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1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17화
117화. 초아의 행방
여울나무 숲 회의실.
기다란 상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실시간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들은 상석에 앉은 투파창귀에게 예를 차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좌중을 한 번 슥 둘러본 투파창귀가 턱짓을 했다.
"다 모인 것 같군.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개최자는 용무를 말하라."
적삼혈마보다 세 단계쯤 밑에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격은 크고 살이 뒤룩뒤룩 찐 그는 투파창귀에게 공손히 예를 차리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 우휘전마가 한마디 하겠소이다. 며칠 전, 우리는 적삼혈마의 계획에 동참해 의미 없는 땀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쉬지도 못한 채 전투 태세를 갖춰야 했지요."
우휘전마가 팔을 크게 펼쳤다. 그는 한 차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적삼혈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이오? 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번 한 번이 아닙니다. 최근 적삼혈마가 시도하는 일마다 전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긴. 추가예산을 따내는 것도 실패하고, 최근엔 예산을 어디다 가져다 쓰는지 허리띠를 심히 졸라대긴 했지."
"그뿐인가? 사신 쪽은 성과가 있단 말만 무성하지 실제로 보진 못하지 않았나?"
"뒤로 해 먹고 있단 것이겠지."
웅성웅성. 사람들의 날 선 시선이 적삼혈마를 향한다. 유일하게 청청만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걸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우휘전마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수많은 실패한 사건들. 그런데 적삼혈마, 그는 마치 소교주가 대단한 양 핑계를 댔습니다.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은 우리는 협조까지 했지요. 그래도 뭐 거기까진 이해합니다."
그는 끓는 기름 위에 불씨를 떨어뜨렸다.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우리 모두를 움직였음에도 또 실패를 하다니요. 심지어 이번 일로 1년 치 예산의 손실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이, 일 년 치 예산?!"
가만히 전방만을 바라보던 적삼혈마의 시선이 처음으로 우휘전마에게 향했다. 거구의 사내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씨익 미소 지었다.
'……내부에 쥐새끼가 있었군요.'
투파창귀와 호접일검은 아니다. 영약에 관련된 이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으니 그들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심문하던 이들 중에 있다는 것.
'기어이 날개를 달고 용이 되고 싶단 건가요.'
우휘전마가 소리 높여 외쳤다.
"그에 저 우휘전마는 이 자리서 어르신께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적삼혈마에게 실패한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주시옵소서!"
"책임을 물어주시옵소서!"
턱을 괸 채 가만히 지켜보던 투파창귀가 팔을 풀었다. 그의 움직임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적삼혈마."
"예, 어르신."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금까지의 일들에 대해 책임을 통감합니다. 여울나무 숲 총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손실을 입힌 것에 대해서도 제 사비를 전부 털어 메워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래. 네 사비를 다 털어도 충당은 안 되겠지. 넌 지금껏 뒤로 빼돌린 게 없는 놈이니까 말이다."
투파창귀가 콕 짚어 그 부분을 언급하자, 우휘전마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주변 몇몇 또한 마찬가지.
"알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실패한 일들에 대한 책임은 그렇게 끝내는 걸로 하지. 혹여나 다른 의견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적막이 회의실 내로 흘렀다.
"다들 동의하는 모양이군. 그럼 현 시간부로 적삼혈마의 총책임자 직위를 박탈한다."
적삼혈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총책임자 자리가 공석이로군. 누구 하고 싶은 사람 있나?"
서로 눈치를 보는 사람들.
여울나무 숲 총책임자라는 위치는 2인자의 자리다.
앉는 순간 막강한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마교의 반수에 해당하는 전력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러한 권력을.
그러나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휘전마였다.
"투파창귀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적삼혈마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잘할 수 있겠나? 네가 맡던 일과 많이 다를 텐데."
"일이야 결국 사람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간자들을 포섭해온 일을 오랫동안 해온 만큼, 사람 부리는 데에는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해봐라."
회의가 끝이 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진다. 호접일검은 적삼혈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적삼혈마님. 왜 혼자 다 떠안으신 겁니까? 책임을 나눠서 지면 되지 않았습니까? 특히나 예산의 경우엔 투파창귀님의 지시 아닙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생뚱맞았다.
"우리 여울나무는 아직 썩지 않았습니다."
"예?"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끝을 모르지요."
큰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특히나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걸 탐할 때는 더더욱.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호접일검에게 적삼혈마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그의 실눈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 번 정리할 때가 됐긴 했습니다. 썩어가는 부분들을.'
***
"축하드립니다, 우휘전마!"
"축하드리오!"
우휘전마의 거처.
십여 명의 마두들이 총책임자가 된 그를 축하하며 잔을 높이 들었다. 우휘전마가 껄껄 웃으며 예를 표했다.
"하핫. 모두들 감사합니다."
"이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간자들을 포섭하는 일을 도맡아 하던 자네가 여울나무 총책임자라니."
"그러게 말일세. 대체 몇 단계를 건너뛴 것인가?"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의 얼굴엔 아쉬움이 맴돌았다.
그들은 투파창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하겠다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우휘전마처럼 조금의 뻔뻔함과 자신감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여울나무 2인자의 자리가 본인들의 것이 됐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잘 아는 우휘전마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하핫. 봤느냐? 세상은 신속하고 용감한 자의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이나 잔뜩 하고 있으니 기회를 놓치는 거다, 멍청한 것들.'
그러나 속내들이야 어찌 됐든 서로 웃으며 덕담을 나누는 사람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소교주가 정말 보통이 아니긴 한 모양이오."
"그러겠지. 그러니 저 여우 같은 적삼혈마가 이렇다 할 반격도 못 한 채 얻어맞은 거 아니겠나?"
"그것참 문제는 문제인데……. 우휘전마. 아니, 우리 총책임자님."
"껄껄.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럴 수야 없지. 오늘부터는 엄연히 상관인데."
손을 휘휘 저으면서도 우휘전마의 이가 환히 드러났다. 상대 또한 이를 드러내 웃으며 물었다.
"새로운 총책임자님 계획은 뭔가? 어찌 됐든 소교주를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너구리 같은 것들.
소교주가 뻔히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빌미로 적삼혈마를 몰아세우는데 동조한 건 그 자리가 탐내서다.
그리고 지금 저 발언 또한 마찬가지.
소교주를 처리할 대안과 능력이 없다면, 알아서 물러나란 의미였다.
우휘전마가 의자에 몸을 실으며 역으로 물었다.
"제가 어느 직책에 있었는지 잊으셨습니까?"
"음. 간자와 배신자들을 회유하고 만드는 자리 아닌가?"
"그렇지요. 제가 그 일을 하면서 꾸준히 안면을 터온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인데 그러는가?"
사람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놀라지 마십시오. 바로, 암운사신입니다."
"암운사신이면…… 중립 세력의 그 암운사신?"
"맞습니다."
모인 이들의 눈이 단번에 휘둥그레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암운사신이 누구인가.
현 마교 서열 5위이자, 교주, 괴기나한, 그리고 신교의 영웅인 흑살마신과 같은 세대의 인물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암살하지 못 할 이가 없다 여기며, 중원에는 암혼, 마교에는 암운사신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심지어 50년 안에 암존(暗尊)을 넘어서지 않을까 추측도 돌았다.
"그런 이와 관계를 다져왔단 말인가?"
"다져온 정도가 아닙니다. 곧 우리 쪽으로 전향할 것입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교주 세력도 못 이뤄낸 성과다. 그런 암운사신을 포섭해오기만 한다면, 그는 총책임자의 역량을 증명한 것과 같았다.
"전향해온다면 그때 요구할 생각입니다. 여울나무에 소속됐다는 걸 검증하기 위한 시험으로, 소교주 암살을 말입니다."
그때 이성을 차린 누군가가 정곡을 짚었다.
"그런데 그게 언제인가가 문제 아니겠는가. 교주와의 전쟁은 어찌 됐든 코앞으로 다가왔네만."
"그렇지. 우리 새 총책임자의 말에 토를 달려는 건 아니지만, 투파창귀님 성격상 당장 결과를 내놓으라 닦달하실 것이네."
이 새끼들이?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쨌든 결과는 없고 말 뿐이니까.
우휘전마가 하하 웃으며 그 말들을 받았다.
"아무래도 제 말이 너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군요. 이해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 앞에서 우휘전마는 검지를 치켜세우며 공약했다.
"제가 내일 당장 암운사신을 찾아가서 쓸 만한 것들을 얻어오겠습니다. 암운사신도 저희 쪽에 마음이 기운 만큼, 절 내치는 대신 무언가라도 내어줄 것입니다."
***
암운곡 지하수로.
고요히 흐르는 물 위로 파문이 인다. 하류로 소년이 들어서자, 스르륵-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아와 그 앞에 부복했다.
"주군."
"어, 그래. 좀 알아봤어?"
"예. 현재 초아라는 마인은 마교 서열 5위인 암운사신의 지하에 갇혀있다 합니다."
"왜?"
"주변인들의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암운곡의 소교주…… 즉, 주군에게 본가의 무공을 가르쳐준 죄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조심히 사용한다고 했는데, 걸린 건가? 대체 언제? 어디서?
그에 대해 들은 게 있나 묻자, 실력자답게 일귀의 입에서 원하는 정보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암운사신이 우연히 열목 폭포를 지나가다 주군이 사용하는 걸 본 모양입니다."
아, 그때…….
기억난다. 독목신공에 대해 알아본다고 화정마녀와 싸울 때, 암운신공을 사용하긴 했었다. 정말 잠깐 사용했었던 건데 그걸 들킬 줄이야.
'야, 너희들! 싸움 중에 누군가 지켜보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 흠흠. 그땐 아무런 기척을 못 느꼈다.
- 나도 그러하다. 절대 싸움 구경하다 못 느낀 게 아니다.
-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전 확실히 못 느꼈어요, 소년.
음. 막야가 못 느꼈다면, 아무래도 암운신공을 사용해 기척과 내기를 숨겼던 모양이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주군?"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직접 찾아가 봐야지."
주태 녀석을 보러 가는 게 좀 불편하지만, 그동안 초아에게 받은 게 많지 않은가.
천강은 앞서 나아가는 일귀를 따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