음날 찾아올 것처럼 그렇게 떠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도록 승허암을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이 등에 식량 보따리를 지고 찾아왔다.

 

“무진! 어디 있나?!”

 

현오자의 제자인 정은이었다.

 

그가 부른 이름, 무진(無瞋).

 

그 이름은 영허 진인이 무진도의 이름을 따서 좌소천에게 붙여준 것이었다.

 

좌소천과 무당파 사이에 연을 맺어놓으려는 마음이었다.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뜻이 담긴 것이기도 했고.

 

좌소천도 그 이름이 싫지 않아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기에 무당에서는 좌소천을 무진으로 알고 그렇게 불렀다.

 

정은의 목소리가 절벽을 타고 넘어가기도 전, 승허암의 방문이 열리더니 영허 진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녀석아, 그 녀석 올라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오너라!”

 

왠지 푸근한 표정, 마치 기다리던 손자를 반기는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였다.

 

하긴, 마침내 또 하나의 인연이 찾아왔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3

 

 

 

 

 

인연은 무당산에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안개 바다를 뚫고 칼처럼 솟은 산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곳.

 

무산(巫山)의 깊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동굴 속에서도 천 년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은은한 붉은 빛이 가득 찬 방원 삼십여 장의 동굴.

 

그 한가운데 있는 옥으로 된 좌대 위에 늙고 젊은 두 여인이 앉아 있고, 그녀의 주위로 열두 명의 중년 여인이 가슴에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통기(通氣)!”

 

한가운데 앉아 있던 두 여인 중 나이 든 노파, 한령파파가 외치쳤다. 

 

순간, 십이정한녀가 가슴에 모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열두 줄기의 기운이 젊은 여인 소영령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십이경루 골고루 스며든 기운은 한 시진 만에 단전에 뭉치더니 서서히 소영령의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길고도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흡기(吸氣)!”

 

“탄기(彈氣)!”

 

“합기(合氣)!”

 

한령파파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옥대의 소영령과 십이정한녀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신의 주어진 임무에만 몰입했다.

 

한을 푸는 일이었다. 무려 삼백 년간 쌓인 한을.

 

그 일을 위해서라면 열 개의 목숨이라 한들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을 무렵,

 

소영령의 옷이 가루가 되어 스러지며 옥빛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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