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5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54화
154화. 이유
- 왜 그러십니까?
'조용.'
투파창귀의 시선이 골목과 여울나무 진영을 한차례 슥 훑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 여울나무 내로 어떤 이변이 생긴 걸 직감한 그였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다고 할까. 기분 나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고, 그 모든 흐름이 골목 안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투파창귀의 발걸음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때, 그를 뒤따르던 청청이 다가와 제지했다.
"스승님. 적삼혈마가 기다리겠습니다."
청청과 그는 급히 총책임자 사무실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지금 여울나무를 내리누르는 이 찜찜함은 그곳 일을 마친 후 확인해도 늦지 않았다.
"……그래. 가자꾸나."
골목 안으로 들이던 발을 회수한 투파창귀가 총책임자 사무실로 발길을 틀었다.
조금 있으니 어두운 그늘에서 천강이 스윽 나타났다.
- 소년. 적삼혈마는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게.'
투파창귀와 함께 있는 상황에 암살은 불가능.
그렇다고 둘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자니, 곳곳에 벌여놓은 사달이 들키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별수 없지. 아쉽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천강은 여울나무에 들어왔던 때처럼, 단번에 근무자들을 지나쳐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응? 뭐지?"
"바람일세, 이 양반아. 벌써부터 졸지 마세."
암운신공으로 몸을 두른 천강을 근무자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 그럼 지금부터 사냥인 것이냐?
- 자, 어서 가자꾸나!
그러나 아쉽게도 천강이 앵화고목에 다시 들어섰을 땐, 그곳에선 한참 북적거리는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백여 명의 마인들이 급히 기지로 복귀하는 모습 또한 보였다.
- 시체를 발견한 모양인데요.
'그런 모양이야.'
- 안 싸우나요? 지금 급습하면 정예 병력 대부분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요.
그럴 것이다. 정예 병력 오백만 사라져도 지금의 전황을 정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서 녀석들을 건들면 투파창귀도 튀어나올 거 아냐.'
그럼 원치 않게 전면전으로 번질지도 모른다. 그건 천강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빠르게 여울나무로 복귀하는 무리를 보며 천강 또한 발길을 돌렸다.
'생각대로 움직여 줬으면 좋겠군.'
***
"투파창귀님을 뵙습니다."
"간만이외다."
투파창귀가 청청과 함께 들어서자 적삼혈마와 한 사내가 예를 갖췄다. 투파창귀가 상석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 흑귀. 급히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그렇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더욱 사신들을 양산하고 싶다만……. 스승이 암존(暗尊)을 불러들인 것 같다."
"암존을?"
"내 스승이 최근 사신에 흥미를 가졌더군. 한번 집념을 가지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동원하는 늙은이라……. 지금 피하지 않으면 암존에게 뒷덜미를 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절대 피할 수 없다. 단서가 잡히기 전 미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수도 쪽으로 가볼 생각이다. 이왕이면 재료를 가까이 받을 수 있는 곳이 좋겠지. 실험도 거의 완성단계이고."
투파창귀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까지 딱히 한 일이 없긴 해도 사신들은 언제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패였다.
돈을 들여 이제야 완성단계에 돌입했는데 떠난다니…… 단물만 쏙 빼먹고 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더는 쓸모가 없긴 하지.'
마교는 이미 거의 다 끝난 싸움. 이왕이면 더 쓸모가 있어 보이는 중원 쪽이 낫긴 할 것이다.
"그래. 잘 가시게. 태감(太監)께는 안부 좀 전해주고."
"알겠다. 그럼 이만 가도록 하지."
밖으로 나서는 사람들. 총책임자 건물 앞으로는 오십여 명의 사신들이 도열했다.
흑귀는 그중 사신 아홉을 따로 떼 투파창귀 옆으로 보냈다.
"그 아이들은 혹시 몰라 놓고 가겠다. 급히 연락할 일이 있거든 이용해라."
흑귀와 사신들이 빠르게 여울나무 숲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이내 북쪽 산등성이를 타고 쭉 내려가 천산의 영역을 벗어났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걸 확인한 투파창귀가 걸음을 떼었다. 그 뒤를 따라붙으며 적삼혈마가 물었다.
"어르신. 어딜 가십니까?"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렇다."
여울나무를 무겁게 짓누르는 싸한 감각.
원래라면 흑귀 놈을 탈탈 털어 사신들을 반수 이상 내놓을 것을 협상했을 것이나, 그러지 않은 건 줄곧 이 감각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에 아까의 그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서 요란한 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앵화고목 뜰에서부터 여울나무 안까지 이어지더니, 이내 투파창귀와 적삼혈마를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투파창귀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그, 그게…… 비부쌍마가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투파창귀의 왼편 눈썹이 꿈틀했다. 적삼혈마의 경우엔 깜짝 놀라 그 앞으로 튀어 나갔다.
보고하는 이들은 들고 온 비부쌍마의 시체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은……."
거미에게 체액 빨린 벌레처럼 앙상하기 그지없는 몸.
완전히 비틀어지고 으스러진 양손 양팔.
먹물에 푹 담가 놓은 것 같은 검은 피부.
들어본 적 있다. 이런 상태의 주검에 대해서.
적삼혈마의 시선이 보고자를 향하자, 그와 함께 있던 이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흑살마신입니다. 비부쌍마는 흑살마신을 잡겠다며 저희를 이끌고 앵화고목 뜰 안쪽으로 향했었습니다."
비부쌍마, 이 멍청한……!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경계 소리가 울렸다. 이어 곳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줄곧 찜찜하던 기우가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르신."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진짜 흑살마신이었을 줄이야."
"큰일입니다. 책임자들과 그를 보조하는 자들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심지어 호접일검도.
"복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적어도 2개월입니다. 그것도 온전히 복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투파창귀와 적삼혈마의 시선이 여울나무를 훑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 보여도 뭔가 부자연스러운 게 눈에 들어왔다.
결국 보다 못한 적삼혈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렇게 불과 하루 만에 천산 내에서의 전세가 확 뒤집히게 되었다.
***
"신교의 영웅을 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죽을상이었던 교주 측 마두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들은 신전으로 들어서는 천강을 두 발로 뛰어나와 맞이했다.
- 대우가 하루 만에 완전히 달라졌네요.
- 이제야 영웅적 행보를 시작하는 것인가.
- 그럼 우리도 다시 역사에 그 이름을 드높이는 때가 왔다고 봐도 되겠군.
명성. 우러름을 받는다는 건 현재 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전생의 천강은 명성을 누리기 전 사망했다. 중원에까지 그 이름을 날리기는 했으나 혜택을 받기 전 이종진기로 절명한 것이다.
그러나 50년 전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오늘에 와서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높이는 사람들과 신임을 보내는 눈빛들을 보니, 책임감과 함께 언행이 다소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그래도 명성을 구가하는 삶보다는 스승과 낚시하던 때가 더 좋은 천강이었다.
천강은 허리와 어깨, 목에 절로 힘이 들어가려는 걸 탁 풀어버렸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 가볍고,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시원한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제가 차 한 잔 따라 드려도 될까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비단으로 차려입은 요염한 여인이 차호를 들고는 옆에 와 섰다.
첫 반격의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임에도 상에는 술이 자리하지 않았다.
"묵현 어머님?"
"어멋. 절 아시는군요?"
"예. 묵현에겐 고맙다는 인사 전해주십시오."
그에게는 천잠사 신발의 빚이 있었다.
분명 묵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주는 거라 했지만, 그 덕분에 천강은 투파창귀와의 일전도, 무저갱에서의 일들도 다 잘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받은 게 도리어 차고 넘쳤으니 무림의 법도대로라면 갚아야 하는 게 맞았다.
"언제 한번 단둘이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는 것도 전해주시면 좋겠군요."
"후훗.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찻잔이 채워지자 흑선마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천강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교주와 스물넷의 마두들.
분명 이전에는 사십 명 가까이 되었던 걸로 아는데…… 교주 측 세력은 지난 일 년 사이가 굉장히 쇠퇴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의 일전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교주의 시선이 암운사신을 향했다.
"그럼 지금 형세가 어떻게 되나?"
"오늘 적진으로 넘어간 열두 명의 배신자들과 여울나무 핵심 수뇌부 여섯을 처리했습니다. 여울나무 측엔 쉰여덟에 해당하는 마두가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마두는 곧 권력 그 자체다. 다들 최소 직책 하나씩은 달고 있기 때문이다.
상위 서열일수록 맡은 직책이 무겁거나 여러 직책을 겸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전황을 뒤집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좋지 못하군요."
"흠……."
걱정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때 천강이 손을 들어 한 가지 정보를 추가했다.
"쉰여덟이 아니라 쉰일곱이야. 흑도마황은 죽었거든."
"흑도마황이?!"
사람들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교주 측의 현경이 셋이다. 반면에 여울나무 쪽의 현경은 이제 하나고.
현경 하나가 화경 열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교주 측이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투파창귀가 들고 있는 총 열네 개의 신병이기를 감안하면 의미가 없는 부분인지도 모르지만.
"흑살마신의 말대로라면 비록 마두의 수는 저희가 적으나 세력 비율은 얼추 다시 균형을 이루었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암운사신의 보고가 끝이 나자, 이곳저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동일한 의견을 제시했다.
"교주님. 현재 적들은 통제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이 기세를 몰아 적을 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한목소리가 되어 적을 치자 주장하는 사람들.
'죽다가 간신히 살아났으니 더욱 그렇겠지.'
여울나무의 결정적인 패인을 꼽으라면, 바로 다 이겼다고 생각해 시간을 질질 끈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저들의 실수를 타산지석 삼아 우리는 바로 공격하자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천강은 교주 측 마두들을 하나하나 슥 훑었다. 그러다 흑선마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봅니다."
"흑선마희.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아직은 적들을 가만 놓아줘야 한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건 저만의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후훗."
사람들의 시선이 천강에게로 모였다. 이미 천강으로부터 계획의 전말을 전해 들은 천마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 흑살마신. 근데 궁금한 게 있다. 왜 끝을 보면 안 되는 거지?
- 간단해. 진짜 대가리를 잡기 위해서다.
- 진짜 대가리?
- 너도 알잖아. 외부에서의 협력이 있다는 거. 50년 전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흑막이 있어. 이런 일이 다시는 안 생기려면 놈을 잡아야 해.
그러기 위해 일부러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흑살마신이 등장한다면 어떻게든 죽이려 들 테니까 말이다. 아마 그러다 보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도 오겠지.
- 난 여울나무를 적당히 밟아놓을 거다. 아직 병력이 남아 있어 전황을 뒤집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투파창귀 녀석이 도망치지 않고 버틸 테니까.
그래서 정예 병력도 잡지 않은 거였다. 진짜 본체를 잡기 위해.
- 투파창귀는 반드시 놈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