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9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97화
97화. 교룡득수
"할아버지!"
"그래그래. 매화야, 어떻게 암운곡 생활은 할 만하더냐?"
"응!"
사백동굴 앞. 흑철마괴와 다섯 아이가 한 노인을 만나고 있다.
야차같이 생긴 외모를 가진 인물. 화경의 고수임에도 얼굴과 나이 보정이 조금도 안 된 이 노인은 바로 마교의 모든 기계와 진식을 관리‧총괄하는 괴기나한이었다.
"인사해. 우리 할아버지야!"
그의 외모가 상당히 험상궂은지, 다른 세 아이는 쭈뼛거리며 꾸벅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나마 흑철마괴와 늘 생활한 무진만 무덤덤하고 자연스레 인사를 할 뿐.
그 모습을 포착한 노인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날 보고도 놀라지 않다니. 그것참 탐이 나는구먼."
"미안하지만 이 아인 내 제자다."
"자네는 옛적에 교주님과 차 마실 적에 제자 따윈 안 키운다 하지 않았었나?"
"그 없던 욕망마저 일으킬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하면 되겠군."
"하. 천하의 흑철마괴가 제자를 키우는 걸 다 볼 줄이야! 그래. 인원은 이게 다인가?"
3개 조는 물론, 수색조까지 모두 실종된 상황이다. 너무 숫자가 적은 것 아니냐는 표정에, 흑철마괴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름 실력 좀 있는 아이들로 데려왔다. 특히 내 제자의 실력은 초절정 두셋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정도. 아마 충분할 것이다."
"내기는 좁쌀만도 없어 보이네만?"
"위급한 상황이 되면 알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크하핫. 그래. 자네가 그리 자신하니 내 한번 믿어봄세. 아무튼 고맙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내 직접 왔으니 하루 안엔 끝나지 않겠나?"
"그럼 끝나고 암운곡에서 보도록 하지."
손녀딸의 손을 잡은 맹익이 천천히 앞서 걸어간다. 나머지 네 아이들도 그 뒤를 따라간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던 흑철마괴 또한 찬찬히 사백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군.'
***
"와아. 여기는 어디인가요?"
평소 흑철마괴의 얼굴을 오고가며 몇 차례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매화네 할아버지라 불린 이가 꽤 살갑게 대해준 탓일까.
어느 정도 괴기나한의 괴팍한 인상에 적응을 끝낸 아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맹익은 앞서 동굴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이곳은 천산의 비밀통로 중 하나니라."
"비밀통로!"
세 아이의 눈이 빛을 발했다. 무진과 매화를 제외한 그 셋은 이곳 천산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비밀통로를 들어가 보지 못한 탓이었다.
"천산에는 이런 곳이 많나요?"
"암. 많지.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천 개도 넘는다 할 수 있다."
"와아아."
천산은 매우 크고 높다란 산이다. 그리고 오래된 산이기도 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신교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이 천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노력했고, 위아래로 이래저래 손을 많이 대놓았다.
천산 꼭대기에 있는 신전에서부터 제일 뿌리에 가까운 풍미관까지.
"비밀통로뿐만 아니라 각종 기계와 진법, 진식까지 다 합친다면 능히 만 개 가까이 될 것이니라."
만 개? 무덤덤하던 무진까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걸 본 매화가 묻는다.
"무진이 네가 놀라는 건 첨 보네. 왜?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어?"
"어. 내가 형님에게 듣기론 풍미관 다음으로 인원수가 적은 곳이 진법‧기계부문이라고 들었거든. 그런데 그 많은 걸 다 관리한다고 하니까……."
단순히 숫자에 놀란 줄 알고, 어른스러워도 애는 애구나 싶어 물어봤던 매화의 입이 궁해졌다. 반대로 맹익의 눈은 호선을 그렸다.
'과연…… 흑철마괴가 제자로 들였다고 하더니, 생각이 전혀 어린애답지 않구먼.'
은근 탐이 난다. 그에 맹익은 소년에게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했다.
"근데 네 형님이란 건 누구냐? 마교에 대해 그리 잘 알 만한 이가 네 또래엔 없을 것인데?"
"할아버지. 천강이라고 있어. 굉장히 특이한 애야."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라 이건지, 소년과 노인 사이로 매화가 빠르게 끼어들며 대신 답했다.
"정말 희한한 애라니까? 쥐 굴 졸업관문 때 비밀통로를 이용하지 않나, 묵범귀영 기록을 갱신하기도 하고, 지금은 무려 초절정 경지에 도달했대."
아, 소교주 대역을 말하는 모양이구먼.
그 소년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손녀딸이 말한 그 모든 사실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하기보단, 그동안 수많은 기행과 행보를 보여준 만큼 특이점 하나 더 가지고 있다 해서 이상할 게 없단 의미였다.
그러나 그다음 나오는 손녀딸의 말에 맹익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매화가 슬쩍 다가와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심지어 흑이끼에 대해서도 알고 있더라고."
"……참말이냐?"
"응. 암운곡에 들어오자마자 그거부터 채취해 먹더라니깐?"
흑이끼. 어릴 적 자신과 암운사신, 그리고 흑살마신 셋이서 영약 창고를 털다 걸려 벌을 받다가 정말 우연히 발견한 수중식물.
그것의 존재를 아는 이는 위 셋이 전부였다.
물론, 이후 암운사신은 자신의 후계자에게, 맹익 자신은 아들과 손녀딸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그 외에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암운곡에 오자마자 채취해 먹었다고? 천산에만 자라나는 그 희귀식물을?'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런저런 가정이 세워졌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제일 그럴듯한 건, 암운사신이나 그 후계자가 다른 이에게 발설했거나 혹은 흑살마신이 누군가에게 말했다는 것.
'선배님…….'
생각이 흑살마신에 미치자, 맹익의 사고는 멈춰 섰다.
5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야광석의 은은한 초록빛 아래 어둠 속을 나아가자 왠지 암운곡에서의 일들이 불과 엊그제 일마냥 새록새록 떠올랐다.
- 야, 땡추. 빨리 안 따라오냐?
- 잘 좀 해봐. 너 이런 거 잘하잖아.
- 늦길래 직접 데리러 왔다. 별일 없지?
"……버지? 할아버지?"
"으응? 왜 그러니, 매화야?"
"갑자기 길이 막혔어."
고개를 든다. 굳건히 앞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 보인다.
"잠깐 뒤로 물러나 있거라."
바위 위에 손을 대고는 노인은 능숙하게 내기를 움직였다. 그러자 이내 해독된 기관 진식이 빛을 발하며 바위를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 앞에 드러난 거대한 지하수로.
노인은 들고 온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걸 본 아이들은 저마다 챙겨들고 있던 횃불을 꺼내, 불을 옮겨 받았다.
붉고 노란 불이 어둠을 걷어내고 주위를 밝히운다.
"이리들 나오거라. 이제부터는 물속을 지나가야 한다."
"예!"
짙은 어둠. 습한 기운이 가득한 굴을 횃불의 작은 빛으로 밝히며, 맹익과 아이들은 지하수로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서서히 닫히는 바위 위로는 깨알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구역 189번』
***
여울나무 숲, 총책임자의 사무실.
한 사내가 들어와 허리를 숙인다. 호접일검이었다. 그는 주변을 슥 한번 둘러보더니, 적삼혈마가 권하는 차를 받으며 말했다.
"오늘도 굉장히 바쁘시군요."
"예. 저번에 두 어르신께서 제 사무실에서 한판 하시는 바람에…… 정리해두었던 자료가 모조리 훼손 되서 말입니다."
"윽.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요."
두 현경의 싸움. 당시 외부에 나가 있었던 호접일검은 멀찍이서나마 보긴 했다. 워낙에 흉흉한 기운과 큰 폭음이 일었기에 적의 공습인가 의심까지 했었다.
그런데 고작 두 명의 인간이 벌인 일이라니. 역시 현경은 다르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호접일검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적삼혈마께서 적적해 하지 않으실까 하여, 옆에서 좀 거들 겸 왔습니다."
"하핫. 이번 주 내내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말만으로 충분합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이것 마저 마시고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에 적삼혈마가 감사를 표하는 그때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는 누군가 들어와 보고했다.
"적삼혈마님,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지요."
"기계‧진식부문에서 다시 그곳을 수리하러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이번엔 괴기나한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적삼혈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괴기나한이 직접 들어갔단 말입니까?"
"예. 암운곡에서 아이 다섯을 차출 받아 들어갔다 합니다."
"이거…… 생각보다 빠르게 대어를 잡게 생겼군요."
이전부터 사사건건 방해가 되던 그 늙은이를 어떻게 없앨까 고심하던 차였다. 그에 만든 함정이었다.
그래도 목표가 걸려들 때까지는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리 빨리 나설 줄이야.
"예상보다 성격이 더 화끈하군요. 지금 바로 가서, 뇌명신창 님에게 전하십시오. 때가 도래했으니, 지금 즉시 그 열매를 확인하셨으면 좋겠다고요."
"명을 받듭니다."
보고자가 자리를 비우자,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호접일검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189번 구역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던데, 거기 뭐가 있습니까?"
"189번 구역 자체에는 별다른 게 없습니다. 다만 조금 하류로 내려가면 굉장한 것이 있지요. 후후."
"굉장한 것이라면……?"
자리에서 일어난 적삼혈마가 찻잔의 옆에 톡 손대었다. 그러자 찻잔에 담긴 물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허공 위로 쭉 떠오르기 시작했다.
"교룡득수(蛟龍得水)라는 말을 아십니까?"
"하핫. 잘 모르겠습니다. 한수 가르쳐 주시지요."
"북조 후위 무제 때 일입니다. 당시 무명소졸이었던 양대안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때를 만나, 자신의 기량을 펼쳐 군주(軍主)로 발탁됐지요. 그러며 그가 한 말입니다. '지금의 나는 교룡이 물을 얻은 것과도 같다.'
찻잔에서 적삼혈마의 손이 떨어진다. 그러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물이 도로 찻잔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189번 구역 하류에는 아주 오래된 뱀이 살고 있습니다."
"뱀…… 말입니까?"
"그냥 뱀이 아닙니다. 천년이 다 되어 곧 승천할 뱀이지요."
"허. 그런 영물이 지하수로에 숨어 있다니……. 잠깐. 혹시 그럼 얼마 전 그 300명이 죽은 것도?"
"예. 소교주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도리어 그것에게 당한 거지요. 아마 소교주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소교주가 그 정도로 음흉한 간계를 지닌 인물이라는 걸.
그저 소년이라 생각하고 일을 진행해왔으니…… 그동안의 일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최근 그것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더군요."
"예? 어째섭니까?"
"배가 고픈 탓이겠지요. 혹은 승천할 날이 가까워졌거나. 아무튼 이번엔 저희가 놈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녀석을 통해 그동안 귀찮았던 것들을 단번에 처리할 생각입니다."
기계‧진식 부문은 늘 여울나무에겐 계륵이었다.
그곳 우두머리인 괴기나한의 지배력이 너무도 뛰어난 나머지, 몇십 년이 지나도록 회유에 단 한 명도 성공하질 못했고. 그로 인해 적인 걸 알면서도 늘 그들을 아군 중심부 안쪽까지 들여보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쳐낼 수도 없는 게, 당장 수도(水道)부터 해서 각종 편리 시설들을 총괄하는 게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머리를 쳐, 그 지배력을 없앤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요.'
회유되는 이들이 생길 테고, 운이 좋다면 이전 풍미관처럼 기계‧진식 부문을 먹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된다면 상황 역전. 교룡득수.
교주 쪽 진영의 정보를 대놓고 빼 올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승천할 일만 남았다 봐도 무방하리라.
적삼혈마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