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5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50화
150화. 흑살마신 천강
"뭐라 하던가?"
어둠 속. 그늘에 몸을 숨긴 열두 명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한 명에게 물었다.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린 그는 무리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기회를 준다더군."
"기회?"
"그래. 어찌 됐든 우린 교주 측에 몸을 담그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기네들 편이 되었다는 걸 어디 보여 보라더군."
마두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여졌다. 그 정도는 예상한 탓이다.
"그래서 무얼 요구하던가?"
"딱히 요구하는 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걸 증명해 보라고 말했을 뿐."
"대충하면 안 되겠지?"
"되겠는가? 나라도 적이었던 이가 내게 전향을 신청하면 강력히 요구할 것이네. 내 편이 되었다는 그 증거를 말이야."
"……어렵군."
한 사람이 모두를 대신해 감정을 토로했다.
뭐가 어찌 됐든 교주 측에 몸을 담고 있었던 자신들이다. 진정 투항을 넘어 같은 편이 되고자 한다면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옛정을 생각해 대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그들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해야지."
"그래."
무리가 서로를 쳐다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하는 거 확실히 하지."
***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신교의 신전. 외부에서부터 천수마검이 뛰어 들어와 천마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급박하다 못해 굉장히 심각했다.
"무슨 일인가?"
"지금 본교 내로 난리가 났습니다. 저희 측 요직에 자리하고 있던 몇몇 마두들이 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천수마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에 따라 그의 손아귀에서 뿌드득 억센 악력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들이 그냥 배신한 게 아니라, 그 아래 있던 부관들을 다 죽이고 전향했습니다!"
"뭐라?"
내부에서 배신자가 있다는 건 알았다. 흔들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그 모두가 본모습을 드러낼 것도.
왜? 그러고자 한 행동이기에. 일부러 벼랑 끝에 몰린 척, 막다른 골목에 몰려 죽기 직전의 상황인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저런 행동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한 천마였다. 그것은 마인들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 행태였다.
"여울나무 측에서 요구한 거로군."
"제 생각도 같습니다."
멍청한 녀석들……. 싸움이 끝나면 토사구팽당할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큰일이다. 적들의 체계를 흔들려고 했는데 졸지에 이쪽이 먼저 흔들리게 생겼다.
"교주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대체가 가능한 부관들은 다 죽은 상황이라, 사실상 저희 측 요직의 3할가량이 적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꼴입니다."
"……일단 대기하도록."
"예?"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교주님!"
천수마검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한번 칼을 뽑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신검. 그 신위를 자주 목도한 천수마검이다. 지금 그걸 뽑아 든다면 적들에게로 넘어가는 아군의 배신행위가 주춤할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아니, 오히려 교주의 위엄이 서 적들조차도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되겠지.
교주의 시선이 천수마검을 향했다.
"천수마검. 그대는 늘 내 옆에 서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지."
"교주님."
"걱정 말거라. 칼을 빼 들 시기를 기다리는 중이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교주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놔뒀다간 배신의 흐름이 급물살을 탈까 걱정이 되는 그였다.
그러나 교주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올라왔다.
"늘 그렇듯 날 믿고 기다리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네."
저들이 완전히 이겼다 확신할 때. 그 누가 봐도 저들의 승리로 확실시될 때. 그때 움직일 것이다.
"자네는 신전 밖으로 나가, 조금 전 내게 달려올 때처럼 이곳저곳에서 연기하게. 마치 급한 불을 끄는 사람처럼 말이네."
"알겠습니다. 제가 늘 교주님 옆에 든든히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
천산의 급박한 움직임은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두드러졌다. 마두의 선에서 움직이던 그 흐름은 이젠 제일 말단에 자리한 마인들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들었는가? 동쪽과 남쪽 부대의 경계를 서는 이들이 여울나무로 전향했다는 소식일세."
"엥? 그게 무슨 소린가. 농담하지 말게!"
"농담은! 지금 그것 때문에 다들 고심하는 중이라 하더군. 다른 부대로 옮길까 말까 말이야. 몇몇 이들은 책임자를 따라 자연스레 여울나무로 전향돼 목숨을 구제한 걸 좋아하더군."
"아니, 그런 창자 빠진 놈들이 있단 말이야? 여울나무라니? 하! 참."
그런 중에 이루어진 마두 회의.
신전에 모인 세력 비율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중립 세력을 사이에 두고 덩치가 비슷하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마두의 7할에 가까운 이들이 한데 모여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립 세력도 중립 세력이지만, 교주 세력이었던 이들의 상당수가 여울나무로 포섭돼 넘어간 결과였다.
'부관들을 다 죽이고 전향한 사건이 크긴 했군.'
교주의 앞에서 두 무리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배신자들이 어찌 마두 회의에 당당히 참여하는가!"
"말에 어폐가 있군. 우리들은 강자지존의 원칙에 따라 행동한 것뿐일세. 응당 제일 강한 자가 천산의 주인이 되는 이곳에서 미리 강자를 찾아 섬기는 게 배신인가?"
"어찌 그 혀를 간사히 놀리느냐!"
수많은 배신자들이 여울나무 측에 서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었다.
교주 측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들 중 세 사람을 주목했다. 그들은 불과 어제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 있던 자들이었다.
"근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흠흠. 미안하지만 우린 진즉에 이쪽이었네. 그저 그동안 쓸 만한 정보가 있나 하여 잠시 그걸 미뤘을 뿐."
"이, 이노오옴!"
챙. 챙챙챙.
결국 병장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신전 내에 울려 퍼졌다.
살벌해진 분위기 속, 한 사람이 그 사이에서 중재에 나섰다. 권광투마였다.
"싸우더라도 이곳에서 싸우는 건 아니지들 않소. 한판 하고 싶다면 회의 끝나고 밖에서 하시오. 내 승패를 봐 드리리다."
권광투마는 교주 측이긴 해도 호탕하고 뒤끝 없는 성격에 많은 이들로부터 호의를 받는 인물이다.
그가 나서자 싸움의 열기가 금세 잦아들었다.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 듯 보이는 상황에 가만 상황을 지켜보던 교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여울나무 측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마교 서열 25위 만월무검이었다.
교주 측 진영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교주 측에 있다가 가장 먼저 여울나무로 넘어간 인물이었기에.
"신교의 하늘이시여. 이전번에 회의에서 나왔던 사안, 정찰 인력을 늘리기 위한 예산 충원에 대해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오늘은 그 예산을 확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재는 위기 상황. 언제 전쟁에 착수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그 예산을 배분함에 있어 몇몇 부문이 필요 이상의 돈을 지원받고 있는 걸 확인하였습니다."
"그게 어디 어디인가?"
"기계‧진식 부문, 서쪽과 북쪽 방위 부대, 천산 초목 관리 부문, 신전 유지비, 천산의 보고입니다."
많이 조사했군.
아니, 배신자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불었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기계‧진식의 예산은 교주 측의 은밀한 활동비로 사용된다.
서쪽과 북쪽 방위 부대는 사실상 교주에게 남은 이들의 주요 전력.
천산 초목 관리 부문은 흑사대의 예산, 신전 유지비는 교주의 그림자 운영비. 마지막으로 천산의 보고는 흑영대의 예산이다.
즉, 교주를 흔들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 흔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근데 흥미롭군. 신녀 쪽도 건들 줄 알았건만.'
그쪽 또한 교주 측의 활동비를 충원해주는 곳이었는데, 어째선지 저들은 그 부분만큼은 건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건들고 싶어도 건들 수 없었으니…… 그곳엔 이무기와 동급의 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탓이다.
괜히 그녀와 불화를 일으키기 싫은 투파창귀가 그곳을 제외하고 발표하도록 한 것.
아직 신녀가 중원의 강자 중 하나인 음존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천마였다.
"……하여 이 부문들의 예산을 3~5할가량 줄이면 적정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그렇게 얻은 예산을 정찰대 쪽으로 다 투자하고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픽. 실소가 나왔다. 천마가 고개를 들어 마두들을 슥 한번 훑어보았다.
50년 전 흑살마신이 한 번 쓸었는데도 언제 이리 많이 불어났는지.
- 넌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이길 테니까.
- 이번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를 거다. 날 믿어라, 천태현.
'그래. 과거와는 달라야지.'
이번에는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딱하게 서 있던 마두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좋다. 그렇게 예산을 줄이도록 하라."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들 모였고 하니 내 여기서 공표할 게 하나 있소."
회의를 파하고 나갈 준비를 하던 마두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교주는 복도 쪽에 서 있던 괴기나한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가 후다닥 복도로 빠져나갔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소교주가 죄를 뒤집어쓰고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네. 근데 현재 중원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바…… 내 새 후계를 정해야만 했소."
그 한마디에 좌중엔 소란이 일었다.
"새 후계자라고?"
"교주에게 다른 아들이 하나 더 있었던 건가?"
"자넨 들은 게 있는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일세."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
그러나 그 소란은 잠시에 불과했다. 여울나무 측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본들 최후의 발악일 뿐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래도 외부에서 실력 있는 지인을 합법적인 절차로 불러들일 요량인가 본데, 상황을 뒤집기란 요원할 일. 이 상황은 초대 천마가 와도 바꾸지 못해."
그때였다. 밖으로 나갔던 괴기나한이 다시 돌아왔다.
천마를 향해 고개를 슥 끄덕이는 노인. 천마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새 소교주는 앞으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내라!"
신전 내 모든 시선이 복도 쪽으로 향했다. 한 인영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괴기나한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이윽고 조금 더 나아가자 암운사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네 녀석!"
그를 알아본 천수마검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권광투마는 놀라다 못해 크게 웃어젖혔다.
아직은 앳된 모습이 얼굴에 남아있는 사내. 그러나 나아가는 두 다리엔 태산을 짊어질 힘이 있고.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깊고 잔잔하니, 갖은 세월의 풍파를 다 거치고 나온 듯하다.
그가 교주의 앞에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화답했다.
"그동안 강녕하셨나이까. 흑살마신 천강, 신교의 하늘께 인사드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