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6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66화
166화. 말보단 주먹
오랜 시간 천강을 지켜봐 온 천마는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리를 셋으로 나누는데 착수했다.
마두들이 그 결정에 의아해하며 반대를 표했으나, 이미 천강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는 교주의 생각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로 인해 고민에 잠긴 적들.
지존(地尊) 앞에서 지휘첨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한데 모여 있으면 쉽게 풀렸을 텐데, 참으로 아쉽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러면 다섯 군데에서 태워본들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천산은 바람이 세고 곳곳에서 상승기류가 인다.
그런 그곳에서 세 진영으로 나뉜 적을 독으로 다 처리하려면, 기존의 배치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역시 물량을 더 들고 왔어야 했나."
그때 밖에서 지휘천막 안으로 여울나무 사람이 들어와 보고했다.
"무슨 일인가?"
"교주 측에서 모레 연회를 열 생각이랍니다."
"연회?"
큰 싸움을 앞두고 갑자기 연회?
"여울나무 측은 어떻게 답변했지?"
"응하기로 했습니다. 전력 손실을 최소화할 기회라……."
"이런 멍청한!"
지존이 내려친 탁자가 산산조각이 나 부서져 내렸다.
지휘첨사가 보고자를 막사 밖으로 물린 뒤,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리 성을 내십니까? 수뇌부들을 손쉽게 잡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 분명 좋은 상황이다.
어찌 됐든 독을 태우기 편해지기도 했고.
그러나 그걸 제안한 게 하필 교주 측이라는 게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고 받아들일 것이지, 그것을 덜컥 받아들이다니.
"……뭔가 찜찜해."
지금까지 지켜보고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적들의 정보 확보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그의 오랜 직감도 계속 불안한 신호를 보내왔다.
지휘첨사가 밖에서 새로이 탁자를 가져와 배치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집중하시겠습니까?"
"연회를 하는 장소가 어디랍니까?"
"일필일사의 거처에서 하기로 했답니다. 그곳 마당이 꽤 넓고 잘 꾸며진데다가 사방이 탁 트여 손님 대접하기에 좋다 들었습니다. 심지어 사시사철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 저희 쪽으로서는 작업하기가 매우 편합니다."
천산의 많고 많은 곳 중, 딱 그곳에서 한다고?
진영을 셋으로 나눠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마자, 그것을 해결할 방도도 같이 튀어나온다라…….
이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지존의 눈동자가 실낱같이 얇아졌다. 너무 시기적절하고 작위적인 느낌.
'신선환의 정체를 간파한 거로군.'
하긴. 파다하게 번지는 신선환을 보고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
어쩌면 연회를 열어 수뇌부들을 한데 모으고, 독을 피우는 순간 본인들은 뒷구멍으로 자릴 피할 생각인지도 몰랐다.
그리한다면 이쪽만 피해를 고스란히 입게 될 테니까.
'머릴 좀 굴리는 녀석이 있는 모양이야.'
과열된 분위기가 좀 진정되자, 지휘첨사가 보고자를 다시 들였다.
"그 외에 다른 보고사항은 없나?"
"투파창귀님께서 이번 전쟁 때 암운곡 쪽을 맡아주시길 바란답니다."
"암운곡?"
"예. 마인들을 육성하는 기관으로 여울나무 숲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 그깟 햇병아리들을 우리보고 맡으라 이 말인가!"
피해가 미약할 거란 사실에 속으론 좋아하면서도 지휘첨사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보고자가 고개를 숙이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분명 그리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암운곡 옆으로는 지하수로가 연결돼 있는데, 천산 곳곳에 거미줄처럼 뻗어있어 한 번 도망치면 추격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지하수로?"
그 이야기를 들은 지존이 흥미를 보였다.
"천산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단 말입니까?"
"예."
여울나무 측 마인은 따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랑하듯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천산의 지하수로는 명물입니다. 마시기만 해도 미약한 영기가 포함되어 있어 몸에 매우 좋지요."
"오오. 그런가?"
몸에 좋다는 말에 지휘첨사도 흥미를 표하고, 보고자는 입이 닳도록 그 효험을 강조 또 강조했다.
마치 그 일을 맡겼다고 화내지 말고, 설렁설렁 일하면서 좋은 물 마시고 건강 챙기라는 듯이.
"……그래서 천산의 모든 곳에 기관을 설치해 지하수로의 물을 끌어올려 씁니다.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렇군요. 투파창귀에게 배려해 줘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보고자가 사라지고, 지휘첨사가 다가와 지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째 기분이 좋으십니다."
"예. 독을 어떻게 퍼뜨려야 할지 방법이 섰습니다."
"오오. 어떻게 말입니까?"
"방금 그자의 말에 따르면 지하수로에서 지상으로 수많은 관이 천산 전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에 연결된 밑동을 잘라 독을 피워 올리기만 모든 게 해결되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바람을 걱정하며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모든 지역에서 독이 땅 위로 솟아오를 테니까.
소량만 흡입해도 바로 목숨을 잃는 만큼,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거 일이 아주 잘 풀리는군요."
***
암운곡 바닥.
하늘에서 한 인영이 뛰어 내려와 천강의 앞에 예를 갖췄다. 암룡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천강에게 슥 내밀었다.
"……."
내용을 확인한 천강은 아이들을 바로 불러 모았다.
이제 다음 훈련을 진행할 차례였다.
"지금부터 다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오오. 이제부턴 싸움 연습인가!"
신나서 폴짝 물속으로 뛰어드는 연화.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로부터 반 시진(時辰) 후.
"자, 더 빠르게 움직여. 더!"
아이들이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간다.
하루의 상당 시간을 물속에서 훈련하는 만큼, 그 행동들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그때 천강이 신호를 주었다.
파바바밧-
찬찬히 나아가던 아이들이 돌연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들은 천강이 서 있는 지점까지 오고서야 헉헉대며 호흡을 골랐다.
후다닥 달려와 천강의 어깨를 잡고는 흔드는 연화.
"야, 천강! 지금 이거 전쟁 준비 맞아? 너 내가 네 의견에 반대 좀 했다고 지금 굴리는 거지? 어, 그렇지? 어서 그렇다고 말햇!"
이번에야말로 싸움 훈련을 하는 줄 알았더니, 또 달리기라니!
"나 이거 안 해. 어서 싸움시켜줘!"
"잔말 말고 하류로 내려가."
"싸움시켜 달라고!"
"……."
결국 천강에게 까불다가 머리통에 혹 하나를 단 연화가 투덜거리며 하류로 내려갔다.
다른 아이들도 지금 이게 무슨 훈련인지 얼굴에 의문이 그득했다.
그저 아무 말 없는 것은 이걸 시키는 것이 천강이기에 믿고 따르는 것뿐.
'어쩌면 설명해주는 게 더 의욕이 샘솟겠지만.'
작전을 위한 보안은 생명이다. 천강은 이유를 푸는 대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전진."
***
이틀이라는 시간은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울나무와 암운곡, 교주 측 세력과 정사파, 관군 등등.
각각의 세력은 이번 싸움에 승리를 쟁취하고자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머리를 굴리었다.
그리고 그건 천강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
내게 유리한 판을 깔았고, 그 위에서 뛰놀 배우들에게 대본 또한 건네주었다.
뒤늦게 뛰어든 암운곡 아이들의 준비도 끝난 시점에서 이제 남은 건 오로지 하나.
'하늘이 결과를 내려주길 바랄 뿐.'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천강의 눈이 스르륵 열렸다.
이내 그 앞으로 일귀가 나아와 예를 갖추었다.
"이젠 동물을 따라 하는 수련은 안 하십니까?"
"큰 싸움을 앞두고 다른 데 정신 팔릴 순 없어서, 잠깐 휴식.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일귀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주었다.
서신? 그 내용을 확인한 천강의 얼굴에 곧 쓴웃음이 올라왔다.
"왜 그러십니까? 투항하는 데 곤란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까?"
청청과의 만남 이후, 언제든지 투항 쪽으로 마음이 바뀌면 연락을 달라는 의미에서 천강은 한 장소를 가르쳐주었고.
주기적으로 일귀로 하여금 그곳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곳을 통해 온 서신엔 투항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도리어 투지가 느껴졌다.
『 당신이 제 스승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해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금일 미시(未時) 천암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 이거 일이 복잡해졌구먼.
- 크흠. 그냥 네가 아니라 잡아떼면 안 되겠느냐? 솔직히 네가 죽인 것도 아니지 않느냐?
'뭐 그야 그렇긴 한데…….'
청청이 말하는 스승이란 아무래도 이전 투파창귀를 말하는 것이리라. 녀석은 현 투파창귀가 굴을 무너뜨리면서 그 아래 깔려 압사했다.
그러나 그거완 상관없이 천강은 녀석을 죽일 생각이었다. 치졸하게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이런 건 빠르게 해소하는 게 좋겠지.'
근데 문제는 시간이로군.
금일 미시(未時)면 연회 시작 시간.
"주군. 이제 슬슬 연회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암운곡 쪽 준비 잘 돼 가는지, 일귀 네가 나 대신 가면서 확인 좀 해. 이건 내용 확인하지 말고 무진이에게 전달해주고."
"알겠습니다."
일귀가 사라지고, 천강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흐르는 물 사이로 높게 솟은 바위.
살짝 일찍 도착한 탓인지 아직 약속 장소에 청청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강은 천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색에 잠겼다.
- 이제부터 내가 네 사부니라.
-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단전은 공허하게 비우고, 깊이는 깊은 계곡같이.
- 그래. 하핫.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요놈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 파편들.
남들이 보기엔 50년도 더 된 기억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천강에겐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생생한 추억들이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옛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린 건.
'스승이란…….'
천강의 감았던 눈이 스르륵 뜨였다.
그의 앞으로 한 소녀가 칠현금을 타고 나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천강과 무진, 연화 앞에 설 때면 늘 보여주던 미소는 없고, 대신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와 주위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 듣거라. 스승은 또 하나의 다른 아버지니라. 이는 하늘이 맺어주는 연으로써…….
어떨 때는 밉고, 어떨 때는 고맙고.
매 맞고 벌설 때는 진짜 욕이 목 끝까지 올라오다가도, 챙겨주고 신경 써주고 할 때면 이전의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는 존재.
스승은 그런 존재였다.
약 10보 거리를 남겨두고 청청이 입을 열었다.
"정말 당신인가요? 제 스승님을 해한 것이……!"
뭐라 말해야 할까. 오면서 쭉 고민을 해왔으나 답은 의외로 선선히 나왔다.
"난 투파창귀를 쓰러뜨릴 거다. 그게 한 명이 됐건 둘이 됐건."
"대체 왜죠!"
빽 소리치는 아이. 아직 앳된 그 목소리엔 감정이 짙게 배어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신병이기들이 천강을 설득하고 나섰다.
- 소년. 그냥 말로 해결하도록 해요. 일단 상대가 하는 말을 다 들어주고 이후에 잘 달래면 모두 해결될 것입니다.
- 막야 말이 맞네. 자고로 손자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고라 하였네.
'아아.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만 그건 내 성격에 안 맞아서 말이야.'
천강은 주먹이 편했다. 무엇보다 시간도 없었고.
또한 스승을 잃어본 입장으로써 보건대, 청청 쪽도 주둥이를 터는 것보단 온몸으로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걸 더 좋아할 것이다.
'때론 수백 마디의 말보다 주먹 한 방이 나은 법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천강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그래도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요? 당신 정도의 고수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지금 눈앞의 소녀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있다는 방증.
입가에 미소를 띤 천강이 손을 들어 까딱까딱 손짓했다.
"뭘 망설여? 주둥이로 싸울 셈이야?"
"당신……!"
"진정 내게 제대로 된 답을 듣고 싶거든 덤벼. 주둥이 말고 실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