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7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71화
71화. 천마와의 만남
"하아. 지루하다. 어떻게 온통 산산산 뿐이냐."
천산의 서북에 위치한 어느 산자락. 네 마인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그들은 한창 밖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며 궁시렁궁시렁 떠들고 있었다.
"참아라. 3일 있다가 네 차례잖냐?"
"그야 그렇긴 하지만…… 휴가가 다가올수록 더더욱 버티기 힘들어지는 게 아주 죽겠습니다요."
"크으. 그건 그렇지."
"아, 나도 술 당긴다."
그들은 온통 풀때기만 그득한 산속을 지겹다는 듯 바라보다, 하나둘 자리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그런 그 때였다.
삐이이-
"야. 신호 왔다."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흩어지는 그림자들.
고요한 숲속으로, 뉘엿뉘엿 지는 붉은 태양빛을 맞으며 수레 세 대가 스윽 나타난다.
다그닥. 다그닥.
가림막이 쳐진 그것들은 미끄러지듯 쭉 길을 타고 올라오다, 거대한 나무가 가로막고 있는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어 섰다. 그때 제일 앞 수레에 타고 있던 마부가 고개를 들고는 나직이 말했다.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림자 넷. 한 명이 대표로 대답을 돌려주고, 다른 한 명이 내려가 나무를 옆으로 치워준다.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
사람 한 명이 자신보다 네 곱절은 더 큰 나무를 가볍게 치우는 그 행태가 놀라울 만하건만, 지켜보는 말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다시 발을 놀렸다.
일이 끝난 그림자들도 다시 모여 수다를 떨었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야?"
"나도 몰라. 그냥 위에서 암구호 대는 이가 있다면 통과시켜 주랬어."
쭉 길을 타고 천산으로 들어가는 마차. 그 길의 끝엔 어떤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마부의 옆으로 누군가 나타나 동승한다.
"오랜만이군, 풍월대주. 여전하구만. 기간에 딱 맞춰 등장하는 건."
"간만입니다, 흑귀."
"이번 물건들은 어떻소?"
"좋습니다. 이전과 동일합니다. 한 번 직접 보시죠."
그러나 고개를 젓는 남자.
"중원 최고의 실력자가 배달사고를 할 리는 없겠지. 물건을 빼돌리는 건 더더욱."
"좋게 봐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또 연락하도록 하지."
수레에서 내린 미안(美顔)의 남자가 찬찬히 동굴 밖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흑귀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 보니 귀한 단골이라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말입니다."
"조언?"
"조심하십시오. 최근 제 뒤를 은밀히 살피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정보가 샜거나 눈치를 챈 건지도 모릅니다."
"누군지 예상가는 이가 있나?"
"한 명 있죠."
풍월대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올라왔다.
"옛 마교의 망령."
그리고는 손을 흔들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중원 내 최고의 경공술을 가진 이답게 조금의 전조조차 없는 날쌘 몸놀림이었다.
흑귀는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묵범귀영의 등장이라……."
***
깊은 어둠 속.
또옥. 또옥.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직이 울리는 어느 굴 안.
한 소년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다.
"내가 곧 자연, 자연이 곧 나……."
그러길 잠시,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던 소년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목을 좌우로 풀기 시작했다.
"후우……. 짜증나는군."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주군."
"아냐. 네 탓이 아니다."
소년이 눈을 뜬다. 그러자 그 앞으로 복면을 쓴 한 남자가 나타나 부복했다. 그는 무영삼귀의 첫째 일귀였다.
"그래. 간만이네. 마교 내에는 잘 자리 잡았고?"
"예, 원래 저희가 하던 일이라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약 반년 전. 무영삼귀를 부하로 들인 천강은 그들에게 지시했다. 마교에 은밀히 파고들어 마인인 척 행세하라고.
'본격적으로 싸움을 하려면, 마교 내에도 내 눈과 귀는 필요할 테니까.'
자고로 싸움의 승패는 정보의 신속성과 정확성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마교의 상황과 교주 및 투파창귀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해 듣는다면, 위험도를 다소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득을 챙길 수 있으리라.
'그래도 꽤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반 년 만에 마교 깊숙이까지 자리를 잡다니.'
새삼 유능한 부하를 두게 되었음에 만족스러운 마음이 드는 천강이었다.
"잘했네.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잘 안 되시는 겁니까?"
"음?"
"표정이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으십니다."
"아아. 그냥. 현경의 깨달음에 진전이 없네."
무진의 혈을 잡아줄 때를 제외하고는 겨울 내내 앉아 있었는데도 이렇다 할 진보가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가르침을 주면 참 좋겠는데.'
순간 심심할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천산의 보고 현경이 생각났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의례적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흑영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는 것부터가 사실 그들이 많이 양보해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눈치 없이 더 다가가는 건, 그들을 욕보이는 짓이었다.
'그래도 너무 막막하군.'
천강이 옅은 한숨을 내쉬자 일귀가 응원하고 나섰다.
"걱정 마십시오. 주군이라면 금세 현경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하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넌 어때? 좀 진전이 있어?"
일귀 또한 화경 끝자락. 그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시로 사색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저 또한 막혀서 답을 못 찾고 있습니다."
"킁. 그렇구만. 힘내라고. 알지? 우리 둘 중에 누군가 먼저 현경에 도달하면……."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되는 즉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여 가 봐. 무진이 오는가 보다."
"예, 주군."
그리고 조금 있으니 정말로 어둠을 헤치고 한 소년이 나아왔다. 천강이 명상을 하고 있지 않자, 무진이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형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응. 무슨 일이야?"
"스승님께서 찾으십니다.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너희 스승이 날?"
천강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진의 뒤를 따랐다.
***
암운곡의 훈련지인 사백 동굴.
넓디넓은 공간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수련 중인 아이들이 보인다. 천강은 지나가다 마주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무진과 함께 동굴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열심이네?"
"예. 아무래도 반년 전 그 일이 워낙 충격이었잖습니까."
"하긴. 그렇겠지."
반년 전. 보름간의 가을걷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날.
여울나무를 이기고 추가 고기 보급에 모두가 신이 난 그 때, 그들에게 안 좋은 비보(悲報)가 들이닥쳤다.
"이런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게 너무도 미안하구나. 너희가 가을걷이를 하는 동안, 너희를 인도해주던 교관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
사건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외부 세력이 은밀히 천산에 들어왔는데, 휴가를 나서던 암운곡 교관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싸움이 일어났으나, 하필 그곳에 현경의 고수가 있는 바람에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고.
"그런……!"
"스, 스승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한날한시에 암운곡 교관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다니.
그로 인해 암운곡엔 삼일 간 곡소리가 울렸고, 그 슬픔은 약 한 달 여간 지속되었다.
이곳으로 끌려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팔려오거나 고아인 아이들. 그들에게 해당 교관들은 스승이자 아비였기 때문이다.
"근데 전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형님. 무려 화경이 여덟 분이었는데…···. 단 한 명에게 그리 당하다니요? 현경이 그 정도로 실력이 대단합니까?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을 만큼?"
"뭐 그렇지."
화경 열 명이 덤빈다한들 승리를 점칠 수 없는 괴물. 현경이란 그러한 존재다.
'특히나 그 때 그놈이라면 더 쉽지 않다고 봐야 한다.'
모용세가의 제일검 모용진.
비록 상성이 좋지 않은 천강을 만나 탈탈 털리긴 했지만, 같은 경지 이하로는 녀석을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타격을 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공격을 하는 족족 모조리 반사를 할 테니까.
두전성이(斗轉星移)란 그 정도로 막강한 무공이었다.
'사실상 거리를 벌리면서 두전성이만 써도 화경 여덟이서 할 수 있는 게 없지.'
그렇다고 도망치기도 쉽지 않은 게, 모용세가의 또 다른 절기인 성광추혼검은 도망가는 적을 잡기에 최적화된 무공이다.
즉 녀석과 같은 전장에 들어서는 순간, 도망치는 것도 타격을 주는 것도 불가능하단 의미였다.
남는 선택지라곤 이도저도 못하다 목을 내어주는 수밖에.
'하필 그런 놈을 만나다니. 쯧쯧. 운이 없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군.'
고개를 주억이며 씁쓸함을 내비치는 천강.
그러나 진실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실 그들은 사신들과 대치하다, 준조가 피운 연기를 들이마시고 독사(毒死)한 것이었다.
당시 천강은 그곳에 없었고. 조사를 맡은 일필일사의 경우에는, 화경급 고수들이 일시에 독으로 사망했다고 보기엔 여러 정황이 맞지 않은 걸 고려해 모용진에게 죽은 것이라 결론을 낸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늘 그늘 속에 숨어, 다르게 보이기 마련.
아무튼 그 일로 인해 암운곡 아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훈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외부 정파 놈들에게 꼭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새로운 교관들은 아직 배정 안 됐대?"
"아뇨. 곧 온다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때까지 4년차 선배들보고 고생 좀 해달라고 해줘."
"예."
천강이 팔을 들어 올린다. 약 백여 명 아이들 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소운이 그런 천강을 발견하고는 똑같이 팔을 들어 보인다.
"무진아, 그런데 네 스승이 날 왜 찾는지 알아?"
"아뇨. 그냥 형님을 불러달라고만 하셨어요."
"흠. 그래?"
그동안 봐온 흑철마괴는 절대 쓸데없는 만남을 가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천강은 의아함을 품고는 무진에게 물었다.
"근데 왜 초아 누님이 안 오고 네가 와?"
"누님도 요새 바쁘시잖아요? 빠른 시일 내에 꼭 화경 되고야 말겠다고."
"아아. 그랬지."
어느덧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흑철마괴의 앞에 도착한 두 소년.
흑철마괴는 무진을 돌려보내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천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신교의 신전이었다.
음?
"저기. 여기는 왜……?"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이곳에 계신다. 신분을 듣고 놀라지 마라."
하.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라면 딱 한 명뿐이지, 다른 누가 더 있을까?
마교의 교주이자, 중원의 서쪽 천산을 다스리는 통치자.
"인사해라. 신교의 하늘이시다."
천강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한 이립(而立)즈음 되어 보이는 사내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풍기는 기세나 보이는 태도부터가 범상치 않은 인물. 그 내면의 흐르는 심후한 내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른침을 삼키게 한다.
"어서오너라. 네가 요새 본교를 떠들썩하게 만든다는 그 소년인가 보구나."
무림의 최강자 중 한 명인 천마가 천강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