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6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62화
162화. 다가오는 적들
천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천산의 절경이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신녀의 거처는 전운이 감도는 다른 곳과는 달리 평온함이 그득했다.
신교가 시끌시끌한 만큼, 신녀의 안전을 위해 그 어떤 일정도 내려주지 않았던 탓이다.
혹여나 그게 지루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 수행원들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막내야. 신녀님 이제 깨우렴."
"네!"
수행원 중 나이가 제일 어린 소녀가 후다닥 걸음을 옮겨 신녀의 방으로 향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간인 만큼, 봉우리가 높긴 해도 공기는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신녀님. 오늘은 날씨가 매우 화창하네요!"
문을 두드린 소녀가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중정에 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제 일어나시는 건 어떠실까요?"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것에 의아함을 느낀 소녀가 문을 재차 두드렸다.
"신녀님?"
슬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수행원.
비단 천이 내려앉은 공간엔 아무도 없고, 대신 그녀는 침대 위에 놓인 한 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잠깐 혼자 바람 좀 쐬고 돌아올게. 』
"꺄아악! 선배님! 언니이이이!"
***
"교주님. 신녀가 사라졌답니다."
회의를 하던 교주와 마두들의 시선이 일제히 보고자에게 향했다.
눈총을 받은 자가 고개를 숙이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잠깐 혼자 바람을 쐬고 오겠단 서신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답니다."
마무들이 황당하단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바람을 쐬는데 수행원 없이 혼자 사라지다니?"
"혹시 여울나무 측에서 손을 쓴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납치 가능성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신녀를 또 새로 뽑는 상황이 오면, 안 그래도 적은 인력으로 전쟁 준비하느라 바쁜 교주 측으로서는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녀의 정체를 아는 교주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입단속들을 시키거라. 신녀는 이번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무조건 살아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보고자가 물러나고, 진실을 모르는 마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요새는 하루라도 사달이 안 일어나는 일이 없구료."
"그러게 말이외다. 빨리 싸움이 끝나든지 해야지."
그렇게 교주 측이 황당해하는 동안, 진짜 그 감정을 느끼는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투파창귀였다.
"뭐라? 신녀가 사라져?"
"예. 돈을 쥐여 주고 들은 바로는 잠시 바람을 쐰다고 나갔다는데…… 사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흑살마신은 어떠하더냐?"
적삼혈마가 고개를 저었다.
크흠. 투파창귀가 기침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흑살마신의 소식을 듣고 싸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낙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음존으로 흑살마신을 상대하게 하는 계략은 잠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고민을 거듭한 투파창귀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중원에 의뢰를 넣어라. 흑살마신을 처리할 실력자를 구한다고."
"사파 쪽에 흘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정사파 구분 없이 뿌려라. 성공한 자에게는 태아(太阿)를 넘겨주겠다고 해라."
적삼혈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태아면 신병이기들 중에서도 가히 으뜸이 아닌가?
"어르신……."
"어차피 내게는 신병이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넘겨준 뒤 다시 회수하면 그만이었다.
적삼혈마가 사신을 중원으로 보냈다.
곧 중원 내에서는 신병이기 중 하나인 태아(太阿)의 등장과 흑살마신의 이야기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한편 그 시각.
마교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그 당사자는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자, 저 멀리 사천 도시와 아미산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쉬어가고자 하늘에서 내려와 앉자, 긴 행렬이 사천을 관통해 그녀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복식을 간편히 차리긴 했지만, 황실에 속한 정규군임을 인지한 그녀의 머릿속엔 의문이 생겼다.
'어디 전쟁이라도 하러 가나?'
최근 하오문주의 정보로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는데.
궁금하면 물어보는 게 속 시원한 법. 과연 관군이 대답을 제대로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는 한 병사와 발걸음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호걸이시여. 아낙이 궁금한 게 있어 여쭈온데,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것이나이까?"
머리와 얼굴을 천으로 숨긴 그녀의 행색을 잠시 살펴보던 사내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저 서쪽 땅에 도적 떼가 들끓어 잠재우러 간다고 하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외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걸음을 멈추고는 가만 생각을 해봤다.
방금 병사의 눈이나 태도, 어조로 보면 절대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도적 떼 소탕에 이 정도 실력자들을 끌고 가는 건 말이 안 됐다.
'역시 지휘관급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에 적절한 목표물을 살피는데, 문득 그녀의 시선이 한 사내에 꽂혔다.
한눈에 봐도 좋아 보이는 명마.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거구.
그 바로 옆을 함께 걷는 호리호리한 사내가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천수향의 시선을 느낀 걸까? 그 또한 그녀를 발견하고는, 명마의 주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그녀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오랜만이오, 음존.
- 그러게. 간만이네, 지존. 거의 10년만인가?
지존(地尊). 다섯 존자들 중 가장 강하다 알려진 천존과 쌍벽을 이루는 절대 고수.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중원을 통틀어 채 다섯이 못 될 것이다.
같은 존자들 중에서도 그의 모습과 기운을 아는 건, 오로지 천존과 그녀 자신뿐이었으니까.
- 어디를 가는 거야?
- 도적 떼를 소탕하러 가오.
-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지존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와. 그냥 속 시원히 이야기해.
-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소. 나도 다 사정이 있어서 말이오.
쳇. 협박이 통할 상대도 아니고, 천수향이 혀를 차며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그녀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아득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 근데 음존께선 어디를 가시는지?
천수향은 대답 대신 사천의 동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가 그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 올 때 보니 당가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더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런 거였군. 함께 참여하지 못해 미안하외다.
- 됐어. 나도 잠깐 얼굴만 비치러 가는 거니까.
- 그러고 보니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 ……그래도 가야지. 명색이 그래도 아비라는 작자니까. 아무튼 난 간다. 다음에 또 보자.
천수향과 사내가 서로를 향해 살짝 묵례했다. 그리고는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명마에 앉은 사내가 지존을 향해 물었다.
"아는 소저입니까?"
"당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가주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에 참석하러 가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거의 100년을 넘게 살더니…… 역시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모양입니다. 허헛."
지휘첨사의 말에 지존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전방에 잠시 나가 있던 부관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곧 사천 땅을 벗어납니다. 이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습니까?"
"음. 그리하도록 하지."
전군 제자리!
"전군 제자리!"
하나둘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장졸들. 지휘첨사 또한 말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며 부관에게 손짓했다.
"부관. 언제쯤 도착하겠나?"
"이 속도라면 아무리 늦어도 달포 안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짐을 최소화하고 이동하는 중이다. 식량도 그 외에 필요한 것들도 현장에 다 준비되어 있어 몸만 합류하면 되는 상황이라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다.
지휘첨사가 턱을 쓸며 서쪽 땅을 바라보았다.
"천마신교라……. 어떤 곳인지 벌써 흥미가 이는군."
천산에서 시작된 두 세력의 싸움은 알게 모르게 그 크기를 더해갔다.
그것은 곧 거센 소용돌이가 되어 중원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지경에 다다랐다.
그렇게 황실의 군대가 천산으로 향하는 사이, 그들보다 조금 더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바람을 타고 다닌다는 표현이 정확할 만큼 뛰어난 경공을 자랑하는 사내.
그는 천산 아래 자리한 한 마을 어귀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신비로운 경공을 갈무리하고 보폭을 줄였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거대한 바위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인파를 따라 마을 중앙을 지나쳐 한 식당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명월객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를 알아본 사장이 꾸벅 예를 올렸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군요. 먼저 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장을 따라 올라간다. 4층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남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풍월대주."
"예. 두 분 모두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예, 덕분에요. 근데 오늘은 안 나타날 줄 알았는데요. 후훗."
매번 보름달이 차오르는 달, 오시(午時)에 이곳에서 대기하는 흑선마희와 묵현이었다.
그 시간이 거의 끝나갔기에 오늘은 올 서신이 없다 생각한 그들이었다.
"사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시한을 다투는 급한 일이라 미리 전달받은 만큼, 그는 간단히 예를 차리고 바로 서신을 전달했다.
묵현이 그것을 받아 내용을 살펴보았다.
『 조조가 하남과 하북을 거머쥐고 승상에 올랐으니, 그 갈데없는 칼끝이 결국은 서쪽을 향하누나. 이 소식이 당도할 때면 이미 장강에 올랐으리. 순풍의 때를 만나 꽃을 피우기를 바라오. 』
"아들, 뭐라 쓰여 있나요?"
"……적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드디어 오는군요."
***
그리고 같은 시각. 그 소식을 천강 또한 전달받고 있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풍미관 총책임자 사무실.
추밀의 이야기에 천강의 눈이 부릅떠졌다.
일전에 추밀에게 도움을 주고 그에게 받기로 한 보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것이었다.
적들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전달받는 것.
동물을 이용해 상대 진영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라면, 제아무리 적이 방호를 철저히 한다 해도 막을 수 없었기에.
"그 수가 얼마나 된답니까?"
"족히 5천은 넘고 그 대부분이 실력자라는군."
"그래도 대놓고 끌고 오진 않는군요."
"나름 은밀히 온다고 그 수를 줄인 거겠지."
그럴 것이다. 황실에서 마음먹고 데려온다면 10만…… 아니, 50만은 족히 끌고 올 수도 있었다.
물론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고 새 황제가 올라선 지 오래되지 않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무튼 5천의 병력이라도 절대 적지 않은 수임은 분명했다.
더구나 실력자들. 화경 급 고수들도 상당수 포진해 있으리라.
'그리고 그 중엔 놈도 있겠지.'
이 모든 일의 원흉.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것이냐?"
"예. 적이 오는 시기와 그 수를 알았으니, 준비해야지요."
천강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바람같이 사라졌다. 추밀의 시선이 창문 밖 동쪽을 향하였다.
"결국은…… 싸움이 일어나고 마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