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6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64화
164화. 적의 계책을 인지하다
"가가, 어때요? 효과가 있나요?"
"오오. 좋군. 정말 좋네, 그려! 침침한 눈이 훤해지는 게 아주 새로 태어난 기분이오."
"후훗. 다행이에요. 비싼 값 주고 사 왔는데 효능이 있어서."
처음에는 마인들에게만 인기를 끌었던 신선환은 신교 주민들에게까지 파다하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내기 운용을 할 줄 아는 이가 먹어야 효능이 있으나, 평범한 사람이 먹어도 혈액순환이 잘 되는 정도의 효과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나이 든 이들에겐 거의 필수로 섭취해야 하는 영약으로 둔갑되어 갔다.
마을을 거닐며 신선환을 사고파는 모습들을 본 지존(地尊)은 가만 회상에 잠겼다.
'신선환…….'
분명 영약은 영약이다. 처음 이것을 만든 이가 그 이름을 신선환이라 명명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먹기만 해도 신선의 골격을 갖추게 해준다 하여 지은 이름.
그러나 그는 곧 이것을 만드는 비법을 봉인했다.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던 탓이다.
먹으면 온몸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그 뚫기 힘들다는 임독양맥까지 아무런 위험 없이 타통하게 해주나, 특정 풀과 만나면 이내 극독으로 변모하고 만 것이다.
그 심각성을 아는 동창(東廠)도 원래는 이걸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50년 전 흑살마신이라는 마두가 나타나 그들이 오랜 기간 준비한 걸 단번에 깨부수면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들이 시간을 앞당기고자 칼을 빼 들었으니, 그게 바로 신선환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복식으로 위장한 지휘첨사가 지존의 옆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다 공급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예. 슬슬 움직여도 될 듯합니다."
"바람 부는 양으로 봐서는 천산 중턱 살짝 못 되는 곳에 자리를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만."
지휘첨사가 가리킨 곳을 잠깐 바라본 지존이 고개를 저었다.
"양이 많지 않습니다. 더 내부로 들어가 태워야 합니다. 아마 한꺼번에 태우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흠. 말씀대로라면 위치가 꽤 중요하겠군요. 천산 구석구석에 닿아야 할 테니."
신선환은 공급이 끝났고, 이제 불을 피우는 일만 남았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칼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적을 섬멸할 수 있으리라.
"혹여나 생각해둔 위치가 있으십니까?"
"찾아봐야지요."
한편 그 시각.
마교 내로 파다하게 번진 신선환의 여파를 암운곡 또한 피하지 못했다.
싸움에 이기길 원하는 윗선에서 그것들을 구해 보급해주었고, 강해지길 원하는 아이들은 그것을 모두 섭취하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알아채고 후다닥 뛰어온 묵현이 그 사실을 알고는 자조적인 얼굴로 한탄했다.
"……늦어버렸군."
그냥 미리 말을 할걸. 그랬다면 이 아이들이 비참하게 죽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은 상황.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묵현."
고개를 돌리자, 막 이곳에 도착했는지 천강이 그에게 손을 들고 있었다.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말이다."
자신의 아우들과 간단하게 눈인사를 한 묵현이 천강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천강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천강. 너도 먹었나?"
"뭘? 신선환?"
"그래."
"그야 당연히 먹었지. 영약이라며? 궁금한 건 또 못 참아서 바로 먹어봤지."
"그런 멍청한! 내가 분명 전에 먹지 말라고……."
말을 하다가 말고 한숨을 탁 내쉬는 소년.
천강의 고개가 갸웃했다. 신선환이 파다하게 번지는 게 뭔가 찜찜해 먹어보긴 했으나 천강에겐 그 어떤 이상함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미 만독불침과 완전한 북명신공의 경지에 다다른 천강에게 독 성분은 의미가 없었고, 들어오자마자 다른 영약들처럼 바로 흡수돼버려 그 어떤 변화도 전혀 감지 못한 천강이었다.
그러나 눈치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자부하는 만큼 천강은 신선환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묵현.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그래."
그러고 한쪽 구석으로 가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연화가 천강에게 다가와 그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야, 천강. 너 혹시 신선환 먹어봤어?"
"어. 왜?"
"넌 안 이상해?"
"뭐가?"
천강이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연화가 연신 '이상하다'를 중얼대며 설명했다.
"혈도를 뚫고 남은 기운이 단전의 기와는 별개로 몸속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정상인가?"
"조종 안 돼?"
"응. 정수리와 임맥 사이에 자리 잡고는 꼼짝을 안 해."
천강은 연화의 몸에 손을 대 그것을 느껴보았다. 아니, 느끼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연화의 내기를 쪽 빨아먹어 버린 천강.
"아악! 너어……!"
연화가 힘을 잃어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고, 천강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미안. 내기를 흡수해 버릴 줄은 몰랐네."
북명신공이 흡성대법보다 유일하게 불편한 게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리라. 내기를 운용하는 순간, 뭘 하든 상관없이 상대의 기운을 쪽 빨아버리는 것이다.
근데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연화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어, 천강? 나 몸속에 그 따로 노는 기가 사라졌어. 네 몸속으로 같이 빨려 들어간 모양인데?"
"그래?"
그러나 가만 눈을 감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뭐 교주의 이종진기도 눈 깜짝할 새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딱히 이상하게 생각할 부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과거의 일이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무진이가 폭주해서 천산의 보고에 올라갔을 때, 그때도 이 비슷한 걸 느꼈었지.'
어디서 흡수하였는지 모르는 기운. 조금 전 연화가 표현했던 것과 행태가 정확히 일치했다.
문제는 정수리와 임맥을 오고 가는 그때의 그 기운은 분명 독이었다.
'설마…….'
어떠한 깨달음이 와 닿고, 그에 대한 과거의 기억과 상념이 속속들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 누님. 신선환 지금 있으십니까?
무진에게 신선환을 먹이던 순간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천강의 생각은 어느덧 과거의 한 시점. 풍미관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에 가 있었다.
- 하하핫. 이미 연기는 피어올랐다. 넌 이제 끝이야!
- 마, 말도 안 돼! 화경인데 이 연기를 들이켜고도 멀쩡하다고?
'그래서였군. 그래서였어.'
그때 그놈이 자신만만하게 외치다가 당황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걸 본 연화가 묵현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야. 너 천강에게 무슨 말 한 거야? 뭔 말을 했기에 저 무서운 미소가 또 튀어나와?"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직."
두 사람이 수군거리건 말건 천강은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문제점은 찾았다. 해결책 또한 가지고 있다.'
해결책이란 그냥 기운을 흡수하면 끝.
그러나 천강이 이리 고민을 하는 건 다른 이유였다.
'이 사달이 일어나기 전 묵현이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건, 적들에게 드러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
그건 천강 또한 바라는 바다.
이건 기회였다.
적이 날릴 회심의 일격을 미리 알았고, 그 파훼법까지 갖추었다.
이는 향후 싸움에서 아주 유리한…… 그래. 아주아주아주 유리한 강점으로 변모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천강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애들아.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데, 내게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 뭔데?"
지금껏 천강이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없었기에 아이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아닌 말로, 천강은 소교주가 아닌가?
부족한 것 없는 그에게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천강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환하게 웃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가 흡공을 쓰잖아. 그런데 큰 싸움에 앞서 단전 크기 좀 키우려고."
"아하? 그런 거라면 당근 도와줘야지!"
"일단 내 것부터 가져가라고!"
아이들이 앞다투어 천강에게 나아오고, 천강은 모든 아이들의 내기를 빨아들여 신선환의 독성을 모두 해결하였다.
'애들을 통해 구실은 갖추었으니 이젠 다른 녀석들도 순순히 협조하겠지.'
묵현에게 신선환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은 천강은 곧바로 천산의 꼭대기 신전으로 올라갔다.
***
- 동쪽.
- 동쪽으로.
- 포위한다.
지세가 험하고 수풀이 우거진 어느 산자락.
병장기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온몸을 흑색 도복으로 두른 수백의 인원이 소수의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점점 수세에 몰리는 상대측.
이대로는 안 되겠다 판단한 걸까? 도주하던 이들 중, 열 명의 사신들이 뒤에 남아 검을 빼 들었다.
"무림인들, 죽어라."
"더러운 목숨,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러라."
그러나 그들은 곧 목을 부여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잔상을 남기며 그들의 목을 벤 암존이 자리에 우뚝 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단주. 가만 계십시오. 저희가 반 시진(一刻) 내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 북동쪽으로 방향을 틈.
- 북동쪽.
각종 신호가 숲 내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그렇게 토끼를 몰듯 상대를 거의 몬 순간이었다.
삐이이이-
"음?"
경각을 알리는 신호.
단주라 불린 자의 옆에 있던 이도 화답 신호를 보내고, 저 멀리서 한 사내가 다가와 암존 앞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서신입니다. 단주께 빨리 가져다 달라 하셨습니다."
서신을 펼쳐 내용을 확인한 암존의 시선이 다시 동쪽을 향하였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그의 손이 머리 옆으로 들렸다.
- 모두 정지.
- 정지.
-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모인다.
암존을 중심으로 빠르게 모이는 자들. 다 모인 걸 확인한 그는 이내 발걸음을 서쪽으로 돌려 나아갔다.
"흑귀의 추격을 미룬다. 지금부터 천산으로 간다."
그렇게 암존과 그 무리가 뒤늦게 천산으로 향하는 사이, 중원에서 천산을 잇는 길목엔 수많은 이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투파창귀가 흘린 보상을 탐내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보잘것없는 이부터 해서 나름대로 이름 있는 무림인들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 상대지만 도착할 때까지는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바……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 그건 그렇고, 보상이 태아(太阿)라니. 족히 2천 명 이상은 모일 기세로군."
"태아라는 검이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음? 그쪽은 태아가 뭔지도 모르고 가는 중이오?"
"저야 돈이 된다기에 그냥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목군의 어벙한 대답에 일천귀검이 티 나지 않게 혀를 찼다.
얼굴이 곱상하게 생겨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별 볼 일 없는 잔챙이였던 모양이다.
일천귀검은 미약하게 가지던 경쟁심을 버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한 번만 설명할 터이니 잘 들으시오. 전국시대 최고의 명인인 구야자와 간장, 막야.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든 게 바로 태아요."
그의 설명이 다소 부족했는지 목군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일천귀검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그 검으로는 못 벨 것이 없으니, 검을 빼 들기만 해도 상대는 공포에 질려 몸을 달달 떨게 만든다 하오. 그에 과거 초패왕이 전장에 꼭 들고 다녔던 이유라고도 하고."
"정말 엄청난 검이군요."
"항간에는 그 검을 지니는 순간 왕이 될 운명을 지게 된다더군."
그제야 가만 듣던 목군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어느덧 그들 앞으로 거대한 천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어?"
깜짝 놀라 검을 빼 드는 일천귀검.
제아무리 하북에서 이름을 크게 날린 그라도 주위를 에워싼 삼백여 명의 적을 전부 처리할 자신은 없었다.
그에 입술을 짓씹고는 주변을 경계하는 순간, 그들이 넙죽 엎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오셨습니까, 형님!"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는 일천귀검.
그는 곧 볼 수 있었다. 그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고 있는 한 사내를.
"목군. 자네 대체 정체가……."
"아아. 이런. 길에서 사귄 벗을 놀라게 했군요. 내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사내가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췄다.
반사적으로 일천귀검도 예를 갖추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드리리다. 산동의 파안광귀 목군입니다."
산동의 파안광귀면…….
"과, 광존(狂尊)?!"
"하핫. 그리도 불리고 있지요."
광존이 이런 서글서글하고 맹한 인상의 사내였다니.
체구는 어떻고. 소문에 의하면 광존은 9척 장신의 거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어떻게 보면 계집보다 조금 더 큰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광존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천산을 올라갔다. 여울나무로 향하는 그 길목에는 그들 외에도 수많은 정사파 인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일천귀검은 허탈한 얼굴로 마을 쪽에 시선을 주었다.
"……밥이나 한 끼 먹고 돌아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