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1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14화
114화. 흑철마괴
"헉. 허억."
거친 숨소리가 흐르는 물소리에 파묻혔다. 흑철마괴와 비격창마는 서로 등을 맞댄 채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쪽에 몇 남았지?"
"후욱. 훅. 여섯입니다, 선배님."
"이쪽에 여덟이 남았으니, 아직도 열넷이 남은 셈이로군."
스물일곱의 적 중 이제 겨우 반을 쓰러뜨린 상황. 그러나 두 사람의 내기는 어느덧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안 되겠다. 작전을 변경한다."
"무엇입니까?"
"내가 길을 틀 터이니 넌 바로 하류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라. 지금쯤이면 교주님께서 올라오고 계실 것이다."
"그럼 제가 남겠습니다. 선배님께서 가시지요."
"미안하지만 다리를 깊게 베여 빠른 이동이 불가능하다."
슬쩍 시선을 돌려 흑철마괴의 오른 다리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나오는 게, 슬슬 내기도 몸 상태도 한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버티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둘 다 개죽음을 당하느니 한 명이라도 탈출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노려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흑철마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우리가 누구지?"
"친위대입니다."
"죽기 전, 교주님께 이 사실을 상세히 알려야 한다. 네 맡은 바를 온전히 행하라."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계획.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 비격창마와 흑철마괴가 움직였다.
하류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두 사람을 향해 사신들이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앞서가던 비격창마가 장창을 크게 휘둘렀다.
쿠콰콰콰콰-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강한 기운.
좌우로 갈라서서 길을 트는 그 사이로 비격창마와 흑철마괴가 빠져나갔다.
"가라!"
비격창마가 하류를 향해 내달렸다. 그 사이 흑철마괴는 몸을 뒤로 돌리고 양팔을 뒤로 크게 젖혔다.
'후배 놈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흑철마괴의 두 팔에 강한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평소의 검은 기운이 아닌, 피같이 붉은 기운.
인간에겐 두 종류의 기가 있다.
자연의 기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내기와 선천적으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생기.
이 생명의 기운을 끌어 쓴다면 일시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일격이 후배 놈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흑철마괴의 두 주먹이 대지를 후려쳤다. 그 순간 땅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땅덩어리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쿠콰콰콰콰-
폭발 범위 내에 있던 모든 생물들이 폭발의 여파로 하늘 위로 솟구치고, 오직 유일하게 비격창마만이 범위에서 벗어나 유유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선배님…….'
경공을 펼치는 두 다리가 무거워진다.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고개가 자꾸만 뒤로 움직였다.
그러나 다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일격으로도 적들은 큰 타격을 받지 않은 채 빠르게 뒤쫓아 오고 있었다.
'내기가 거의 다 떨어졌어. 이대로는 위험하다.'
과연 무사히 교주님이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선배님의 희생이 헛되이 돼서는 안 되는데.
나약한 마음을 애써 털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런 순간이었다.
싸아아-
돌연 하늘 위에서 광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비격창마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를 에워싸던 사신들도 그 기운을 느끼고는 하나둘 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중원의 절대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괴수.
천산의 주인.
신교의 드높은 하늘.
천마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철마괴는 어디 있지?"
"……죄송합니다."
"이런 버러지들이……."
교주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비격창마의 몸이 하늘 위로 떠 오르고, 교주의 손엔 기이한 검 한 자루가 생성되었다.
"교주다."
"우리로는 감당할 수 없다."
"흩어져 도주한다."
사방으로 도망치는 적들. 천마의 손이 움직인 건 바로 그때였다.
천마신공 파검결 7식, 파멸지회.
쿠구구구구.
수백의 검격이 땅에 내려앉았다.
그 기세를 감당치 못한 대지는 움푹 가라앉았고, 그 위에 자리한 모든 생명체는 가루가 돼 땅과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이, 이것이 중원의 서쪽을 차지한 절대강자의 신위……!'
단 일격에, 열넷의 사신들은 도주도 못 하고 현장에서 그대로 먼지가 돼 사라졌다.
천마의 손이 펼쳐졌다. 그러자 들려있던 검이 스르륵 사라져 자취를 감췄다.
"……수고했다."
교주는 비격창마를 그림자 중 하나에게 맡기고는 암운곡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는 굴 밖으로 나와 모습을 비치는 흑학대신을 향해 호통을 쳤다.
"네 이노오옴!"
***
역린(逆鱗).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이 있다. 그것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그걸 건드린 이를 반드시 죽인다고 한다.
현 천마에게 역린은 바로 전대 교주의 음독.
멀쩡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이 시커멓게 변해 죽어버리고, 이후엔 홀로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온 천마였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과 같은 방법으로 소교주를 암살하려 했다? 그것도 같은 독을 써서?
비록 그 소교주가 대역에 불과하더라도, 그건 명백히 역린을 건드린 행동이었다. 그 분노를 흑학대신은 감당치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과연…….
"사, 살려주십시오, 교주님! 전 결코 아무 짓도 하지…… 끄아아아악!"
노인의 비명이 암운곡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끅. 끄억. 제, 제발! 소교주님은 멀쩡히 살아있습…… 끄어어억!"
노인의 비명이 수차례 울려 퍼졌다. 중간중간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는 했다.
"소교주님! 제발 나와서…… 해, 해명을 해 주십시오……! 소교주……. 끅. 끅."
그러나 굴 안에서 천강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에 맹익이 나타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교의 하늘을 뵙습니다."
"괴기나한.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우연히 이쪽 부근에서 일을 하다 싸우는 소리가 들려 와보니 소교주님이 합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합류하였습니다."
"소교주는 어디 있나?"
"몸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생포해둔 다른 이들도 있는데, 나머지도 이어서 추궁을 하시겠습니까?"
맹익은 천강과 오랜 기간 어울려 봤다. 그렇기에 그 심리와 행동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선배님은 저런 부류를 극히 싫어하시지. 아마 처리하기를 원하실 터.'
맹익의 말을 들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을 당장 내게로 데려와라."
천마의 검이 움직였다. 흑학대신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 천강이 있는 굴 앞으로 멈춰 섰다.
그걸 보고는 천강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미안. 아무리 나라도 분노한 교주 앞에 서는 건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이야.'
그동안 수없이 교주를 등쳐먹었다.
괜히 날 보고는, 그동안 해 먹은 걸 떠올리며 화를 낼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럴 땐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게 최고였다.
'그건 그렇고, 네 주인이 죽어버렸네?'
품속에 든 만년설삼을 쓰다듬는 소년.
자고로 주인이 사라진 물건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그러므로 이건 내 거.
천강이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 분노에 찬 천마의 검 아래, 암운곡 총책임자와 신입 교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래. 추태를 보였구나."
주위를 둘러본다. 마치 한 차례 비라도 온 듯, 사방에 음영이 진 흙으로 그득하다. 시체는 치웠으나 코끝으로 은은히 피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나 교주가 손을 한 차례 휘젓자, 지하수로의 물이 날아와 암운곡 바닥을 적시고 물러났다.
"독은? 어떻게 된 것이냐?"
"운이 좋았습니다. 다짜고짜 불러내 차를 권하기에 수상해 마시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았군."
"괴기나한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무려 화경이 아홉이다. 천강을 화경으로 생각하는 교주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강은 슬쩍 곁눈질로 교주의 표정을 확인했다.
'킁. 오늘은 안 되겠네.'
아직도 숨이 평온하지 못한 게,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 보상은 다음에 요구하도록 하자.
"무엇이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거라."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암운곡 교관들이 또 싹 다 교체되겠군요. 화경 고수 여덟을 이제 어디서 구한답니까."
"……아홉이다."
"예?"
내가 놓친 녀석이 하나 더 있었나?
"비격창마와 흑철마괴가 널 돕기 위해 올라오다 사신들의 습격을 받았다."
비격창마와 흑철마괴가?
"그중 흑철마괴가…… 사망했다."
천강의 시선이 교주를 정면으로 향했다. 교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보니 농이 아닌 것 같았다.
소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 스승님! 스승님……!
마교에 있다 보면 제 명을 못 채우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박질하다 죽어가는 곳이 이곳 마교니까.
그러나 남은 자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
'……무진이가 한동안은 힘들겠구나.'
무림에서 스승은 곧 아버지다. 그러나 마교에서 스승은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이곳에 끌려온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죽거나 혹은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이들이니까.
천강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들렸다. 마교의 하늘은 수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늘 그렇듯 푸르렀다.
'그날도 이리 화창한 날씨였지.'
왠지 모를 답답함에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그때, 천강의 눈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익숙한 기운. 익숙한 얼굴.
그림자가 지긴 했어도 분명했다. 흉터가 자욱한 남자가 암운곡 절벽 위에 서서 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령?'
- 아니에요, 소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건가.'
언젠가 들어본 적 있다. 죽음으로 위장한 뒤, 다른 활동을 시작하는 마인들을.
흑영대와 흑사대가 대표적으로 그러했다.
흑철마괴는 잠시 천강을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
"그럼 이만 가지."
어둠을 뒤집어쓴 것 같은 복식을 한 사내가 흑철마괴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암운곡을 벗어나더니, 이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암운곡 주변에서 경계를 서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 작영이 옆의 그림자에게 물었다.
"선배님. 저러면 흑철마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마 흑사대가 되어서 음지를 떠돌 것이다."
"운이 좋으면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설령 그런다 한들 저쪽에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네가 알아볼 수는 없을 거다. 그들의 은신술과 역용술은 중원 최고니까."
"저희도 저런 상황이 되면 흑사대가 되는 겁니까?"
그의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친위대는 흑사대로, 우리 같은 그림자는 흑영대로 배치된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그 밖의 선택지는요? 없는 겁니까?"
"없다. 실제로 죽거나 흑영대로 위장돼 배치되거나. 둘뿐이다."
작영의 시선이 흑철마괴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입술은 꾹 다물다 못해 질겅질겅 씹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