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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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31화
31화
영허 진인은 자세한 상황을 알기 위해 급히 한탄곡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한탄곡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이 계곡 저 아래로 사라진 뒤였다.
그곳까지는 이백여 장의 거리. 가봐야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영허 진인은 급히 아래쪽으로 발을 떼었다.
구름 위를 걷는 듯싶던 발걸음이 바람처럼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영허 진인은 마치 허공을 밟듯 나아가며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전설의 능공허도가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서 펼쳐진 것이다.
떨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영허 진인만이 아니었다.
오백여 장 위쪽에 앉아 있던 허리가 굽은 노파도 그 모습을 보고 주름진 눈을 치켜떴다.
노파는 원래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십여 평의 암반 위에 홀로 솟은 소나무 아래서 그를 기다린 지 이틀. 오라는 사람은 오지 않고, 누군가가 건너편 저 아래쪽에서 싸움이 벌이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기만 했다.
처음에는 협곡을 넘어가서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기다리던 사람이 지나갈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죽일 놈들, 운 좋은 줄 알아라.’
노파가 그렇게 짜증을 내며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아래쪽 협곡 위에 몇 사람이 나타나더니, 그들 중 백의를 입은 놈이 손에 들었던 사람을 협곡에다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저런, 나쁜 놈!”
노파는 그걸 보면서도 욕만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곧바로 한 사람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언뜻 들리는 목소리로는 이름을 부른 듯했다.
‘응? 령매?’
처음에 떨어진 사람이 여인이라는 말이다. 백의를 입은 놈이 여인을 협곡에 고의로 떨어뜨렸다는 뜻이다.
그녀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번뜩였다.
“찢어죽일 놈!”
그녀는 급히 협곡 쪽으로 다가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까마득한 저 아래쪽에 두 사람이 엉킨 채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칼로 절벽을 찍으며 필사적으로 속도를 늦추던 자가 여인을 옆으로 던졌다.
노파는 흠칫하며 손에 쥔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그 직후, 던져진 여인이 단애에서 튀어나온 곳에 떨어지는 게 보였다.
“휴우!”
노파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여인을 그곳에 던진 자는 협곡의 물속으로 떨어져서 사라져 버렸다.
“그놈, 멍청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단한 놈이군.”
노파는 진정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있어 저런 용기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그때 협곡 위에서 누군가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협곡 위에 있던 자가 몸을 날려 사라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노파는 잠시 망설였다.
이곳을 떠나면 지난 삼십 년을 기다려 온 원수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이번에 만나지 못하면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일.
그런데 이상했다.
협곡 아래쪽에 있는 여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를 악물고 몸을 돌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삼십 년 전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라면…….’
노파는 근 일각 만에야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절뚝이며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걷는데도 노파의 몸은 순식간에 서 있던 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계곡 아래로 내려간 노파의 입에서 감격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 하늘이시여! 마침내 보내주셨군요!”
* * *
마음이 다급한 구포봉은 사람들과 함께 협곡을 따라 내려갔다.
협곡은 오십 리를 흘러 한수로 흘러들었다. 부상자는 남장으로 보내고, 사십여 명이 한수에서부터 협곡 쪽으로 거슬러 오르며 훑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두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 마침내 제천신궁의 무사들은 수색을 포기하고 신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결국 구포봉과 추격대 중 몸이 성한 사람만이 남아 이틀을 더 찾아보았다.
그러나 좌소천과 소영령의 작은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 시신을 발견한 자가 있는지 알아보기까지 했는데도, 두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고 완벽히 사라져 버렸다.
구포봉은 참담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내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3장 이제 시작일 뿐이다
1
송곳으로 온몸을 후빈다면 이러한 고통일까?
톱날로 몸을 긁는 고통이 이만 할까?
아득한 정신조차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깨어나려고 한다.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고통이라도 덜 느낄 텐데.
―바보 같은 놈! 그따위 나약한 정신으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네놈은 어머니와 백부의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란 말이냐!
‘아냐! 아니야! 나는 포기하지 않아!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럼 뭐 하느냐! 정신을 차리고 몸을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일어설 거야! 일어서서 복수할 거야!’
부들부들 몸이 떨린다.
떨리는 만큼 고통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치달린다.
“으으으으…….”
문득 아스라한 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흘흘, 이제 깨어나나 보군.”
하지만 그도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더니 모든 의식이 끊어졌다.
누가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다.
누굴까? 여기는 어딜까?
내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령매를 따라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가까스로 속도를 낮추고 령매를 단애의 한곳에 던졌다.
툭 튀어나온 곳에 안착된 그녀가 얼핏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
‘그래, 곧바로 물에 빠졌지.’
그때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온다.
어떻게 된 걸까? 얼마나 다친 걸까?
“허어, 나이도 어리거늘 생각보다 단단한 놈이로고. 그런데 이런 껍질을 왜 쓰고 있었을꼬?”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 같다.
누군데 자신이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이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구한 사람인가?
“정신이 들거든 천천히 눈을 떠보아라.”
눈을 뜨기 전에 눈물부터 나왔다.
살아 있다. 자신이 살아 있다!
그 사실에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왔다.
다행히 목소리의 주인은 서두르지 않고 좌소천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좌소천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빛이 스며들더니 곧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보인 것은 기다란 대들보였다. 그리고 곧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늙었는지 셀 수 없이 많은 주름으로 얼굴이 가득 뒤덮인 노인이었다.
“내가 보이느냐?”
“으으…….”
‘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아직은 몸을 안정시켜야 할 때니까.”
대체 얼마나 지난 걸까? 령매는 괜찮을까?
그때 노인이 좌소천의 마음을 알았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라. 우선 한 가지만 말해주자면, 네가 이곳에 온 지 열흘이 지났다는 것이다.”
‘열흘……?’
“노도(老道)도 너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단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중에 물으마. 그럼 조금 더 쉬어라.”
좌소천이 억지로나마 앉을 수 있을 만큼 몸이 나아진 것은 사흘이 지나서였다.
예상보다 빠른 회복에 노도인 영허 진인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좌소천은 몸을 일으키자 운기를 해봤다.
하지만 일각도 되지 않아서 식은땀에 젖은 채 운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방으로 들어서던 영허 진인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무리다. 신(身)이 엉망인데 정(精)과 기(氣)가 제대로 움직이겠느냐?”
옳은 말이었다. 내공을 담을 그릇에 금이 갔는데 그 안에 억지로 뭘 담으려 해봐야 금만 더 갈 뿐이다.
좌소천이 다시 몸을 눕히자 영허 진인이 그의 맥문을 잡았다.
“그래, 몸은 좀 어떠냐?”
“감사합니다.”
좌소천이 뒤늦은 감사를 표했다. 비록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말조차 힘들었다.
“감사해할 것 없다. 네가 살 운명이기에 살아난 것이니까.”
“여기는… 어디……?”
“무당산의 구석진 곳이다. 흘흘흘. 녀석, 입이 열리니 궁금한 것도 많구나.”
영허 진인은 실실 웃으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더 누워 있어라. 겨우 맞춰놓은 뼈, 어긋나면 이 늙은이만 고생이다.”
열흘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걷는 것이 힘들었지만 좌소천은 부들부들 떨면서 걸음을 옮겼다.
근 일각을 걸어서야 열 걸음을 옮긴 좌소천은 방문을 앞으로 밀었다.
문이 열리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와락 가슴에 안겼다.
“아!”
절로 탄성이 터졌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저 멀리까지 온통 백색 천지였다.
순간 머릿속이 찡하니 울리며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어냈다.
“그 녀석, 이제 조금 나아졌다고 너무 무리를 하는구나.”
좌소천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미 얼굴에 딱 붙어 있던 인피면구는 노도인이 떼어낸 후였다.
얼굴에는 제법 많은 상처가 있었는데, 인피면구 덕분에 얼굴의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았다.
행여나 좌소천이 걱정할까 싶었는지 노도인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그리 큰 흉터는 남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좌소천은 얼굴의 상처를 걱정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은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세상을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흘흘흘. 매일 보던 세상, 며칠 안 봤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 있겠느냐?”
“그래도 하얗게 변했지 않습니까?”
“그래 봐야 겉만 변한 거지. 눈이 녹으면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그러면 또 그때마다 다른 옷을 입을 것이고 말이야. 결국 본질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본질을 보려 하지 않고 겉만 봐서 탈이란다. 쯔쯔쯔.”
노도인이 뭐라 해도 좌소천은 그저 좋았다.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들어가자. 네놈 멀쩡한 걸 보니 이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된 것 같구나.”
좌정하고 앉자마자 좌소천이 먼저 참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노도장님,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다. 그러잖아도 너를 구한 후 혹시나 해서 너와 함께 떨어진 사람이 내려오나 살펴보았지. 한데 아무도 떠내려 오지 않더구나.”
“령매는 제가 단애에서 튀어나온 곳으로 던졌사온데, 마지막으로 본 것이 령매가 무사히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더 이상하구나. 나중에 협곡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서 네가 말한 툭 튀어나온 곳을 보긴 했다만,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그곳에서 다시 떨어졌단 말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인께서 봤을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영허 진인이 주름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거기에서 한 가지 이상한 자국을 보긴 했다.”
“자국이요?”
“그래, 마치 지팡이로 쿡 찍은 것처럼 보이는 자국이었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절대 아니었어. 깊이는 두 치쯤 되어 보였는데, 절정 이상의 무공을 익힌 자가 아니면 남기기 힘든 자국이었다.”
그럼 령매 외에 누군가가 그곳에 내려왔다는 말?
좌소천의 눈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혹시 누군가가 령매를 구해갔을까요?”
“글쎄다. 정확히는 알 수가 없구나. 다만 노도의 생각으로는, 고절한 무공을 익힌 누군가가 그 아이를 구해가지 않았나 싶구나. 내가 너를 구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령매, 부디 건강하게만 살아 있어라. 내 언제고 찾아갈 것이니…….’
좌소천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자 영허 진인이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 네 얘기 좀 해보아라. 왜 그리 무모하게 행동했던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