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83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83화
순간적으로 장천운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노회현 장로의 방을 담당했던 하인이 왜 자신을 만나려고 할까?
자신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 저두심도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겠지.
“지금 어디 있지?”
“북문 옆 하인들의 거처.”
선복이란 하인은 이제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되는 소년이었다.
얼굴도 하인답지 않게 준수했고, 눈썹과 콧날, 입술, 턱 등 이목구비의 선이 가늘어서 여장을 시키면 미녀 소리를 들을 듯했다.
어둠이 밀려들어서 사위가 새카맣게 물든 시각.
장천운이 찾아갔을 때 선복은 백삼과 함께 있었는데, 잔뜩 긴장해서 안색이 창백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나를 만나자고 했다면서?”
장천운이 먼저 운을 뗐다.
선복은 대답하기 전에 힐끗 백삼을 보았다.
슬쩍 고개를 끄덕인 백삼이 선복을 대신해서 말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 조장님을 믿기로 하고 선복이를 설득했습니다.”
장천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백삼이 말을 이었다.
“선복이는 노 장로님의 방을 삼 년 동안 담당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노 장로님도 선복이를 친손자처럼 아꼈습니다. 그런데 노 장로님께서 사라지기 한 달 전쯤 뭔가를 선복이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백삼이 선복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복이가 머뭇거리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얇고 넓은 그 물건은 기름종이로 만든 봉투였다.
“장로 어른께서 이걸 저에게 주셨어요.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구천성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라고 했어요. 그래서 소성주님께 드리려고 했는데, 소성주님을 만날 기회가 나지 않았어요.”
봉투를 내미는 선복이의 손이 잘게 떨렸다.
장천운은 손을 내밀어서 봉투를 받았다.
“그 외에 다른 말씀은 없었느냐?”
“만약 믿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면 불에 태워서 없애라고 하셨어요. 애꿎은 목숨만 잃을지 모른다면서요.”
“그런데 왜 나에게 줄 생각을 했지? 아무리 백 형이 설득했다 해도 잘못하면 네가 죽을지 모르는데.”
“백삼 형은 제 친형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런 백삼 형의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게 해주신 분이라면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령주님께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선복이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두려움이 느껴지는 목소리.
장천운은 뒷말을 듣고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대령주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어서 주었다?
그 말속에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이 봉투의 내용이 대령주와 관련되었다는 것.
장천운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하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실망시키지 않으마.”
그러고는 봉투의 봉인을 뜯고 안에 든 것을 꺼냈다.
봉투 안에는 서신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서신을 편 장천운은 천천히 읽어보았다.
한 장을 다 읽을 즈음,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옆에 있던 백삼과 선복이 오들오들 떨 정도로 차디찬 미소였다.
‘소성주께 좋은 선물이 되겠군.’
서신 앞장에는 한 가지 작전 계획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뒷장에는 사건을 계획한 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고위간부 이름만 십여 명이나.
그래서 문제였다.
만약 서찰에 적힌 내용이 알려진다면, 사실여부를 떠나 당장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양패구상.
그리고 구천성의 몰락.
범인을 밝히는 것은 좋지만, 그 뒤에 너무나도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라. 누구에게든 이 서신에 대해서 말하면 안 된다. 너는 나를 만난 적도 없고, 이 서신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다행히 선복은 똑똑한 소년이었다.
“예, 조장님. 저는 조장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 서신을 본적도 없습니다.”
* * *
선복을 만나고 자신의 거처로 가던 장천운은 흠칫하며 좌측을 바라보았다.
여인 서넛이 걸어가고 있었다.
구천성 내당 중 하나인 선화당의 여인들이었다.
선화당 여인들은 대부분 간부 부인이나 가족들의 시비를 겸하며 경호도 맡았다.
개중에는 연송하나 류화처럼 특별수련을 거쳐서 일류고수가 된 여인도 상당수였다.
장천운이 바라보는 여인들도 무공이 제법 강해 보였는데, 그 중 한 여인을 바라보는 장천운의 입매가 살짝 비틀어졌다.
‘훗, 네가 여기에 들어와 있었구나.’
모용예였다.
그러잖아도 기회가 되면 찾아보려고 했던 터였다.
그녀 역시 천외와 관련이 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아직 약속을 다 지키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 운이 좋군.’
“왜 그래?”
옆에서 저두심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다가 장천운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누구 마음에 드는 여자 있어?”
“아니, 그만 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혼내주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웃으면서 자신에게 독을 먹인 여자.
‘오늘은 내가 바쁘니, 나중에 보자, 모용예.’
* * *
사마경은 황천현의 객잔에서 휴식을 취했다.
회하(淮河)가 황천현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렀다.
어차피 대규모 인원이 강을 건너려면 아침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미적거리며 늦게까지 남아 있던 용화성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서찰 하나가 점소이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서찰을 펼쳐본 사마경의 눈에서 서리가 쏟아졌다.
그들이 보낸 서찰이었다. 선친의 시신을 가져간 자들.
[네 아비는 이상 없이 잘 있다. 앞으로 세 가지 요구만 들어준다면 네 아비를 넘겨주겠다. 또한 천외를 상대할 때도 도움을 주겠다.
첫째, 우리를 억지로 찾으려 하지 마라.
둘째, 천외의 무리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적으로 대하지 마라.
마지막 세 번째 요구는 차후에 하겠다. 불가능한 부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우린 파천회가 아니다. 공연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너에게도 좋을 것이다.
받아들이겠다면 서찰을 태워버리고, 객잔의 지붕에 하얀 천을 매달아라.]
서찰의 내용은 간결하고 건조한 문구로 적혀 있었다.
문구만으로 봐서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의외인 점은 그들이 파천회를 부인했다는 것이다.
정말 파천회가 아닐까?
그럼 은천궁 앞에서의 싸움에 파천회가 나선 이유는 뭘까?
다행인 점도 있었다.
그 동안 짐작만 했었는데, 그들 역시 천외와 적임이 분명한 듯했다.
‘도대체 누구지?’
누군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 잘 아는 걸까? 천외와는 무슨 관계일까?
그때만 해도 그녀는 ‘시신’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등잔불에 서찰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불이 붙은 서찰을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구양 대협.”
“예, 소성주.”
“하얀 천을 구해서 지붕 위에 걸어 놓으라 하세요.”
110장 싸움개
미시 무렵.
둥! 둥! 둥! 둥……!
고루에서 북이 빠르게 울렸다.
“소성주께서 돌아오신다아아아아!”
정문 쪽에서 위사가 안쪽을 향해 외쳤다.
이천이 넘는 무사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구천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패왕거가 그 선두에서 달렸다.
마침내 사마경과 구천성 본진이 도착한 것이다.
공손백은 대연무장에서 사마경을 맞이했다.
대연무장에 도열해 있던 구천성 무사들 사이에 또 다른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전쟁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전쟁이 내부에서 벌어질지 모른다.
그럴 경우 자신들은 과연 누구의 편에 서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령주와 대장로의 힘이 월등히 강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더욱 약해질 거라 짐작했던 사마경의 세가 오히려 더 강해진 것이다.
패왕거가 멈추고 사마경이 내리자, 공손백과 나극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소성주.”
“암습을 받았다 들었네. 다친 곳은 없는가?”
“저는 괜찮아요. 대령주와 대장로께서 적의 위세를 꺾으셨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
사마경은 담담히 답하면서 두 사람의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공손백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그의 말투에서 그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수고는 무슨! 그깟 것들이 감히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나보다 소성주가 고생이 많았네. 자칫해서 소성주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사람들이 어린 조카를 전쟁에 내보냈다고 나를 무척 욕했을 게야.”
“맞아요. 천행이었죠. 저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야 실망이 크겠지만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이 하늘에서 저를 보살펴주셨나 봐요.”
사마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서리라도 내린 듯 한기가 감돌았다.
“그만 들어가요.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도 쉬어야 할 테니까요. 회의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하겠어요.”
자신의 주장을 통보하듯 내뱉은 그녀는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홱 몸을 돌렸다.
공손백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사마경이 ‘실망’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영락없는 비웃음이었다.
‘오냐, 지금은 마음껏 비웃어라. 숨을 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장천운은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 동안 힘을 키웠음에도 공손백과 나극을 정면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할의 확률이 사 할 가까이까지 올라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공손백과 나극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간극이 생겼다.
거기다 금룡을 끌어들였고, 암천의 한쪽이 공손백을 견제하게끔 해놓았다.
오 할.
승산이 반까지만 올라가면 공손백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언제, 어느 때,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에게 흑월회가 있듯이 공손백과 나극에게는 자신이 아직 파악 못한 세력이 있을 테니까.
천천히 몸을 돌리는 장천운이 다물고 있는 턱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눈에서는 무심한 광채가 번뜩였다.
‘중요한 것은…… 천외의 주인들이야. 그들을 막지 못하면 승률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어.’
어쩌면 공손백이 날뛰지 못하는 것도 그들 때문인지 모른다.
‘독고광 노인에게 한소리 듣고도 참은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
어이없게도 가장 큰 적인 천외가 소성주를 도와준 셈이었다.
‘하지만 소성주가 돌아온 이상 상황이 달라질 거다. 공손백도, 천외도 더 이상 기다리려 하지 않을 테니까.’
* * *
사마경은 거처를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몇 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 동안 별 일은 없었나요?”
담담한 그녀의 말에 영호관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청소를 하는 시비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마경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장천운이 이 방에 들어왔다는 걸. 그뿐 아니라 비고까지 들어갔다는 걸.
책장의 책 한 권이 거꾸로 꽂혀 있었다.
장천운이 교묘하게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다. 그녀만 알 수 있도록.
‘뭘 알아냈을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 * *
저녁식사와 함께 진행된 회의는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안휘는 물론이고 무림맹과의 전쟁에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황. 어차피 완벽한 승리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기에 누구도 성과나 흠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고 떠들면서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형체 없는 독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살얼음 낀 긴장감은 얼마나 팽팽한지 말실수 한 마디에도 툭 끊어질 정도로 간당간당했다.
여차하면, 음식을 뒤적이던 젓가락이 암기가 되어서 날아들지도 모른다.
접시야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생선가시도 훌륭한 암기가 될 수 있다.
아니, 술을 마치는 척 하다가 공력을 실어서 뿜어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적이라면 멀리 떨어져 있기나 하지…….
사람들은 왁자지껄한 살기 속에서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