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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17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6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173화

173화. 태감(太監)

 

 

"다들 어서 준비하라."

"빨리빨리 움직여."

태감(太監)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하수로 내로 급한 움직임이 이루어졌다.

병사들이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물을 끌어 올리는 관 앞에 한 명씩 서서 대기한다.

이러다가 신호가 오면, 그다음 사람에게 신호를 전달하면서 들고 있는 칼로 관을 잘라내면 되었다.

그런 뒤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불에 태워 연기를 지상으로 올려보내면 끝.

"속히 움직여라. 태감이 오시기 전 준비를 마쳐야 한다!"

찰팍찰팍.

물소리가 크게 크게 울려 퍼진다. 부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직도 끝이 안 보이느냐!"

"끝이 안 보이냐 물으십니다."

"끝이 안 보이냐 물으십니다."

"……."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병사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뭣들 하는 것인지…… 내 직접 가봐야겠다!"

태감의 대리를 맡은 부관이 병사 셋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시간으로 병사들이 물 위에 파문을 일으키며 그들을 앞서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응? 뭐지. 분명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왜 저 안쪽에는 불빛이 없는 것이냐?"

그랬다. 분명 지금까지 열 명 이상의 병사들이 그들을 지나쳐 앞서갔는데, 지하수로 안쪽은 어둠만이 그득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그들을 지나쳐 나아가기 시작했다. 긴장된 얼굴로 그를 지켜보는 부관과 수행원들.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관이 조금 멀리 있었던 모양이다.

"후우.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예, 부관님."

그렇게 몸을 돌리고, 출구로 되돌아가려던 차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문득 부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받았다.

그건 오랜 기간 몽골에 원정을 나가며 얻은 일종의 감이었다.

그에 혹시나 하여 몸을 돌린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어린 소년소녀들을.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접근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돌연 빨라졌다.

"뒤, 뒤를 막아ㄹ……."

"컥."

"커헉."

순식간에 접근해 그들에게 안식을 내려준 아이들은 횃불을 물에 담가 끄고는 시체를 그대로 물에 떠내려가게 두었다.

그러고 고개를 들자, 저 앞쪽에서 횃불이 일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온다. 다들 잠수.

스르륵. 물속에 들어갔다가, 사냥감이 오면 바로 처리하고 앞으로 전진.

천강을 통해 수백 번도 더 훈련한 탓인지 아이들의 움직임은 매우 민첩했고 또한 은밀했다.

그렇게 지하수로 곳곳에선 암운곡의 어둠이 관군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관군의 군영이 자리한 천산의 남쪽.

태감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곳곳으로 불길이 치솟고, 막사와 진영은 거대한 무언가가 헤집어 놓은 듯 처참하다.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물론, 사기가 완전히 저하된 모습을 보고는 태감의 입은 다물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리라. 무려 이무기를 본 것이니.

화경 급 고수들도 이무기를 보면 몸이 덜덜 떨리는 게 통상적일 텐데, 제아무리 숱한 훈련을 한 정예 병사들이라 하더라도 천재지변과 같은 영물과의 조우는 꽤 충격이었을 것이다.

태감이 군영에 발을 들이자, 생존한 부관 몇몇이 그에게 나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태감. 오셨습니까. 지휘첨사는……."

"알고 있다. 살아남은 병력은 얼마나 되지?"

"2할 정도 됩니다."

2할……. 자조적인 웃음이 태감의 얼굴에 올라왔다.

이무기. 마치 태풍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그 자체.

운이 없군.

"병사들을 일단 안정시켜라. 본대의 작전은 잠시 미루도록 한다."

"그 말씀은 이후에 작전을 계속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부관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냥 이쯤에서 퇴각하심이……."

"폐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면 어찌 되겠나?"

"……이해했습니다."

태감이 몸을 돌려 다시 천산을 올랐다.

'일을 성공하건 실패하건, 아무래도 입단속을 위해 모두 처리해야겠군.'

일단은 하던 일부터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그렇게 쭉쭉 나아가는 그때였다.

숲을 내달리던 태감이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앞으로 고혹적이고도 요염한 여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어멋. 이거 참 놀라운 일이네. 태감이 누군가 했더니 지존(地尊) 당신이었어?"

"나 또한 놀랄 일이군. 다섯 왕 중 하나를 이곳 천산에서 만나다니. 미오왕, 아니. 흑선마희라고 불러드릴까?"

"호호호. 이곳은 마교니까, 흑선마희가 좋겠지? 근데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마실 나온 것치곤 황실과는 꽤 거리가 되는 것 같은데."

여인의 질문에 태감이 미소 지었다.

"당신이 알 바 아니오."

그러고 지나치려는 그를 그녀가 막아섰다. 태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게 볼 일이 남은 것인가?"

"아아. 의뢰를 받았거든."

"의뢰?"

"어. 당신을 죽여 달라는 뭐 그런. 후훗."

"재미있군."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무림에 존재하는 열 명의 절대 고수.

그중 반은 존(尊)의 칭호를, 나머지 반은 왕(王)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눈앞에 여인은 그 다섯 왕 중 하나인 미오왕(美烏王).

무려 70년도 더 전에 현경을 단 인물로 절대 얕볼 수 없는 고수다. 그러나 태감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했다.

"빨리 끝내도록 하지."

"후훗. 바라던 바야."

 

***

 

연회에서의 싸움은 의외로 쉽게 끝났다.

흑살마신을 잡겠다며 모여든 정사파 무리가 천강의 무위를 보고는 겁을 먹어 참전 의사를 되돌린 탓이다.

그로 인해 여울나무 측의 세는 급격히 약해졌고, 그 대부분이 결사 항전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투파창귀를 비롯한 몇몇의 경우 살아있었는데, 외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혈도를 짚어 그런 것일 뿐. 결국 그들에게 예정된 미래는 죽음이었다.

"물론, 원하면 아까 말한 대로 풍미관으로 보내줄게. 특히 투파창귀 넌 잘 생각해 보라고."

"욕을 보이지 말고 죽여라."

"욕을 보이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거다."

"무슨 기회 말이냐."

"뭐…… 지긋지긋한 무림을 벗어나 새 삶을 살 기회?"

투파창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무인들은 대체로 두 종류다.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자와 초야에 묻혀 살려는 자.

무위자연의 경지에 다다를수록 후자에 더 가까워진다.

"네 제자가 원하니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청청을 죽인 게 아니었나?"

"죽이긴 왜 죽여. 누구한테 밉보이라고."

아무튼 이쪽 일은 끝났다. 곧 정비를 마친 교주 측 인원들이 본대로 합류할 것이고, 적에게 총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흑막 녀석도 돌아오는 중이겠지.

"그럼 난 잠깐 자리 좀 비운다. 이따들 보자고."

천강이 손을 흔들자, 교주를 포함 사람들이 무운을 빌어주었다. 암운사신과 맹익이 다가와 물었다.

"우리 없어도 되겠냐?"

"하나보단 셋이 나을 건데 말입니다, 선배."

"아아. 그 말도 맞긴 한데, 우리 셋이 뭉치면 꼭 일이 커지더라고. 이번엔 나 혼자 갈게."

일귀와 암룡에게 노획한 신병이기들을 맡긴 천강이 남쪽으로 향했다.

천산은 고요했다.

원래라면 사방에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져야 할 것이나, 천산의 운명을 정할 싸움을 앞둔 탓인지 사람은 물론 큰 동물들의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곧 천강은 다수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우거진 숲에 가리어진 비밀통로.

그 앞엔 관군들이 도열해 있고, 신호에 맞춰 한 명씩 앞으로 나아와 주머니 하나와 횃불을 집어 들고는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저게 바로 신선환과 만나면 독이 된다는 문제의 풀인가 보군.'

슥 눈을 감고는 비밀통로 안쪽을 느껴본다. 다수의 병력들을 지나, 깊은 수로 안으로 아이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잘하고 있군.'

시간을 들여 훈련한 보람이 있어.

이번 작전은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럼 요놈은 어디쯤 오고 있으려나.'

천강의 시선이 조금 더 남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

숲 안쪽에서 큰 폭발이 일고, 천강은 그곳에서 거대한 두 존재가 맞부딪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꽤 낯익은 기운이었다.

'흑선마희?'

천강의 신형이 그곳으로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

 

***

 

흑선마희가 팔을 펼쳤다.

그녀의 오른손에 쥔 부채가 팔락 한차례 바람을 일으키고, 이내 맹렬한 강풍이 태감의 머리 위로 뭉쳐 그를 강하게 짓눌렀다.

『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퍼지니 그 시작은 바람이라. 』

쿠구구구구.

숲의 나무들이 그대로 부서져 가루가 되고, 지반은 1장가량 움푹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흑선마희에게서 다량의 기운이 퍼져 나가고, 그것들은 이내 하늘로 솟아올라 움직임을 봉쇄당한 태감을 향해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 바람이 불고 하늘에 검은 먹이 이니, 이는 비가 올 징조라. 』

하나하나에 강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격들.

능히 산도 지도상에서 없앨 위력을 담고 있었으니, 이곳이 천산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거대한 구덩이가 형성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파괴적인 기술을 완성한 그녀의 얼굴엔 도리어 당혹감이 올라왔다.

상대에게 조금도 타격이 없었던 것이다.

태감이 탁탁 자신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물었다.

"왜 더 공격 안 하지? 내 알기로 다음 구절도 있는 걸로 아는데."

"……."

"사실 그다음 구절이 가장 강력한 한 방 아닌가? 앞의 두 기술은 상대를 묶어놓거나 혼을 빼놓는 용도에 불과하고 말이야."

"너…… 대체 정체가 뭐냐?"

흑선마희의 질문에 태감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글쎄.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겠지."

흠칫. 무언가를 느낀 그녀가 잽싸게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화끈한 감각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확인해본즉 허리의 2할가량이 무언가에 의해 잘려 나가 있었다.

"큿……. 어, 어떻게?"

태감과의 거리는 얼추 30보.

근데 그 거리를 뛰어넘어 공격을 성사했다.

그렇다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요, 발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그저 팔을 휘둘렀을 뿐.

"지금 서 있는 그곳에서 더 위로 올라온다면 그대도 배울 수 있을 거다. 이 심검(心劍)을 말이야."

"심……검?"

일명 마음의 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벨 수 있고, 또 베지 않을 수 있는 경지.

"물론, 오늘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하지만."

"어찌 생사경(生死境)에 올라선 자가 아직 떠나지 않고 이 땅에 미련을 두는 것이오?"

"미련……. 그래. 그 미련 때문에 못 떠난 것인지도 모르지."

흑선마희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세간에서는 열 명의 절대 고수라 하여 그들을 하나로 묶지만, 엄연히 군왕과 존자들은 격이 다르다.

단순히 살아온 세월만을 놓고 따져 봐도, 왕들의 역사는 명이 세워지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는 그 격차를 좁힌 것으로도 모자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대체 이런 괴물이 어디서 혜성처럼 나타난 건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태감이 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이 정확히 그녀의 목을 향했다.

"아무튼 유감이다. 다음 생에는 상대를 봐가면서 의뢰받으시길."

"하. 그거참 고맙군. 죽는 순간에 조언질이라니."

생사경 앞의 현경은 그저 호랑이 앞의 토끼 꼴. 발악은 무의미하다.

여인이 눈을 감았다. 그렇게 끝이 나려는 순간이었다.

팡.

돌연 숲 안쪽에서 빠른 속도로 태감의 머리를 향해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걸 쳐낸 태감의 시선이 좌우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웬 놈이냐."

기척을 느끼려 하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대.

대신 갑자기 온 대지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는 지역 전체에 다량의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자신의 위치를 숨기기 위한 것인가?'

멍청하군.

태감이 뒷짐을 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리 내력을 마구 사용하면 금세 내기가 고갈된다. 그는 곧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조급함이 모든 일을 망치는 법이거늘. 쯧쯧.'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상대.

'이게 대체…….'

태감의 얼굴에 의아함이 올라왔다.

아니, 내기 양이 어떻게 돼 먹은 놈이지? 이 정도면 영물…… 거의 이무기 정도는 되는 수준 아닌가?

결국 참다못한 그가 두 눈에 힘을 줘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일순 그림자가 일었다.

고개를 들자, 웬 검은 구름이 공중에서 그를 향해 짓쳐 드는 모습이 보였다.

훅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몽둥이.

쿠콰콰콰콰-

천산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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