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7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78화
178화. 첫 목적지
푸른 산천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물.
여름의 초입에 다다른 숲의 풍경은 싱그러운 느낌이 자욱했다.
그러나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손으로 닦는 사내의 얼굴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이 찌푸려졌다.
"……곧 장마가 시작되려나?"
시간상으로는 닷새 정도는 남은 듯하지만, 아무튼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큰 도시에 들어가 자리 잡는 게 좋을 것이다.
천강은 꾸불꾸불 난 길을 한가로이 걸으며, 중원에서 해야 할 일들을 가만 정리해 보았다.
'일단 신선환을 만드는 그 제작소의 소재지를 파악, 파괴해 달라고 했지.'
덩달아 그 관련자들을 전부 제거해 달라고도 했다.
자칫 그것이 파다하게 번져 궁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게 묵현의 생각이었다.
- 인간의 마음은 간사해. 절대 그들은 무림 하나로 끝나지 않을 거야. 명심해. 이건 중원 모두를 위한 길이야.
'……중원 모두를 위한 길이라.'
그저 빨리 끝내고 간만에 낚시나 할까 생각이 들 뿐이다.
이 시기에 바다에선 어떤 물고기가 잘 잡히려나 잠깐 잡생각 하던 천강은 고개를 좌우로 홱홱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다시 집중했다.
신선환 제작소 파괴와 더불어 천강이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이거였다.
- 표면적으로는 정사파의 배신자 무리가 여울나무의 꾐에 넘어간 거로 보이지만, 실상 그 모든 걸 총괄하는 건 태감(太監)이야.
- 천강, 넌 각 문파와 세가를 돌아다니며 그 잔재의 뿌리를 모조리 뽑아야 해. 지금 그들은 마교와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 있어. 거의 집을 뺏기기 직전이지.
"차라리 치고받는 싸움이 나은데 말이야."
배신자를 색출하고 그런 건 이제 지긋지긋한 천강이었다.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정치와는 잘 안 맞는지도 몰랐다.
천강이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일단 가까운 곤륜부터 가볼까."
***
풍미관은 굉장히 넓은 땅이다. 괜히 천산의 창고라 불리는 게 아닐 정도로.
신교의 마을보다도 더 바깥에까지 펼쳐진 이곳은 크게 자란 작물로 그득했다. 천강은 밭을 지나 총책임자 사무실로 향했다.
문득 가는 길에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흑살마신님."
"음? 아, 흑도마황의 식구였던가."
"예. 무견입니다."
두 손을 들어 공손히 예를 갖추는 남자. 그는 막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지, 어깨에 흙 묻은 농기구를 지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중원으로 나가신다고요."
"한가하게 밭매는 줄 알았는데 소식이 꽤 빠르네?"
"손님이 와 있어서 눈치껏 알아들었습니다."
손님?
무견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강이 그걸 받아 그 안을 살폈다.
돈이었다. 꽤 묵직한 양.
"야, 됐다. 가져가."
"받아주시지요. 어찌 됐든 저희 주군의 복수를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너희들 복수 이뤄주려고 그런 거 아니거든?"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감사한 건 감사한 일입니다. 받아주시지요. 이곳에서 지내는 저희들에겐 더는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극구 권하기에 천강은 마지못해 챙겼다.
이 정도 돈이라면 다가오는 장마 기간 동안 편안히 지내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고맙다."
"그럼 편안한 여행길이 되시기를!"
무견이 예를 갖추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사라진다.
'하. 완전 촌사람 다 됐구만.'
그럼 어디 보자. 대체 어떤 손님이 날 기다리고 있으려나.
풍미관 중심부에 자리한 총책임자 사무실로 들어섰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추밀과 한 사내가 마주 앉아 차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강으로서는 꽤 반가운 얼굴. 얼굴에 상처가 자욱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간만입니다, 흑철마괴."
"그렇군. 그동안 잘 지냈나?"
"제가 뭐 못 지낼 일이 있을까요. 맞다.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과거 관군이 암운곡을 습격할 걸 미리 알게 된 천강은 흑사대를 소환했다.
그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교의 모든 걸 다스리는 교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 좀 도와주시죠.
- 다들 움직일 생각이 없더군. 관조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 이번에는 움직이라 하십시오. 신교의 존망이 걸린 일인데.
- 그저 주인이 바뀌는 것이라 생각하더군.
당시 그들의 관조적 입장이 짜증이 난 천강은 홧김에 한마디 했었다.
- 이번에 참여 안 하면 흑사대를 해체 시킬 거니 그리 알라 하십시오.
- 꼭꼭 숨어다니는 그들을 어찌 찾으려고 그러는가?
- 뭐 찾을 필요가 있나. 그냥 예산을 끊으면 굶기 싫어서 다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리 엄포를 놓았더니 알아서 암운곡에 진입한 관군들을 쓸어버린 흑사대였다.
그들은 그거로 멈추지 않고 이후 사백 동굴로 쳐들어가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관군을 모조리 소탕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린 흑철마괴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입니까?"
"내 자네에게 차나 술을 대접하겠다 약조하지 않았나?"
"그 약속을 지키러 오신 겁니까?"
"무인에게 약속은 생명과도 같은 것. 그것을 솔선수범 지켜온 흑살마신에겐 더더욱 지켜야겠지."
자리에 앉자 차를 바로 내어준다. 마치 이 시간 천강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지체 없이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기분 좋은 향에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 그럼 이곳에 온 본 목적을 말씀하시지요."
"아직 말은 안 놓을 생각인가?"
"별로 경어에 구애받는 성격은 아닌지라. 한 번 입에 붙으면 그대로 쭉 사용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멋대로인 게 마교인답군."
한 차례 작게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다. 이번에 자네에게 배신자 명단을 주기 위해 들렀다. 아마 첫 목적지는 곤륜이겠지?"
흑철마괴가 서신 하나를 건네주었다.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중원 쪽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맡은 천강에게 각 마교 지부에서 그 명단을 건네주기로 했던 것이다.
'주태와 내가 작성한 명단이 그대로 적혀 있겠지.'
과거 천강은 여울나무 총책임자 사무실에서 그 관련 정보를 깡그리 긁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 우연히 행했던 그 일이 지금에 와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흑사대에서 이런 일도 합니까?"
"신원을 숨기고 정말 다양한 일들을 하더군. 이번 일은 내가 지원해서 맡은 것이다."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
참으로 어떤 면에서는 철저한 인간이라니깐.
물론, 좋은 사람이란 뜻이다.
차를 다 비운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 없는 동안 마교를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라. 지금의 마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니."
그럴 것이다. 내부의 적만 없어도 태산이 흔들리는 일은 절대 없다.
"아, 맞다. 그리고 이걸 전해준다는 게 깜빡했군."
흑철마괴가 천강의 손에 주머니 하나를 쥐여 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사신들 기억하나? 교주님께서 놈들을 처리하셨을 때 그놈들을 싹 다 모아 불태운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것이다."
주머니를 열자 밤하늘보다도 더욱 어두운, 검은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흑사 녀석의 독에 당한 녀석에게서도 나왔었지.
"사신들을 만든 자로 추정되는 흑귀가 중원으로 도망을 쳤다더군.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간직해 두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왠지 놈들을 중원에서 자주 마주칠 것 같은 직감을 지울 수가 없는 천강이었다.
그렇게 추밀과 흑철마괴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천강은 발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수많은 산이 겹겹이 자리한 곤륜으로 향하였다.
***
"으아아아아!"
신교의 높다란 봉우리로 쩌렁쩌렁한 비명이 울렸다.
그 비명의 근원지는 신녀였다.
'아니, 이 새끼는 왜 나랑 자꾸 길이 엇갈리냐고오오!'
동생에게 흑살마신의 이야기를 듣고 급히 돌아오던 길, 우연히 광존을 만난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석의 행색을 보니 흑살마신에게 아주 탈탈 털려 도망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흑살마신.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그로 인해 희열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아비의 일을 떠올린 그녀는 놓아주려던 광존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사흘간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아마 놈은 그 사흘이 삼 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어차피 소문대로라면 두 세력이 붙을 터.'
싸움이 끝나면 재정비하느라 어디 안 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여유를 부렸는데, 그때의 자신을 또 후회하고 후회하는 그녀였다.
'젠장.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하나?'
아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괜히 또 엇갈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중원에 임무를 위해 나간 흑살마신이 언제 돌아올지는 말 그대로 미지수.
"신녀님.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응. 잠깐만. 나 지금 바빠."
"저어…… 교주님께서 시키신 일인데요."
"지금 그깟 새끼가 시킨 일이 중요해? 난 내 일이 제일 중요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신녀의 수행원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결국 설득하는 일은 막내 소선에게 주어졌다.
소선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신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신녀님. 어서요. 일 잘 끝나면 제가 저번처럼 귀 만져 드릴게요."
"……얼마나?"
"바, 반 시진?"
"한 시진."
한 시진으로 합의를 본 그들은 서둘러 천수향을 꽃단장시키고 밖으로 나갔다.
늘 그렇듯 교주가 새로운 직책을 맡을 자들을 임명하고 나면, 신녀는 그들이 파송 받기 전 축복을 하는 게 관례였다.
반쯤 하품하며 축복을 내려준 천수향은 짐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소선아. 근데 쟤들은 무슨 직책을 맡은 거야? 아직 한참 어린데."
"아. 중원에 정찰 임무로 새로 편성된 이들이래요. 시기가 시기라 사람이 부족하니, 암운곡 졸업을 2년 앞당겨서 차출한 인력이래요."
"그래?"
확실히 이번 일로 타격이 크긴 한가 보구나.
지학(志學)에도 못 이른 어린애들을 데려다 쓰다니. 쯧쯧.
혀를 작게 차며 자리를 뜨는 천수향. 그때 그녀의 귀가 한 차례 쫑긋했다.
"천강은 어디쯤 가고 있으려나."
천강? 발을 옮기던 천수향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신녀님?"
천강. 처음엔 이름만 같은 줄 알았으나, 자초지종을 모두 전해 들은 그녀는 암운곡 아이들이 말하는 그 천강이 그녀가 찾는 그 흑살마신임을 알았다.
천수향의 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져 아이들의 대화에 완전히 기울인 상태가 되었다.
"글쎄. 출발한 지 이틀 정도 됐으니 지금쯤이면 청해를 지나고 있지 않을까?"
"어디를 가든 마교 지부를 들르게 되어 있어. 수소문하면 다 나오니,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응. 아줌마만 믿을게."
"너 이 쪼그마한 게!"
거처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의 대화를 들은 천수향의 발은 꽤 가벼웠다.
수행원들은 곧바로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온수를 준비하고, 막내는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신녀님! 목욕하실 물 준비 끝났대요. 이제 나오세요!"
"씻고 나오시면 제가 바로 귀를 시원하게 파드릴게요."
"신녀님?"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본 소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는 좌우 사방을 살피는 그녀. 이내 침대 위 서신을 본 그녀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언니! 선배님!"
『 나 잠깐 중원에 바람 좀 쐬고 올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