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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17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176화

176화. 은원관계의 끝

 

 

 

하늘 위로 폭음이 인다.

연달아 일어난 강한 빛과 소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큭.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광존이 힘껏 검을 내려쳤다. 그러나 암존은 그걸 유유히 피해 그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물론 강기의 막을 상시 두르고 있는 광존에겐 의미 없는 일격이었지만, 광존으로서는 약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젠장젠장!'

쾌는 강으로 누를 수 있다. 그것이 무공의 상성이다.

상대는 분명히 쾌. 강의 힘을 가진 자신은 분명 암존을 압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괴기나한과 암운사신에게 받은 단전의 타격. 이후 흑살마신에게 받은 근육과 뼈의 손상.

그 내상들로 인해 그 상성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광존이었다.

대자연의 기를 순식간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특이체질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진즉에 암존에게 목을 내놓았어야 했다.

'이대로는 안 돼. 자칫 잘못하면 정말 위험하다.'

주위를 재빨리 탐색했다. 다행히도 아까까지 느껴지던 흑살마신의 기운이 더는 감지되지 않았다.

'이것은 기회……!'

광존이 하늘 위로 솟구친 뒤 천산 밖으로 전력으로 이동했다.

암존이 따라붙으며 일격을 먹이나, 내력을 갑주처럼 입고 있어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방어도를 가진 광존에겐 미약한 타격밖에 줄 수 없었다.

광존은 철저하게 목 위를 방어하며 도주를 지속했다. 그러자 더 쫓아본들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암존이 추격을 포기했다.

'상관없겠지.'

자신이 부탁받은 건 어디까지나 광존을 상대해달라는 것이었을 뿐, 그를 죽여 달라 의뢰한 건 아니었기에.

슬쩍 지상을 바라본즉, 천산의 불을 끄고 다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이것으로 빚은 갚았다, 흑살마신.'

암존의 신형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

 

'젠장. 그깟 음침한 새끼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천산의 서쪽 길. 암존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광존이 비틀거리며 중원으로 향하였다.

이번 의뢰를 선택한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데리고 온 부하들은 다 잃었고 명성은 철저하게 망가졌다. 그 와중에 흑살마신 앞에서 살아보겠다고 꼴불견의 행동까지 보였다.

"큭……."

일단은 돌아가자. 거처로 돌아가서 내상부터 회복한 뒤 그다음 생각하자.

그렇게 길을 따라 나아가던 중이었다. 저 반대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행인인가 하여 무시하려 했으나, 익숙한 기운에 그는 재빨리 막아둔 혈도를 개방했다.

"소용없어."

"커헉……."

순식간에 그의 옆에 나타나 발차기를 먹이는 적. 그의 신형은 그대로 길을 벗어나, 숲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런 그가 흙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앞으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순백의 피부.

금실과 같은 머리칼.

호숫가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

천수향이 입가에 활짝 미소 지었다.

"미치광이, 간만이네? 근데 너 꼴이 왜 이래?"

"그, 그런 게 있다. 네년은 몰라도 된다."

"그래?"

광존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곧 그는 바닥에 그대로 넙죽 엎드려야만 했다.

천수향이 발로 힘껏 그의 등을 내리찍은 탓이다.

'이런 개잡년이……!'

그러나 광존은 차마 자신의 상황이 여의찮아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천수향을 매섭게 노려보며 따졌다.

"무슨 짓이냐?"

"아니, 전부터 영 마음에 안 들더라고. 내가 너보다 그래도 족히 10년은 더 오래 살았는데 따박따박 네년 네년 거리고 말이야."

"……앞으로는 주의하지."

그러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도로 후려친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했는지, 광존의 얼굴과 몸이 땅속에 그대로 처박혔다.

"존칭도 달아야지? 응?"

부들부들 몸을 떠는 광존.

그러나 당장은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살고 봐야 복수든 뭐든 기약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입술로 힘겹게 그녀가 원하는 걸 말해주었다.

"아, 알겠습니다."

"후훗. 좋아."

"그럼 이만……."

그러나 그런 그를 음존이 다시 막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너 요새도 내 욕하고 다닌다며. 얼마 전 사천 지나갈 땐 저잣거리에서 그랬다던데. 내가 음존이란 칭호를 가랑이 벌려 얻은 거라고."

"그, 그건……."

광존의 시선이 천수향과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은 분명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섬뜩한 살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저를 모함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벌인 음해입니다!"

"정말로?"

"예!"

평소 음존이 없는 곳에서 온갖 거짓으로 깎아내리던 광존이다.

잡아떼는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현 위기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러나 천수향의 미소는 더욱 싸늘해졌다.

"영독. 가져갔더라?"

영독은 당가에서 만든 특수한 영약이다.

섭취 시 만독불침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주나, 하나를 만드는데 무려 5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리는 만큼 보통은 가주가 되는 이에게 먹이곤 했다.

"계속 날 깎아내리면 덩달아 가문의 위신이 실추되니, 전대 가주 성격상 그걸 가만 지켜보진 않았을 테고. 못난 딸년이라도 가문 망신시키는 꼴 되지 않게 어떻게든 막으려 했겠지."

정확했다. 그걸 노리고 계속 없는 사실을 날조해 음존의 거짓된 소문을 양산해 낸 광존이었다.

그걸로 싸움 구실을 만들었고, 내기 조건으로 영독을 요구했다.

"'내 몸에 잔 상처 하나라도 낸다면,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안 하겠다'라는 어린애도 속지 않을 거짓말에 속았을 건 안 봐도 뻔하지만."

"그, 그걸 어떻게?"

"나도 세상 험하게 구른 년이야. 뒤통수 거하게 까이고, 차인 건 다반사. 배신도 숱하게 겪어봤지."

그렇게 쌓아 올린 무림 경력 50년이다.

웬만한 무림의 늙은이들보다 더러운 짓거리를 더 많이 겪어봤다고 확신하는 천수향이었다.

"날 농락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하. 쉽게 당할 성싶으냐!"

광존이 내력을 발산했다. 천수향의 몸이 순간적으로 튕겨 나가고, 몸을 일으킨 그가 이를 바득 물었다.

"내 몸이 이 꼴이 되었어도,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네년 또한 성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코웃음을 치는 여인.

"풉. 남자의 허세는…… 침대 위에서만큼이나 죽기 직전에도 변함이 없구나."

"놈!"

광존이 천수향에게 달려들었다. 능히 산을 부술 일격이 광존의 검 끝에 실렸다.

땅에 후려치고 곧바로 산산조각이 나 붕괴하는 지반. 그러나 순간적으로 음존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광존의 옆에 나타났다.

"강으로는 유를 이길 수 없는 법이지."

"네년……!"

훙. 광존의 검이 주위를 한 바퀴 훑었다. 그에 따라 사방으로 맹렬한 강풍이 일었다.

그러나 천수향의 신형은 물 흐르듯 움직여 그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광존의 목에 꽂는 여인. 그 행위를 마친 그녀는 광존의 검을 피해 20보 밖으로 벗어났다.

'침?'

자신의 목에 박혀 있는 것이 침인 걸 보고는 그가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핫. 기껏 일격을 먹인다는 게 독이냐? 기회를 잡았으면 응당 목을 꺾어놓았어야지!"

광존이 투기를 일으켰다. 음존이 생각보다 잽싸지만 별것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이번 싸움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조금 전 내 목을 비틀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네 아비의 영약을 먹고 만독불침에 다다른 난 이제 그 어떤 독도……."

말을 하던 광존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몸의 감각이 굉장히 예민해진다. 마치 살아 숨 쉬는 것마냥.

"이, 이게 대체……. 어째서 독이……?"

"이봐. 미치광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천수향이 그에게 한발 한발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숨을 쉬고 입을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그 입도 점차 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거 보통 독이 아냐. 무려 내가 55년을 준비해서 만든 거다. 오로지 한 남자를 죽이기 위해."

"으, 음존. 제발 살려줘. 원하는 건 뭐든 주겠다.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 그러니 제발……."

"그래?"

흠. 입술에 검지를 대고는 가만 고민에 잠긴 여인.

"시키는 건 다한단 말이지?"

"그, 그래!"

"그럼 네 오른손으로."

"어. 오른손으로."

"네 목을 뽑아서 줘."

"……뭐?"

광존의 표정을 본 천수향이 환히 미소 지었다.

"후훗. 난 네 모가지를 원해."

"이, 이런 씨발년이……!"

콰드득.

"끄아아악!"

"날 농락한 대가는 커. 쉽게 죽이진 않을 거야. 살려달라 살려달라 빌겠지. 그러나 오늘 밤은 네가 지금껏 살아온 밤 중 가장 길 거야. 킥킥킥."

천수향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황폐해진 땅 위로 누군가의 소리 없는 비명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

 

천강이 화재를 진압하고 올라갔을 때, 천산 위로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불길이 위로 치솟으며 몇몇 독이 담긴 주머니가 불타버렸는지, 그 피해를 본 자들이 속출한 것이다.

물론, 교주 측 진영에는 그 피해자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측. 여울나무 숲 쪽 진영의 무려 8할이 그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심지어 정사파에서 의뢰를 위해 왔던 인원들 중에서도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승을 떠야 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일천귀검은 해코지하지 않고 중원으로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게 의문인 일귀가 천강에게 물었다.

"저리 보내주시면 이곳에서의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텐데요."

"그러라고 보낸 거야. 여기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그가 본 것은 치졸한 광존의 실체와 무림의 일에 관여한 관군들.

아마 도움이 꽤 될 것이리라.

"광존은 어디 있지?"

"암존과 함께 사라지고 그 뒤로는 소식이 없답니다."

"그래? 암운곡 아이들은?"

"다들 무사합니다. 죽은 아이는 없고, 다친 이가 둘 있는데 크지 않아 며칠 누워있으면 회복될 거랍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역시 훈련이 다다. 실전 같은 훈련.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빡세게 훈련시켜야지. 그리 마음을 먹는 천강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울나무 숲 생존자는 얼마나 되지?"

이번 어른들의 싸움에 아직 지학(志學)의 나이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들도 참여했다. 암운곡처럼 여울나무 숲도.

그곳의 생존자가 있다면 암운곡에 합류시킬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뭘 모르는 어린 나이기에, 단전 파괴까진 필요 없다는 생각에.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나 보다.

"한 명입니다."

"한 명?"

"예. 청청 외엔 모두 신선환 독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그렇군."

천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으로는 무진과 청청이 흙을 덮고 있었다.

명패(?)를 본즉, 투파창귀라 쓰여 있었다. 흥미롭게도 명패는 두 개가 놓인 채였다.

'투파창귀…….'

환생 후 만난 천강의 대적자. 결국 그도 신선환의 독에 의해 사망했다.

청청이 당도하기 직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일가친척을 모두 죽이고 가문을 멸문시킨 선조.

그녀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악인.

그러면서도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수해준 스승이자, 스승의 원수.

그 어떤 감정도 확실히 못 한 그 마음엔 아마 찜찜함만이 남지 않았을까 유추가 되었다.

천강은 가타부타 말을 하는 대신, 무덤 앞에 가볍게 예를 한 번 차리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내려가는데, 햇빛이 가리어진 나무 그늘 아래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선마희였다.

"어멋. 절 구해주신 영웅호걸님 아니세요?"

"상처는 괜찮습니까?"

"예. 바로 구해주셔서. 후훗. 말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

그럴 순 없지. 나보다 서너 배는 거뜬히 살아온 늙은 여우에게.

그렇다고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저 정도 되는 여고수에게 나이 운운하는 것은 은원관계를 쌓자는 뜻이니까.

"그래서 뭡니까. 용건이?"

천강의 질문에 흑선마희가 생긋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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