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3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33화
133화. 시험
"……며칠이나 지났지?"
검붉은 굴 안을 지나며 묻는 천강의 질문에 뇌명이 대답했다.
- 달포가 조금 넘었습니다.
벌써 달포……. 천강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곳곳에 자리한 해골들의 배치와 눈에 익은 글귀들.
몇 번 지나온 길이다. 스물두 번? 스물세 번?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자주 지나온 곳이었다. 불과 한 시진(時辰) 전쯤에도 이곳을 지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천강은 바닥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마지막 식량과 물이 떨어진 지 어느덧 나흘이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한데.'
그나마 체력을 꾸준히 관리해 와서 망정이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쯤 바닥에 쓰러져 움직일 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길을 찾지 못해 고민이 있을지언정 천강의 마음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백호의 혼과 성화의 기운으로 천강의 정신 상태는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았다.
그래서일까. 평안함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검은 안개…… 어디서 오는 거지?'
살아 움직이는 듯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저건 생물이 아닌 어떤 현상이었다. 비나 구름같이.
다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없잖아 있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걸 만들어 유지하는 그 무언가가 이곳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신물(神物)일 가능성이 높겠지.'
천강이 성화를 들어 휘적휘적 앞으로 흔들어 보았다. 성화의 기운이 앞뒤로 영역을 넓히고 좁힐 때마다 검은 안개가 도망쳤다가 다가오며 요동치길 반복했다.
천강은 그 행위를 지속하며 그것을 집중해 살펴보았다.
'이쪽이…… 더 짙다.'
아주 미약한 차이라 살피는 데만 해도 무려 일각(一刻)의 시간이 걸렸지만, 분명 한 쪽 방향에 자리한 어둠이 더욱 짙었다.
즉, 지금 저 검은 안개에 밀도 차가 있다는 것. 그건 상대적으로 조밀한 방향에 신물이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활로를 찾은 천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화로 어둠을 내쫓으며 길을 찾아 나섰다.
갈림길의 순간마다 상대적으로 더 짙은 곳을 찾아 앞으로 나간다. 그렇게 삼십여 번을 선택하고 나자, 천강은 어느 거대한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웬만한 문파의 수련장보다 더 넓고, 사백동굴보다도 더 높고 광활한 곳.
종유석이나 석순 혹은 기둥조차도 없는 인위적인 그 공간에선 흥미롭게도 검은 안개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중앙으로 음울한 보랏빛이 감도는 검 하나가 덩그러니 꽂혀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저것이 바로 신물(神物)……."
능히 땅과 하늘을 침묵하게 만들 힘이 깃들어 있다는 전설의 무구.
홀린 듯 천강의 몸이 그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때 내면에서 백호의 혼이, 외부에선 성화가 천강을 일깨웠다.
정신을 차린 천강은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단 함정은 없군."
그러나 천강은 신물을 저 앞에 두고 심호흡했다.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 이기에.
찬찬히 앞으로 나아간다. 한 발. 한 발. 천강의 흙 밟는 소리가 사박사박 조용히 공간에 울렸다.
그렇게 신물로부터 10보 이내의 거리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 흠?
- 지진?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동 한쪽 벽에 어떤 문이 생성되었다.
일전에 천산의 보고에서 천계에 들어갈 때 한 번 본 적 있었던 문. 그것과 굉장히 흡사했다.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 거대한 손이 훅 튀어나왔다.
덥석.
발톱 하나가 천강의 머리보다 더 큰 그것의 손등 외피는 마치 검붉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이어 튀어나온 또 다른 손. 양손으로 문 양옆을 단단히 붙든 그것은 이내 다리 하나와 얼굴을 내밀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쿵. 쿵.
놈이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땅에 파문이 일었다. 천강은 녀석을 보는 순간, 미로를 헤매며 보았던 한 글귀가 떠올랐다.
『 몸은 태산과 같이 무겁고, 피부는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하다. 또한 내기를 차단할 수 있기에 내가중수법은 통하지 않으며,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공격하는 순간엔 마치 먹잇감을 낚아채는 독수리와 같다. 』
완전히 밖으로 나온 녀석을 마주했을 때, 천강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13척은 더 되어 보이는 신장이었다.
그다음은 글귀대로 녀석의 몸무게.
이곳이 천산이어서 망정이었지, 평범한 산속의 굴이었다면 녀석의 발걸음 질에 바닥은 가라앉고 천장은 무너질 것이었다.
인간과 같이 두 발로 섰으나 팔다리의 두께가 외공을 익힌 무림인보다 족히 서너 곱절은 더 되었고, 큼지막한 손과 발은 곰의 발보다 더욱 맹수 같았다.
특히나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머리의 형상은 녀석이 절대 대화가 통하지 않을 상대임을 보여주었다.
크워어어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존재. 녀석이 천강을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
"금나한님."
"그래. 왔느냐?"
뿌연 연기가 검은 하늘 위로 올라가 사라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구경하던 금나한이 일귀를 웃으며 맞이했다.
"별일은 없었고?"
"예. 다행히 아직 아무런 일도 없는 모양입니다."
"그것참 다행이로구나."
지금껏 금나한은 인간계의 일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규칙이기도 하지만, 인간끼리 다투는 그 일이 그에겐 큰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마교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건, 순수하게 천강이라는 소년에 대한 호감이 전부였다.
"금나한님. 이것 좀 드시지요."
"오오.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매번 고맙구나."
"아닙니다. 주군께서 이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거든 꼭 술과 음식을 들고 들르라 하셨습니다. 전 그 명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하핫. 정말이지 너무도 마음에 드는 인간이도다!"
금나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보따리를 풀어 술을 벌컥벌컥 넘긴 뒤 말을 이었다.
"만약 후에 내가 도울 일이 있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네 주군의 일이라면 내가 발 벗고 나서 주겠다."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일귀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무저갱을 쳐다보았다. 대략 무슨 이유인지를 알고 있는 금나한이 말해주었다.
"아직 네 주군은 나오지 않았다."
"……오래 걸리는군요."
벌써 달포가 흘렀다. 한 차례 큰 폭음이 일고, 투파창귀가 빠져나간 걸 본 일귀는 마음에 불안이 일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금나한이 이를 환히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유유히 빠져나와,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멍청한 얼굴로 우리에게 인사해 올 것이니라. 그러니 염려 말거라."
"예."
금나한이 보여주는 큰 믿음에 일귀는 불안이 사르륵 사라지는 걸 느꼈다.
***
천강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거대한 공간에 괴물의 잔상이 생겼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니, 저 덩치에 저리 빠른 움직임이라니.'
저 괴물에 대해 자세히 글을 남겨놓았던 고인은 놈과 마주하자마자 도주를 시도했었으나 치명상을 입어 결국 죽게 되었다고 기록했었다.
그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저 육중한 무게에 잔상이 이는 속도라면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고,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몸이 터져나갈 테니까.
'분명 저주받은 땅 위에서는 놈을 이기기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써놨었지.'
무림인에게 내기는 갑옷이자 무기다. 그걸 쓰지 못한다면 이 시험은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곰을 사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천강에겐 천잠사가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간단했다.
탐색을 하던 놈이 공격을 개시했다. 잔상을 남기며 천강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녀석은 천강의 뒤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내질렀다. 그러나…….
"크륵?"
응당 꼬챙이가 되어야 할 인간의 몸을 녀석의 발톱이 조금도 꿰뚫지 못했다. 분명 두 다리가 허공에 떠 있었으나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내기운용이 가능하단 건, 그 어떤 공격도 내게 타격을 주기가 힘들다는 뜻.'
천령초로 강화된 몸이다. 또한 그 위를 차고 넘치는 내기로 감쌌다.
녀석의 매서운 발톱이 닿는 순간, 천강은 마치 누군가 등을 톡 건드리는 정도의 느낌만 받을 수 있었다.
'자, 이제 날 일격에 죽이지 못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녀석이 당황해 손을 뗐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았다.
팔을 위로 쳐들고 마구 흔들어댔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떼어 내고자 다른 손을 댔으나 도리어 양손이 다 붙어 버리고 말았다.
당황해 허우적거리는 녀석을 느끼며 천강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올라왔다.
"북명신공."
쿠콰콰콰콰-
크아아아아!
녀석의 내기가 천강에게 쪽쪽 빨려 들어왔다.
이제는 모든 혈도를 개방해 흡수해버리는 천강에겐 이깟 괴물의 기운을 모두 뺏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무진이와 똑같은 수준이 되었다고 봐도 되겠군.'
쿵. 내기가 쪽 빨린 괴물이 힘을 잃고 뒤로 자빠졌다. 놈은 으레 흡공에 당한 인간들처럼 바닥에 쓰러져 몸을 파르르 떨어댔다.
그런 녀석의 위에 올라가 천강은 흑색 몽둥이를 빼 들었다. 그리고는 힘껏 내려쳤다.
쿠구구구구.
"이야. 사신도 초주검으로 만드는 일격인데 흠집도 안 나네?"
대체 얼마나 단단한 거야?
"그렇다면……."
천강이 머리 위로 몽둥이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힘껏 내리치며 달포 전 익혔던 기술을 사용했다.
막힌 굴을 시원하게 뚫었던 그 기술을. 조금은 편하고 가볍게.
지천뇌공.
크와아아아-
땅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괴물의 비명이 거대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천강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확실히 다른 이들이 못 잡을 만하네."
이 일격에 겨우 조금의 상처가 나는 정도라니.
천강의 표정과 자신의 상처를 슥 한 번 살펴본 괴물이 미소를 지었다. 아프긴 하지만, 방금 같은 위력을 여러 번 쓰진 못할 것이라 확신한 거였다.
"웃어? 하……. 내가 웬만하면 곱게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그런 음흉한 생각은 은밀히 간직하고 있어야지,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천강이 몽둥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자리를 이동해 녀석의 두 다리 사이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곧바로 몽둥이가 수직으로 들어 올려졌다.
"크, 크륵?"
뭔가를 깨닫고는 당황한 녀석.
천강의 몽둥이가 놈의 가랑이 사이 고간을 향해 그대로 낙하했다.
"하나!"
쿠구구구구.
"크오오오오!"
"어때? 안마받는 느낌이지? 더 웃어보라고."
내기를 빨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녀석이 천강을 보며 눈동자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만해달라는 의사였다. 그러나 천강의 시선은 오직 녀석의 고간에만 꽂혀있었다.
"방금은 어깨 푸느라 좀 살살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간다. 어디 네가 죽는지 내가 지치는지 한번 해보자고."
살아생전 괴짜라고 불린 것답게 쓸데없는 부분에서 호승심을 드러내는 천강.
그의 손목이 머리 위에서 뱅글뱅글 회전했다. 그에 따라 흑색 절굿공이가 원을 그리며 허공에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자, 그럼 간다."
가볍게 손목을 푼 천강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내려쳤다.
"둘! 셋! 넷!"
쿵. 쿵. 쿠구구구구.
괴물의 비명. 천강의 옅은 웃음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그 진동은 약 세 시진(時辰)가량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