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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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74화
탁자 위에는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놈이 들고 있는 망치에서도 뭉개진 살점이 덜렁거렸다.
이번에는 시체의 피와 살점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가락을 짓이겨서 생긴 피와 살점이었다.
텅!
망치를 탁자 위에 던져 놓은 놈이 말했다.
“장로께 몇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약속대로 내보내 드릴 거니까. 뭐…… 손가락하고 발가락은 포기해야겠지만.”
개새끼! 미친 새끼! 악마 같은 새끼!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져서 천년만년 타죽을 새끼!
상두한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나름대로 그도 강호에서 경험 꽤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행동이 현명한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뭐, 뭘…… 알고 싶은가?”
* * *
전무궁은 장천운의 말을 듣고 눈빛을 번뜩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힘들 거라 생각했던 자백을 무사히 받아냈다. 결과도 생각보다 푸짐했다.
‘정말 대단한 놈이야.’
그는 아직 장천운이 어떤 식으로 고문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아마 알았다면 다른 식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지독한 놈!’ 또는 ‘살벌한 놈!’이라고.
어쨌든 지금은 결과가 나왔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밝혀진 천외 놈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저와 당주님뿐입니다. 저들은 아직 자신들이 밝혀졌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상두한과 나승관이 살해용의자로서 잡힌 것으로만 알 뿐이지요. 그러니 일단 놔두고 지켜보지요.”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생각하고 도망가 버리면?”
“저들은 당장 철수할 수도 없습니다. 철수하는 순간 다른 세력에게 밀린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여길 겁니다.”
“흐으으음.”
전무궁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고 보느냐?”
“최소한 저들의 움직임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했다.
적의 움직임을 미리 안다면 이길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맥을 끊을 수 있습니다.”
맥이 끊기면 그만큼 상대하기가 편해진다.
당장 몇 명 때려잡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좋다. 네 말대로 해보자.”
* * *
전무궁을 만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장천운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이 언제였더라?
전무궁의 방에서 자신의 거처까지 오는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마치 오래 전,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그때처럼.
최근 들어서 그러한 느낌을 거의 느끼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강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희미해진 것은 자신의 무위가 높아진 후였다.
무위가 높아질수록 느낌도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이리도 강한 느낌이 드는 걸까.
왜?
‘소성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냐?’
지금으로선 사마경 외에 그가 특별한 느낌을 느낄 만한 사람이 없다.
혹시 무창에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송하는 아니겠지?’
연송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기보에 가서 소성주만 만나고 연송하는 찾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생존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부상을 당했다고 했는데…….
자신이 죽은 줄 알고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나중에 만나면 한바탕 잔소리 좀 듣겠군.’
* * *
독고민은 창문을 통해서 방 안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같은 무복을 입고 있지만 여인임이 분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송하였으니까.
사람들은 연송하를 사마경이나 류화의 아래로 생각한다. 여인으로 봤을 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 연송하는 사마경이나 류화보다 더 여인다운 여인이었다.
특히 음기가 무척 강했다.
깊이 내재되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뿐.
아마 그녀가 음기를 드러낸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서 오금이 저릴 것이다.
‘저 계집의 음기라면 내 마기를 한동안 잠재울 수 있을 거다.’
아직 마공이 완벽하지 않은 그는 일정한 간격으로 음기를 보충해야 했다.
순음을 지닌 여인일수록 더 효과적이었다.
천음의 여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현재 그가 본 여인 중 천음을 지닌 여인은 사마경과 두양양뿐.
하지만 그녀들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취하기는커녕 자신이 당할 공산이 컸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사람이 바로 연송하였다.
장천운이 죽고 없는 지금, 그녀는 들판에 풀린 어린 양이었다.
잡아먹기 딱 좋은 상태.
운도 그의 편인지, 마침 연송하의 옆방에 있던 무사들도 출동해서 소소한 잡음 정도는 신경 쓸 사람도 없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본 그는 연송하의 방을 향해서 태연하게 다가갔다.
잠시 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후후후후, 저런 계집을 놔두고 죽다니, 장천운이란 놈도 더럽게 복이 없군.’
내심 흡족해한 그는 연송하의 방이 가까워지자 슬쩍 방향을 틀었다.
“어머, 독고 공자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뒤쪽에서 코맹맹이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막 방향을 틀던 그는 발끝을 살짝 돌려서 원위치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연송하를 대신해서 사마경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진난이었다.
‘저 더러운 년이!’
독고민은 며칠 전 밤, 소진난과 백리우진이 놀아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우연히 보긴 했지만, 당시 진성전 구석에서 바지를 내리고 뒹구는 모습이 가관도 아니었다.
“아버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오.”
“독고 단주께서 계시는 방은 저쪽인데요.”
“나도 아오. 저쪽에 있는 진성전 앞의 정원이 보기 좋아서 그쪽으로 돌아가려던 중이오.”
“어머, 그러셨군요.”
소진난이 눈웃음을 쳤다.
독고민의 생김새는 백리우진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겼다.
게다가 경천단주의 외아들 아닌가.
천혼전주 백리호의 조카인 백리우진과는 격이 달랐다.
그 동안의 소문이 흠이긴 하지만, 그 정도 흠은 독고민 같은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상한 걸 요구하는, 변태 같은 백리우진보다는 나을 듯했다.
“저도 그 정원을 좋아하는데, 마침 잘 됐네요. 제가 말동무가 되어드릴 게요.”
‘이 찢어죽일 년이.’
독고민은 왈칵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무작정 거부하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구려.”
생긋 웃은 소진난이 엉덩이를 씰룩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가요, 공자.”
문득 그녀를 바라보던 독고민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이 계집의 음기도 상당히 강한 것 같군. 탁한 게 흠이긴 하지만.’
그의 속도 모르고, 소진난이 눈웃음치며 물었다.
“독고 공자, 혹시…… 좋아하는 여인 있나요?”
“없소.”
이전의 독고민은 있었다. 미친 듯이 좋아해서 상사병까지 걸렸었다.
멍청한 새끼.
하지만 지금의 독고민은 다르다.
여자는 그저 자신의 마공에 필요한 음기가 담긴 그릇일 뿐이다.
“듣기로는 소성주님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때의 치기어린 감정이었을 뿐이오. 나는 그렇다 치고, 소 낭자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것 같소만.”
“어머! 호호호호, 없어요. 나이만 먹었지, 아직 남자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답니다.”
‘죽일 년.’
하여간 계집의 말은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
아니, 계집을 욕할 게 아니다. 그 말에 속는 남자들이 멍청한 것이지.
* * *
장천운은 일각 정도 뛰던 가슴이 진정되고 머릿속이 맑아지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다행히 별 일은 아닌가 보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가자미눈으로 훔쳐보던 단승이 물었다.
“별 일 아니야. 그보다, 사공신이랑 흑월대 사람들은 어딜 갔지?”
양가쌍호 중 양산이 대답했다.
“잠깐 흑월대에 다녀온다고 나갔소.”
출정 후 오랫동안 비워둔 거처를 살펴보러 간 듯했다.
‘그러고 보면 흑월대원들과 투닥거릴 때가 그나마 즐거운 시절이었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침상으로 가려던 장천운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단승, 하나 물어봐도 되겠어?”
“뭔데?”
“만약에 말이야. 절대경지에 올라선 고수조차 십초를 버티기 힘든 고수가 있다면 어떻게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친…….”
단승은 차마 ‘놈’자는 뱉어내지 못하고 째려보았다.
하긴 누가 들어도 미쳤다고 하겠지.
양가쌍호와 마공추 등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잖아?
사실을 설명해봐야 제정신 아닌 사람으로 취급할 터. 장천운도 대충 장난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잖아.”
“만나면 도망가야지.”
“도망갈 길도 없다면? 아니, 가족이 그자에게 죽기 직전이라면?”
그제야 단승이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한마디 했다.
“그자도 사람이면 약점이 있겠지. 비겁해도 별 수 있어? 약점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약점도 없다면?”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절대고수를 장난처럼 데리고 놀 실력에 약점도 없으면, 그게 어디 인간이야? 신이지?”
“정말 신이라면 상대할 방법이 있을까?”
“신을 상대할 방법이 어디 있…….”
비웃듯이 다그치던 단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더니 스스로 흥이 인 듯했다.
“그게 말이야, 옛날이야기 보면 신도 배신을 당해서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결국 신이라 해도 배신을 당하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배신이라…….”
“진짜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지만, 신과 싸워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흐음, 그럴 듯한 이야기이긴 한데, 좀 치사한 방법이네.”
그때 침상에 앉아서 듣고만 있던 진명산이 넌지시 말했다.
“에…… 사람들이 신을 배신하는 건 결국 불신과 욕망 때문이오. 신을 따르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준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릴 거요.”
정당한 방법이라곤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며 야비한 수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창 뒷골목 출신인 장천운은 그 말에 이채 띤 눈빛을 반짝였다.
‘나쁘지 않은데?’
최소한 신에게서 사람들을 떼어놓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 * *
서쪽으로 기울어진 태양이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춘 지 한 시진은 지난 듯했다.
태양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을 때 장원을 탈출했으니 한 시진째 쉬지 않고 도주한 셈이었다.
장산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깊디깊은 계곡을 전진하던 중 폭포가 나오자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폭포 가에는 부드러운 풀로 뒤덮인 평평한 풀밭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돌아선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천, 노야를 그곳에 내려놓아라.”
그의 앞에는 검은 가죽가면을 쓴 소천이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서 있었다.
걸레쪽처럼 찢겨져 옷 사이로 피부가 갈라진 곳이 보였다.
심지어 어깨 쪽은 하얀 뼈마저 드러났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가슴을 적시고 다리를 타고 흘러서 발밑에 고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무 노인이 끌어안고 있었다.
소천은 장산의 말이 떨어진 후에야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무 노인을 풀밭에 내려놓았다.
무 노인의 몸도 핏빛 혈의를 입은 사람처럼 붉었다.
왼팔은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피부는 회칠을 한 것처럼 창백했다.
나무를 꺾어 온 장산은 무 노인의 부러진 팔을 펴고 나무와 함께 묶었다.
그러고는 무 노인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했다.
외상보다 내상이 더 문제였다. 그나마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천행이었다.
‘절대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