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7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71화
171화. 두려운가
광존. 산동의 파안광귀.
다섯 존자 중 가장 성격이 포악하고 자비 없는 인물.
사실 행적으로 치면 음존이 그보다 더하였으나, 음존의 경우엔 핵심적인 사건들 대부분이 누명이었고. 그 외의 사실조차도 대부분이 날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존의 경우엔 모두가 사실이었다.
얼마 전엔 자신이 광존인 걸 알고도 대접이 시원찮았다는 이유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한 마을을 모두 찢어 죽인 일화가 있었는데, 그건 그의 행적 중 일상에 불과했다.
그는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폭군이요, 무림인의 최악의 형상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악행은 잘 퍼지지 않았다. 그걸 입에 담는 족족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게 이름난 세가의 사람이 됐건, 혹은 문파의 일원이 됐건.
그런 폭군이 지금 겁에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정녕 인간이 맞는 것이냐!"
"왜 때린 건 네놈인데 소리를 치고 그래? 너 머리 괜찮냐? 뭐 별호에 광(狂)자를 단 걸 봐서는 정상은 아닌 것 같다만."
"괴, 괴수. 괴물……!"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광존을 이해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투파창귀가 인상을 찌푸렸다.
"광존. 정신 차리시오."
광존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향해 마치 화를 내듯 소리쳤다.
"너, 너희들은 저게 안 보이느냐! 저 끝이 보이질 않는 심연의 구렁텅이가 보이질 않느냔 말이다!"
"광존. 임무를 잊은 건 아니겠지?"
투파창귀의 한마디에 그가 미약하게 정신을 차렸다. 자고로 공포를 잠재우는 데에는 욕망만 한 게 없다더니, 딱 정확했다.
"제대로 좀 임하시오. 전력을 다하란 말이오."
……전력을 다하라고? 장난해?
조금 전 일격이 전력을 다한 거였다.
다른 현경들과는 달리 광존은 특이체질 때문에 심법 훈련을 게을리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기의 부족함을 못 느꼈기에, 단전의 크기를 늘리는 대신 내기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온 것이다.
그렇기에 투파창귀 입장에서는 광존이 적당히 힘 조절을 했다고 오해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빠득. 사실 명성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광존이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대로 물러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일격이 허무하게 막히는 바람에,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건지도 모른다.'
자고로 고수들은 수 하나씩은 숨기고 있지 않은가?
지금 눈앞에 사내가 자신의 일격을 막아낸 것도 그러한 맥락일지도 몰랐다.
광존이 다시 천강 앞으로 나아와 섰다. 천강은 처음 그 자리에 가만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내 기술을 막아내다니."
"뭐 위력이 별게 있어야지. 근데 너 날 형님이라 안 부르냐?"
광존이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는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힘껏 내리치며 외쳤다.
"이번에도 막으면! 엎드려 절하며 형님 소리를 해주마!"
쿠구구구구.
"헉. 허억……. 쿨럭."
광존의 입에서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단전의 기를 모두 뽑아내 내려친 일격.
지금껏 한 번도 이리 사용해본 적 없었고, 그래서인지 내상을 피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통했겠지.'
이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없다. 제아무리 흑살마신이라도 이 일격에는…….
그러나 광존의 눈이 부릅 뜨였다.
먼지가 걷히고 난 이후에 나타난 흑살마신은 그가 내상을 입으면서까지 만들어낸 일격을 단 손가락 하나로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 무슨……."
"쯧쯧. 그저 무식하게 내기를 쏟아 붙는다고 센 게 아니란다. 아무래도 내가 너보다 위인 것 같으니,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지."
천강이 손을 들어 올렸다.
히익. 광존이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며,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다.
"단 일격에 천지가 무너지고 요동을 치니."
지천뇌공.
쿠구구구구.
"크허어어억."
광존이 쓰러졌다. 단 일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바닥에 패대기쳐진 개구리마냥 지면에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나마 특이체질 덕택에 내기가 바로 공급됐으니 망정이지, 호신강기를 펼칠 힘조차도 없었다면 그대로 고깃덩이가 되어 사망했을 것이었다.
"자, 엎드렸으니 이제 형님 해야지?"
싸움은 가볍게 일단락됐다. 여울나무 측은 그 결과에 의욕을 잃고는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흑살마신을 상대하기 위해 중원에서 특별히 초청한 인물치고는 너무도 허망한 결과였다.
"흠. 이게 약속을 안 지키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잘 가라고."
천강이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광존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자, 잠깐!"
"뭐야."
"하겠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광존이 몸을 추스르고 무릎을 꿇는다.
천강이 발을 치우자, 그대로 그 앞에 고개를 숙이며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형님……은 개뿔! 이거나 받아랏!"
광존의 손이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손엔 침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푹. 천강의 다리에 꽂히는 그것.
"하하하핫. 크하하하핫!"
광존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곧바로 날아드는 천강의 발길질에 저만치 날아가 처박힌 이후에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냐?"
"크크큭. 흑살마신 넌 이제 죽었다. 방금 네가 맞은 독은 당가에서도 특별 취급 받는 극독 중의 극독."
얼마 전, 중원에서 이곳으로 출발하려는데 한 남자가 찾아왔다.
사천당문의 당주였다. 그는 자신에게 내기를 하자면서, 이기면 더 이상 당가를 거짓된 정보로 날조하지 말아 달라 제안했었다.
그때 그가 들고 나온 회심의 수가 바로 이 독이었다.
천강이 자신의 다리를 말없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독이지?"
"일각산독이라고 들어는 봤는지 모르겠군."
"일각산독?"
"그래. 사천당문의 가주가 직접 만든 독이다. 제아무리 화경급 고수라 할지라도 일각(一刻)이면 완전히 중독시킬 수 있는 물건이지. 크큭."
광존의 이야기를 들은 교주 측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런 비겁한!"
"어찌 항복하는 척하고 더럽게 독을 쓰는가!"
"하. 시끄러 이 조무래기들아! 흑살마신만 죽으면 그다음은 네놈들 차례니까!"
그러나 천강의 얼굴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는 침을 맞은 자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말했다.
"일각산독이라. 역시 별거 없었네."
"어, 어……?"
"55년 전에 객점에서 그렇게 자랑하더니. 겨우 이거였나?"
미소로 가득하던 광존의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독을 맞고도 전혀 변화가 없는 흑살마신. 광존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이, 이런 일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자, 그럼 형님 소리도 못 들었고. 내가 널 살려줘야 할 이유는 없네?"
"히익. 오지 마. 오지 마!"
천강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광존이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은 철저히 여울나무 측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판단한 투파창귀가 앞으로 나섰다.
"광존. 정신 차려라. 만약 자신이 없으면 나도 손을 거들지."
"뭐? 지, 지금 저 괴물이랑 다시 싸우라고? 어?"
"그래. 안 그러면 어쩔 텐가. 지금 흑살마신에게서 도망갈 자신 있나?"
냉혹한 현실에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까 암운사신이 보여주었던 경공.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천산을 벗어나기 전 죽임을 당할 게 분명해 보였다.
"……조, 좋다. 어차피 이판사판. 자네와 나, 우리 둘이라면 저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광존이 자세를 갖추었다.
투파창귀의 몸에서 악기와 무기들이 떠올랐다.
암운사신과 맹익도 자세를 추스르고, 그 외에 사람들도 각기 자신의 상대를 향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그 사이 천강은 주변을 슥 훑어보며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숫자가 많이 부족하군.'
다섯 배 정도 차이가 나는 전력비.
이쪽에 천마와 일필일사라는 두 현경이 있어 망정이지,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 되어 보였다.
'속전속결. 빨리 끝내자.'
그런데 싸움이 시작된 순간, 천강의 눈이 부릅 뜨였다. 광존이 돌연 방향을 틀더니 맹익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크하하핫! 제아무리 흑살마신이라도 인질을 잡는다면 간단하지!"
지금껏 하는 행태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더니, 역시나 또 조잡한 수를 시도하는 광존이었다.
그러나 천강은 그런 그를 가만 놔두고는 투파창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것에 투파창귀가 의아함을 갖는 순간, 광존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그 행동을 저지했다.
"네, 네놈이 여긴 왜……?"
"너인가? 내 동생이 빚을 졌다는 아이가."
천강이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좀 늦으셨군요, 암존."
"암존?"
"암존이라고?"
갑작스러운 암존의 등장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든 암존의 칼끝이 광존을 향했다.
"방금 들었겠지만 네겐 악감정이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은원관계일 뿐이니까."
"이익! 비켜라!"
쾅. 쾅쾅.
단숨에 거처 밖으로 튀어 나가 싸움을 하는 두 명의 절대 고수.
그 기세에 힘입어 다른 이들 또한 싸움을 재개했다.
숫자 차이가 꽤 있었으나, 일필일사와 천마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자 금세 상황은 막상막하가 되었다.
천강과 투파창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우리의 싸움도 슬슬 끝낼 때가 되었지."
"흥.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말투군."
"그래. 솔직히 저번에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조금 전 청청이랑 붙으며 확실히 깨달았다. 넌 절대 날 못 이겨."
투파창귀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럼 어디 그 실력을 한번 보겠다."
투파창귀의 머리 위로 신병이기들이 모여들며 오색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이내 수백의 날카로운 음파를 만들어 천강을 향해 쏘아 보냈다.
소요절기 제1식 칼바람.
청청과 같은 기술이나, 총 열네 개에 달하는 신병이기의 숫자 탓인지 이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가 짓쳐 드는 것 같았다.
후다닥 그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그러나 정작 그 목표가 된 천강은 뒷짐을 진 채 잔잔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강이 돌연 고개를 들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과 그 위를 자유로이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
"……."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힘을 숨겨왔다.
이전 날에는 힘이 약했기에 그랬고, 오늘날에는 상대가 도망갈까 하여 그러했다.
계속 숨기다 보니 습관이 되고 이제는 숨을 쉬듯 자연스러워졌지만, 종종 내가 가진 이것을 다 개방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계까지 꾸욱꾸욱 밀어 넣은 이 내기를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순간이.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판은 다 깔렸고 무대 위에 등장인물들도 모두 등장했다.
이제 남은 건 흑막이 나서는 것뿐인데, 그조차도 곧 무대로 올라올 예정이었다.
'그래. 이제 더는 숨길 이유가 없지.'
들숨 한 번. 이후 숨을 내쉬며 이제껏 꾹 억제해온 기운을 모조리 풀어낸다.
심장 안쪽부터 해서 손끝 발끝,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밀어 넣은 내기를 자유로이 방출한다.
천강은 지금껏 숨겨온 자신의 기운을 완전히 개방했다.
파아아아-
"이, 이것은?!"
"이게 대체……."
하늘 위 구름이 걷히고, 땅이 크게 진동한다.
맹렬히 짓쳐오던 소용돌이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싸우던 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되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장엄하고 웅장하게 느껴지듯, 전장 한복판 어린 사내에게선 그런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태산.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광활한 평야.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도 광대한 존재감.
그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몸을 떨게 하고, 느끼는 이로 하여금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네, 네놈은 대체…… 어떻게 인간이 그 정도의 기운을……?"
뒤늦게 광존이 느낀 감정을 깨달은 투파창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며 한창 해방감을 느끼던 천강의 입이 슥 귀 끝에 걸렸다.
"무림의 멸망을 바라는 자여, 두려운가?"
잔잔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이 그를 가만 응시하고.
천강이 턱을 치켜들고는 그에게 나직이 권고했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