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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14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4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141화

141화. 착각

 

 

'응? 뭐야. 그 새끼가 아니었잖아?'

오목골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 있는 두 늙은이를 본 천수향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분명 시비들 말로는 이곳은 흑살마신의 거처라 했다. 그런데 그런 이곳에서 서로 투기를 드러내며 싸우려는 행태는 단 하나.

"너희들은 뭐냐?"

밖에 있는 놈들처럼 자신의 사냥감을 노리는 벌레라 판단한 천수향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맹익을 잠깐 쳐다보곤 그가 화경에 불과한 늙은이란 걸 파악한 천수향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앞에 서 있는 현경 고수에게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는 투파창귀.

투파창귀와 천수향 사이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사방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가 잠잠해지길 반복하고, 노래하던 풀벌레들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기 싸움에 들어가고 약 일각(一刻)의 시간이 지난 후, 눈앞에 여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란 걸 깨달은 투파창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인께서는 누구시오."

"본좌는 음존 천수향이니라."

그 한마디는 그곳에 있는 두 늙은이를 경악하게 할 만했다.

무림의 5존(尊) 5왕(王).

그중에서도 무림의 다섯 존자는 근 30년간 그 적수가 없을 정도의 절대 고수들이다.

혹자는 이미 신선의 반열에 들어 이승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을까 유추할 정도로.

생사 확인은 물론 얼굴 보기조차도 힘든 존재의 등장에 투파창귀와 맹익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중 투파창귀의 목울대가 한 차례 움직였다.

'음존 천수향.'

당가에서 나온 악녀 중의 악녀. 이곳 마교의 여마인들조차 한 수 접어준다는 최악의 여인.

성정은 포악하기 그지없고, 무공의 실력도 오대존자 중 천존과 지존 다음으로 여겨질 만큼의 고수다.

미모는 중원에서 늘 다섯 손가락 안에서 빠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으나, 그 배경을 아는 자는 몸서리를 치는 게 다반사였다.

그녀는 원래 당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여식이다. 무슨 뜻이냐. 원래부터 색목인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극한의 미모를 추구한 탓에, 자신의 눈과 머리털을 뽑고 색목인의 것으로 심어 저리되었다는 게 옛 호사가들의 증언이었다.

'물론, 그 말을 한 이들은 모두 땅의 거름이 되어 사라졌지만.'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와 결혼하기 싫어 혼례를 올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신랑이 당일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후로 당가에서 그 사내를 어떻게든 찾아보려 했으나 찾지를 못했는데, 풍문엔 그녀가 악심을 품고 먼저 선수 쳐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아무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녀는 가문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당가의 성을 버리고 천의 성을 만들어 사용했다.

해당 사건은 한때 중원을 크게 뒤흔들었으나,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문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면서 사건은 금세 묻히게 되었다.

뭐 묻는다고 완전히 덮어지는 게 아닌바 그 잔재가 남아 떠돌았으니…….

- 당가의 여인은 독해. 부인으로 들이기엔 다소 문제가 있지.

- 암만. 자칫 오해를 샀다간 언제 어디서 독에 당해 비명횡사 하는 것 아니겠는가?

- 얼굴에 혹해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간 제 명을 단축하는 일일세.

그렇게 당가 여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녀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아마 광존이라는 칭호를 가진 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능히 그 칭호를 받았을 것이었다.

"뭘 꼬나보지?"

천수향이 톡 쏘아붙이자 투파창귀가 자신의 악기들을 회수하며 말했다.

"아니올시다. 그건 그렇고 나 말고도 신교의 영웅을 뵈러 오신 분이 한 분 더 계신데 이래도 모습을 안 드러내실 겁니까?"

숲 주위로 투파창귀의 외침이 퍼져 나갔다. 아직까지도 흑살마신이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 생각하는 투파창귀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걸고넘어진 건 맹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야. 늙다리. 내가 사람 보는 촉은 좀 있거든?"

천수향이 투파창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낮게 물었다.

"너…… 여기 왜 왔냐?"

투파창귀와 천수향 사이로 다시금 기 싸움이 일어났다. 아까보다 맹렬한 다툼에, 화경에 불과한 맹익은 그들로부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침묵하시겠다? 흥. 그럼 내가 말하지. 흑살마신은 내 거다. 네놈에게 돌아갈 기회는 없으니까 꺼져라."

천수향은 흑살마신을 잡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녀는 자신의 은원관계에 다른 이가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인간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명색이 현경 고수. 흑살마신과의 일전에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곱게 인심을 써주는 중이었다.

"왜? 싫어? 그럼 여기서 한판 붙든가."

투파창귀의 시선이 여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음존을 이길 자신은 있다. 그러나 천산에서 싸움이 커질 경우 교주가 끼어들 거고, 잘못하면 합공을 당할 수 있었다.

현재 마교는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내상의 위험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지금은 물러나야겠군.'

그리고 음존이 나섰다면 그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오대존자 또한 무림인. 언젠가는 죽여야 하는 존재들.

이번 싸움으로 흑살마신이든 음존이든 둘 중 한쪽이 죽으면 이득이다. 양쪽 다 죽으면 더 좋은 것이고.

"알겠소이다. 내 음존께 양보하겠나이다."

"흥. 진즉에 그럴 것이지."

투파창귀가 결계 밖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그녀에게 맹익이 후다닥 뛰어와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근데 너."

"예?"

팔짱을 낀 천수향이 맹익을 가만 바라본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자신의 의아함을 드러냈다.

"왠지 익숙한 얼굴인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

"전 음존을 오늘 처음 뵙습니다만."

"그래? 기분 탓인가?"

잠깐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근데 넌 누군데 아직 안 꺼지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

"전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군."

자신의 사냥감을 노리는 승냥이는 아니라는 사실에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던 여인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천수향이 주변을 홱홱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흑살마신은 어디 있어? 이곳에는 없는 것 같은데."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언제 오는데?"

"그건 저도 잘……. 어느 날 나가셨다가 들어오셨다가 제 마음대로이십니다."

"그 새끼 50년이 지나도 제 좋을 대로 사는 버릇 못 고쳤네."

천수향이 홱 몸을 돌렸다. 그녀는 결계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안에는 흑살마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느낀 탓이었다.

"흑살마신한테 전해. 내가 찾아왔었다고."

"예. 알겠습니다."

"꼭이야."

"예에……."

천수향 또한 사라졌다.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그는 이마의 땀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샤워라도 한 것처럼 흠뻑 젖은 채였다.

"대체 선배님. 50년간 무얼 하고 돌아다니셨기에 오대존자 중 하나와 원한을 사신 건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정말이지 어디를 가든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은 변함없는 걸 다시금 깨닫는 맹익이었다.

"그래도 그 원한 때문에 목숨을 건졌으니…… 이것은 목숨을 또 빚진 걸까요, 선배?"

맹익은 결계 주변으로 나아가 기관진식을 새로 매만졌다. 기관진식도 오래되고 그의 실력도 이전보다 늘었으니 이참에 더 나은 형태로 개조할 생각이었다.

 

***

 

절벽을 타고 위로 쭉쭉 올라간다. 천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한 봉우리의 정상 가까이 올라선 천수향은 그곳에 자리한 으리으리한 건물에 조심스레 착지했다.

'딱히 이상함을 못 느끼고 있네.'

하품을 하며 보초를 서고 있는 수행원들을 확인한 그녀는 아까 나왔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거처로 복귀했다.

'후우. 그건 그렇고, 너무 마음이 급했어. 이렇게 몰래 움직일 필요 없이 그냥 공식적으로 찾아가면 그만이었는데.'

흑살마신을 당장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무식하게 행동하고 말았다.

'나인 걸 눈치채고 도망가진 않겠지?'

좀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벌인 일이다. 천수향은 마인의 복식을 벗고 신녀의 하늘하늘한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눈을 슥 감는 그녀.

볼일이 끝났으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 났네. 축골공을 연달아 쓸 순 없는데."

축골공은 인위로 뼈와 근육을 압축시키는 기술이다. 몸이 안정을 되찾기 전에 연달아 사용하면 몸이 크게 상할 수 있었다.

"쳇. 오늘 흑살마신을 만났다면 다 해결될 것을."

당연히 거처로 찾아가면 있을 줄 알고 몸을 원래 크기로 만들었는데, 의도치 않게 신녀 노릇을 더 하고 있게 생겼다.

'별수 없지. 한동안은 아프다고 핑계를 대는 수밖에.'

다음 날. 천수향은 문과 사방의 침투로를 내기로 단단히 걸어 잠그고는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오려는 수행원들에게 소리쳤다.

"나 오늘은 몸이 아파서 못 나가니까 그렇게들 알아!"

"자, 잠깐만요, 신녀님! 아프면 진료를 받으셔야죠!"

"진료고 뭐고 나 지금 피곤하니까 다음에 오라고 해. 그리고 사흘간은 모든 일정 다 취소야!"

"예에? 신녀님. 신녀님!"

들어오겠다며 문을 흔들고 벽을 후려치는 사람들. 그중 몇몇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자 했으나 무림의 절대고수를 상대로는 의미 없는 짓이었다.

천수향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결국 별의별 방도를 다 시도하고도 성과를 내지 못한 그들은 포기를 선언했다.

"신녀님 어떡해요. 진짜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그러니까. 목소리도 달라지셨던데."

"어떡해……. 일단 위쪽에는 보고를 올리는 게 낫겠죠?"

"그래. 아프셔서 사흘간은 일정을 소화 못 하신다고 가서 알리렴."

그리고 그 소식은 신교 곳곳에 퍼졌다. 그녀를 가만 주시하던 투파창귀에게도.

"사흘간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휴식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투파창귀가 턱을 쓰다듬었다.

전날 그의 앞에 나타난 금발의 여인.

중원에서 색목인을 보기란 쉽지 않다. 특히 폐쇄적인 이곳 천산에서 그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인이 둘씩은 있을 수 없는바…… 나이 차가 좀 있긴 해도 투파창귀는 음존이 신녀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흑살마신의 거처에서 돌아온 음존이 갑자기 삼 일간 문을 걸어 잠그고는 휴식을 취한다라.'

투파창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흑살마신을 처리하는 와중에 부상을 입은 거로군.'

투파창귀는 곧바로 사람들을 풀었다. 다음 날, 하나둘 올라오는 보고.

"괴기나한의 얼굴이 내내 어두웠습니다. 마치 밤새 한숨도 못 잔 것처럼 두 눈이 퀭했습니다."

흑살마신에게 일이 생겼구나……!

사실 괴기나한의 상태가 안 좋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투파창귀가 결계를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걸 보고, 밤새 기관진식을 싹 다 뜯어고치느라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음존이라는 갑작스런 거물의 등장은 늘 예리한 투파창귀의 의심을 덮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흑살마신에 대한 진한 감정은 진짜였기에. 더더욱.

보고자가 물러나고, 자초지종을 전달받아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게 된 적삼혈마가 투파창귀와 같은 생각을 드러냈다.

"흑살마신이 죽었거나 최소 부상당한 게 확실하군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르신?"

적삼혈마의 질문에 투파창귀가 생각에 잠겼다.

"흑살마신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교주를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고를 끝낸 투파창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의 방식을 유지해 서서히 압박해 나간다."

"예?"

"흑살마신은 죽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음존은 살아있다. 그녀가 있는 한 우린 흑살마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날의 싸움에서 설령 흑살마신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음존은 그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림의 방식.

어느 한쪽의 생이 끝날 때까지 끝날 수 없는 것이 바로 무림의 원한 관계였다.

"흑살마신은 음존에게 완전히 맡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처럼 안전하게 간다."

잠깐 고민하던 적삼혈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을 치기 위해서는 전력손실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엔 그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 모든 변수들도 사라졌으니, 이젠 용의 목을 서서히 압박해 가도록 하자구나. 아주 안전하게 말이다."

"예,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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