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4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40화
140화. 흑살마신을 노리는 자들
"여어. 오랜만이야. 저승 일은 할 만하신가?"
무저갱 넓은 공동. 그 중앙에 앉아 있는 천강에게 흑백무상(黑白無常)이 나타나 다가왔다.
그중 흑무상(黑無常) 추혼살개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뭐 나야 잘 지내네. 근데 말단 직책이라 그런지 영……."
천강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전생에 마교를 휘어잡고 다니던 서열 4위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하급 말단 관리인과 같은 태도를 보여준 탓이었다.
못 말린단 얼굴로 천강이 검은 안개에서 물건을 빼냈다. 그걸 본 백무상(白無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 그것은?!"
"뭔데 자네 그리 놀라나?"
"그것은 천잠사가 아닌가!"
"그게 참말인가?"
백무상에게 들어본즉, 천잠사는 영계에서도 최상급 비단으로 친다는 것 같았다. 천강은 눈이 크게 뜨인 두 저승사자에게 웃으며 그걸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어때? 우리 추혼살개님 승진에 충분하실까?"
"암! 충분하다마다! 하핫. 고맙네. 정말 고맙네. 흑살마신!"
"별말씀을. 그건 그렇고, 나 부탁 하나 있는데 자네가 좀 들어주려나?"
"뭔가?"
기분이 좋은 추혼살개가 동료와 함께 천잠사를 만지고 또 매만지며 물었다. 천잠사가 좋긴 좋은지 그 입가엔 미소가 그득했다.
천강은 검은 안개에서 천잠사를 또 꺼내 들었다. 그들에게 건넨 양의 10곱절은 되는 양이었다.
"아, 아니 대체 그 많은 걸 어디서……."
"혹시 명계에 실력 있는 장인이 있을까?"
"장인?"
한 차례 서로를 쳐다본 흑백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겠지, 아마?"
"암암. 있을 것이네."
"그래? 그럼 지금 이것의 8할을 주지. 만약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말이야."
"이 많은 거에 8할을……?"
흑백무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떡 벌어진 꼴이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우리 추혼살개님과 동료분, 저승에서 승승장구하셔야지. 그래야 안면 있는 나도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을 거고."
"흠. 크흠흠."
"대신 남은 2할은 나 장갑 좀 만들어 줘."
"장갑 말인가?"
"어. 손목까진 다 덮는 장갑이야. 구멍이 안 뚫린 걸로. 명계에서 실력 있는 장인에게 부탁해줬으면 좋겠어. 보다시피 내가 한창 성장 중이니까 각각 다른 크기로 두 쌍으로. 부탁 좀 할게."
천잠사의 선물에 신이 난 추혼살개와 그 동료가 기쁜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껄껄껄. 걱정 말게! 우리가 최고의 장인을 찾아볼 터이니!"
"언제쯤이면 되려나?"
"완성이 되든 안 되든 1개월 뒤 찾아오도록 하지."
그렇게 흑백무상은 천강의 장갑을 만들어주기 위해 천잠사를 들고 사라졌다.
"1개월……."
앞으로 1개월이면 신물(神物)을 들 수 있다.
***
여울나무 숲 총책임자 사무실.
기다란 책상을 사이에 두고 투파창귀와 적삼혈마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호접일검이 들어와 투파창귀에게 예를 갖추었다.
"투파창귀님을 뵙습니다."
"그래. 중간 단계를 보고 하러 온 건가?"
"예. 중원의 정찰 관련 편성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전부 물갈이될 것입니다."
이로써 교주 측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됐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사람은 보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종진기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하게 되었군.'
작영이란 그림자로부터 얻어낸 정보 중 가장 귀한 게 있다면, 바로 현 교주의 몸 상태였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그러니 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투파창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럼 소교주도 잡았고 외부와의 연결 고리도 다 끊었으니, 이제 남은 변수는 하나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호접일검과 적삼혈마가 투파창귀를 돌아보았다. 적삼혈마가 대표로 물었다.
"어르신. 흑살마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흑살마신이라.
시기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긴 했지. 투파창귀는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그럼 신녀님, 편안한 밤 되시어요."
"혹시 촛불들 다 꺼주면 안 될까? 오늘은 편히 자고 싶은데."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몇 안 되는 촛불마저 모두 꺼지고, 어둠과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공간에 은밀한 기운의 흐름이 이루어졌다.
그것들은 방안을 빙 둘렀고, 이내 외부로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차단했다.
뚜득. 뚜드득.
마치 관절이 기괴하게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그마한 소녀의 몸이 사라지고 묘령의 여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천수향은 미리 구해놓은 여마인의 복식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는 창문을 조용히 열어젖혔다.
천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신녀의 거처.
하늘 위로는 별과 달이, 그 밑으로는 검은 수풀과 계곡이 은은한 달빛을 머금어 낮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그것들은 분명 절경이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천수향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이건 신녀가 아니라 죄수네.'
마치 좋은 절경을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대우를 해주는 듯 보여도, 현실은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감옥이 정확할 것이다.
창문을 조용히 닫은 천수향이 폴짝 뛰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관통해 지나가고, 그 속에서 그녀는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흑살마신.'
- 아가씨. 결국 그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쟤가 걔야? 당가에서 나온 희대의 악녀가?
- 가문에서는 이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널 사망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애비가 미안하구나.
드디어 놈을 만난다. 정확히 56년 하고도 67일 만에.
만나면 어떻게 할까. 살점 하나하나를 뜯어줄까? 아니면 결박해놓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으로 죽을 때까지 괴롭혀 줄까?
뭐가 됐든 드디어 오늘 밤이었다. 천수향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오목골이라 했지.'
바닥에 발소리 하나 없이 착지한 천수향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단숨에 오목골 인근까지 뛰어갔다.
사삭- 사사삭-
대자연을 거스르는 기묘한 흐름.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결계.
'저기로군. 흑살마신의 거처가 있다는 오목골이.'
입구에 다다른 천수향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사방에 흑살마신의 거처를 주시하는 몇몇 존재들이 느껴졌다.
'암살자들에게 시달린다 했었지.'
흑살마신의 목숨은 내 것이다. 어둠 속으로 안광이 번뜩였다.
순간적으로 천수향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땐, 거처를 주시하던 이들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는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그럼 이제 놈을 만나러 가볼까.'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녀보다 한발 앞서 오목골의 입구에 나타났다. 그는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겨 결계 안으로 사라졌다.
"방금 녀석은?"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상대를 제대로 살피진 못했으나, 분명 현경급 고수.
천수향의 두 주먹에 힘이 실렸다.
'설마 흑살마신!'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천수향 또한 결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상대는 천수향이 들어선 순간 결계 너머로 막 넘어가고 있었다.
젠장.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기관 진식을 풀기 시작하는 여인.
'앞으로 이각(二刻).'
음존 천수향의 눈이 강하게 번뜩였다.
***
'흠? 방금 뒤쪽에서 어떤 기척을 느낀 것 같은데?'
지나온 결계를 쳐다보는 투파창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흥미롭게도 이곳에 둘러진 결계는 안쪽에서도 바깥에서도 건너편을 보지 못하는 구조였다.
'너희들은 못 느꼈느냐?'
- 예.
……기분 탓인 게로군.
몸을 다시 돌린 투파창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흉흉한 기운이 오목골을 아우르자, 풀과 나무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앞으로 한 인영이 나아왔다. 그는 흑살마신의 제일 벗으로 알려진 맹익이었다.
"오랜만이오, 괴기나한."
"투파창귀.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요새 흑살마신께서 여러 이적을 행하고 다니시지 않소이까. 이전에야 칩거 중이시라 방해가 될까 하여 인사를 못 드렸소만, 마인된 자로서 대선배에게 한 번은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게 도리 아니겠소이까."
"그래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이리 불쑥 찾아온 겐가? 이 늦은 시간에?"
호랑말코 같은 새끼. 괴기나한의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투파창귀.
마교 서열 1위. 교주를 제외하고는 마인들 중 제일 강한 인물.
마교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울나무 숲의 우두머리이자 그곳의 주인.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예상을 했다. 저들에게 흑살마신이란, 마교를 집어삼키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기에.
'그런데 하필 선배가 없는 이때 찾아올 줄이야.'
이곳이 하늘이 내게 내린 내 생의 끝인가.
투파창귀의 성격과 행보를 잘 아는 괴기나한이 자세를 잡았다. 투파창귀는 고개를 쳐들고 팔짱을 꼈다.
"흑살마신께서는 어디 계시오이까."
"네놈에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 이곳에 한 개의 은밀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너무도 감쪽같아 자칫 잘못하면 놓칠 뻔했습니다.
'그래?'
신병이기의 보고에 투파창귀 또한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기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현재 이곳엔 맹익을 제외하고 세 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암운사신의 식솔인 서아와 초아, 그리고 무영삼귀의 이귀였다.
그러나 암운신공을 사용하는 초아와 서아의 존재는 제아무리 신병이기라도 눈치채지 못했고, 오로지 이귀 하나의 기운만을 잡아낸 투파창귀의 신병이기들이었다.
투파창귀는 그 기운을 흑살마신이라 판단했다.
"그만 숨어계시고 밖으로 나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예의를 삶아 먹은 놈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막무가내를 부리는 것이냐! 썩 꺼지거라!"
"안 나오신다면 별수 없지요. 나오시도록 하는 수밖에."
투파창귀의 몸에서 악기 세 개가 떠올랐다. 맹익이 몸을 낮추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맹익이 이귀에게 나서지 말란 수신호를 보냈다.
암운사신의 모녀는 지금 지하수로 통로 사이에 숨어 있고,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상세히 전달해줄 이는 오로지 이귀뿐이었기에.
하늘 위로 아름다운 선율이 울리기 시작했다. 맹익의 양손에 쥐어진 끌과 망치에 검은 기운이 응집돼 넘실거렸다.
그렇게 두 노고수가 맞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갑자기 오목골의 공기가 서늘하게 굳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짙은 중압감이 숲 위에 내려앉았다.
사박. 사박.
풀잎을 밟는 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지고.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이내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으로 비치는 맹수와 같은 푸른 눈.
그 위에서 아름답게 나풀거리는 황금 머리칼.
중원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이색적인 미모.
그러나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든 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걸 잊게 만드는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이빨로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타난 천수향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너희들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