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7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74화
74화. 크게 한 건 해먹다
"적삼혈마님!"
"예. 무슨 일입니까, 호접일검?"
"적삼혈마님, 들으셨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실눈의 사내가 고개를 들자, 호접일검이 뛰어온 이유를 속사포로 쏟아내었다.
"지금 하급 마인들 사이로 은밀히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아니 글쎄 이번 쥐 굴에 진짜 소교주가 있답니다."
"그게 무슨……."
"저희가 알고 있던 암운곡의 그 소교주는 가짜랍니다!"
"놈이 가짜다?"
적삼혈마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습니다. 최근 올라오는 보고들을 보면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특히 2개월 전 올라왔던 보고. 그때의 내용도 지금 소문과 같았다.
- 현재 암운곡에 있는 소교주는 가짜다. 진짜는 2개월 뒤 쥐 굴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
물론 간자(間者)들이 보내온 보고라 마냥 신뢰할 순 없었고, 그저 그냥 속는 셈 치고 교주의 최측근들에게 사람을 붙인 게 다였지만.
'그로 인해 몇몇 은신처를 발견할 수 있었지요.'
아무튼, 지금 소교주가 가짜일 수도 있단 의구심은 진즉에 있었다.
제일 그것이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무력.
평범한 암살자야 그렇다 쳐도, 비밀리에 만든 사신으로부터 살아남고. 이후엔 무영삼귀의 암살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건 절대 열 살짜리 아이가 보일 수 없는 기행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소교주가 처음부터 가짜였다면?
'어쩌면 반로환동한 고수를 가짜신분으로 숨겨 우리의 반응을 미리 떠본 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화살받이를 구해놓은 걸 수도 있고 말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적삼혈마님. 소문이 도는 속도가 예상을 훨씬 초월합니다. 지금쯤이면 교주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 소교주를 빼돌리기 전에 서둘러 쥐 굴 주변에 인력을 배치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이 적살혈마의 발목을 붙잡았다.
만약 이 모든 게 함정이라면? 이미 교주 쪽은 준비가 끝났고, 싸움을 걸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병력을 끌고 나오길 바라는 거라면?
"적삼혈마님?"
"……병력들을 이끌고 가십시오."
"예!"
"대신 쥐 굴 너무 가까이 붙지 마시고, 멀찍이 떨어져 에워싸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놓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명분을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확신이 오면 제가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만약 쥐 굴에 든 것이 진짜라면, 둘러싸는 모양새만 갖추어도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급하게 책임자를 교체한다든지 같은.
***
소문은 점점 무성해져 갔다. 그에 따라 여울나무 측의 움직임도 관측됐다.
다만 교주의 귀에 닿을 즈음에는 이미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교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지금이라도 소교주를 빼낼 순 없겠는가?"
"불가능합니다. 쥐 굴 주위로 벌써 간자들이 빽빽이 진을 쳤습니다. 그 너머로는 병력들이 자리를 잡았고요. 여기서 빼낸다면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꼴입니다. 설령 무사히 빠져나간다 한들 이후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습니다."
"후우. 쥐 굴 책임자는 어떻게 되었나?"
"총책임자는 믿을 만하나, 나머지 둘이 신분이 애매합니다. 혹시나 하여 대놓고 저희 쪽 사람들을 밀어 넣을 순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교는 다 암운곡 출신이라는 점.
"쥐 굴 훈련이 시작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나흘입니다. 총책임자는 이미 들어섰고, 사흘 후면 배정 받은 다른 책임자들도 출발할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삼 일뿐.
그 전에 소문을 잠재워야만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지체할 이유가 없다.
깍지 낀 손가락들 너머로 천마의 안광이 번뜩였다.
"소년을 불러주게. 단둘이 이야기 좀 나눠봐야겠네."
***
"인사드립니다, 천강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음? 그런데 왠지 표정이 좀 안 좋으십니다?"
뭘 알고 묻는 것인가?
천마는 고요히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천강은 능청맞게 눈을 끔벅였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 끔벅끔벅.
'후우. 어린애한테 뭐하는 짓인지……. 빨리 이 일을 처리해야겠군. 이러다간 의심만 늘겠어.'
교주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렇군요. 잘 해결됐길 바랍니다, 교주님."
"고맙군. 그건 그렇고, 내 자네를 부른 이유는 말이네……."
그러나 말을 하던 교주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돌연 소년의 눈이 밑을 향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을 따라 내린다. 소년의 눈길이 정확히 교주의 찻잔을 향하고 있다.
"……차 한 잔 하겠느냐?"
"감사합니다."
"근데 요전번에 말하길, 그다지 여유로운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 않았던가?"
"예, 그랬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교주님께서 직접 권하신 차인데, 제가 너무 예의 없게 거절한 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소년이 방긋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유가 없어도 한 번 가져볼 생각입니다."
"……그렇군."
두 사람이 차를 음미한다. 그런데 교주는 꽤 조급하고, 소년은 반대로 여유롭다.
천강은 차를 반 이상 비운 뒤에야 운을 떼었다.
"그런데 교주님,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것인지……."
"그렇지. 내 바쁜 널 데리고 차나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교주가 소년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협상이 결렬된 부분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협상이라면…… 소교주의 화살받이 건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그래. 만약 내 아이의 든든한 화살받이가 되어준다면, 일전에 네가 말했던 걸 들어주도록 하마. 천산의 보고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그 말을 하는 교주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곳을 관리하는 노인과 흑영대는 마교 사람이기는 하나 독자적인 세력. 그건 그만큼 교주인 자신이 그들에게 빚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천마는 소년의 제안을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내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천마나 교주이기 이전에 한 명의 아버지. 자식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싫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답변에 천마는 곧바로 되물었다.
"왜 싫은 거지? 천산의 보고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는 건, 많은 걸 의미한다. 그곳에 계신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구할 수 있고, 천산의 보고에 있는 물건도 네가 원한다면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단 뜻이다."
"그래도 싫습니다."
"그런……! 이것은 네가 먼저 제안한 게 아니었더냐?"
천마로서는 그저 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천강이라는 해답이 사라져버린 그의 머릿속은 금세 복잡해졌다. 냉정한 현실이 그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쥐 굴에 인력을 강제로 배치해야 하나? 몇몇 주요직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교주가 크는 데에만 걸리는 시간은 자그마치 6년.
그 기간 동안 배신자 놈들에게 마교를 먹히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혹여나 전대 천마처럼 음독을 당하지는 않을…….
그러나 천마는 천마. 그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는 소년을 쳐다봤다.
'첫 협상 때, 죽을 위험이 있는 데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던 소년이다. 지금껏 어린애로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선입견에 싸여 잘못 판단한 건지도 모른다.'
만약 눈앞에 자리한 이가 소년이 아니라 어른이라면, 거절한 이유는 단 하나.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기 위해서.
"혹여나 원하는 것이 바뀌었느냐?"
그제야 잠자코 교주를 바라보던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교주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암살자들이 꽤 자주 찾아옵니다."
"암살자가? 암운곡에 말이냐?"
"예. 암운곡 뿐만 아니라, 기경만회 때도. 가을걷이 때도. 쉴 새 없이 오더군요. 잠잘 틈도 주지 않고 말이죠."
이해한다. 굳이 마교의 과거 기록을 떠올려볼 필요도 없이, 지금의 적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천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는 현경급 고수와 맞닥뜨린 적도 있었습니다."
"뭐라?!"
현경이라고?!
현재 마교에 있는 현경은 교주 자신을 제외하면 총 넷.
하나하나가 영향력과 권세가 어마무시하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이 움직였다는 건 많은 걸 시사했다.
'혹시나 거짓을 말하는 건…….'
천마가 소년의 눈을 뚫어지게 살펴본다.
눈빛도 기운도 지극히 평온하다. 거짓이 아니다.
'말도 안 돼. 현경이라니.'
교주의 얼굴에 절망감이 올라온 걸 본 소년은 속으로 작게 미소 지었다.
'뭐…… 난 어디까지나 모용진을 이야기한 거지만.'
이성을 되찾아가던 천마를 다시금 흔들어놓는데 성공한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상황이 상황인지라…… 추가로 더 받길 원합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현경급 고수가 끼어든 판에 소년이 요구하는 건 필히 더 큰 것일 터. 그러나 그걸 예상했음에도 대답을 들은 교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천산의 보고, 전 층 열람권을 원합니다."
"무, 뭐라……?"
한 번이라도 그곳에 들어가 본 이라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천산의 보고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건, 관리자가 있는 0층과 무공서 단약들이 자리한 1층까지를 의미한다.
그 위 2층에는 각종 장비들이 자리해 있으며, 3층 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요구조건이 필요해 아직 천마 본인조차도 들어가 보질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걸 요구한 것이다. 모든 층을 다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흠흠. 그것은 좀……."
"교주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무려 현경입니다. 자녀분께서 과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요?"
***
한 소년이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간다.
마치 평지 걷듯 편하게 꼭대기까지 올라선 소년은 이내 한 건물을 향해 쭉쭉 걸어 나갔다. 그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 그대는?
소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온다.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 천강이다. 오늘부터 이곳 천산의 보고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인간."
그러면서 소년은 금일 미시(未時)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세 시진 전.
"교주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무려 현경입니다. 자녀분께서 과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느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일 테고.
"저 같은 대역, 어디 가서 구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고요."
"하늘의 뜻?"
"예. 아들을 사랑하는 교주님의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이지요. 전 그 사이에서 그 혜택을 좀 받는 것뿐이고요."
그러면서 소년은 천마에게 훅 한마디 던졌다.
"대체 뭘 주저하시는 겁니까?"
"뭐?"
"그동안 많이 계산하셨을 것 아닙니까? 정말 자녀를 사랑하신다면, 이번엔 다른 거 생각마시고 속 시원히 달리십시오."
"하, 하하하하핫!"
교주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소년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다.
약 50년 동안 살얼음 걷듯 걸어온 길.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는 주위를 잘 살펴야 했고, 그래서인지 그는 신교의 우두머리임에도 늘 장사꾼이나 벼슬아치처럼 계산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과감히 권력을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하거늘…….'
한참을 그리 광소를 토해낸 그는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소년에게 말했다.
"정말 욕심도 끝이 없고 대범한 녀석이로다. 교주인 내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건 물론, 사지(死地)로 들어서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니."
"뭐…… 제가 좀 간땡이가 붓긴 했지요. 그래도 생각 없이 무모한 건 아닙니다. 이래봬도 도망 다니는 재주는 좀 있거든요."
"넌 두렵지 않느냐? 죽는 것이?"
"사람 인생. 언젠가는 죽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저 그 길이만이 조금씩 다를 뿐.
그리고 천강은 이미 한 번 죽어본 상황. 그 두려움마저도 이젠 희미했다.
"후후후. 그래.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게 끝. 사실 너나 나나, 지금 상황에서 굳이 이런저런 자잘한 걸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적의 칼이 지척에 와 있는데 무얼 주저하리오.
천마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속 시원해 보였다. 마치…… 그래. 딱 사고치기 좋은 얼굴이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분명 자녀분과 함께 만수무강 하실 겁니다."
"대신 이 일은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덤까지 잘 끌고 가겠나이다."
그렇게 교주로부터 천산의 보고를 온전히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 천강이었다.
소년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는, 어딘가에 숨어있을 흑영대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혹시 저번처럼 막을 생각?"
- ……지나가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다시금 발을 옮긴다. 그런 소년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
"일귀 형님. 지시하신 모든 조치 다 끝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수고 많았다. 거처로 가서 좀 쉬어라."
"예."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이귀와 삼귀.
일귀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본 사건이 벌어지기 2개월 전을 떠올렸다.
'일귀.'
'예, 주군.'
'이번에 간자(間者) 신분을 확보했다고?'
'그렇습니다. 아직 저 하나뿐이지만, 3개월 이내에 아우들도 모두 획득할 것입니다.'
'그럼 그 신분을 이용해 여울나무 쪽에 소식 하나를 흘려주었으면 한다.'
'뭐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현재 암운곡에 있는 소교주는 가짜다. 진짜는 2개월 뒤 쥐 굴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
'왜 그런?'
'아아. 왠지 이렇게 하면 크게 한 건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회상을 끝낸 남자의 눈이 서서히 뜨인다.
여울나무 세력에게 정보를 제공, 소교주를 쥐 굴로 몰아넣고.
이후엔 소문으로 교주 몰이.
종국엔 자신의 가치 증명.
두 세력 사이에서 잃은 건 없고 원하는 건 곱절로 얻은 상황.
"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벌이셨다는 말인가?"
일귀의 입에서 나직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시,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