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6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67화
67화. 사태 수습
환한 순백의 빛이 내려쬐는 아침.
아수라장이 된 숲을 수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체들을 살펴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동료들이 죽었다고?"
"정신차려라. 아직 적이 근처에 있을 지도 모른다. 312호, 생존자는?"
"없다. 257호, 281호, 299호. 모두 사망이다."
"그렇군. 일단 동료들의 시체를 수거한다."
얼굴이 박살이 난 사체들을 업는 사람들. 그 때 저 멀리서 그들을 부르는 신호가 날아왔다.
"무슨 일이지?"
"저번에 왔었던 총책임자의 시체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 또한."
"그 말은?"
"이번 회동은 대실패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회동에 참석한 전원을 죽이고 달아났다."
"주변을 샅샅이 뒤진다. 놈의 행방을 찾는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계획은 곧바로 물거품이 되었으니…….
"301호. 자리를 피해야 한다. 교주 쪽 세력으로 보이는 이들이 이곳으로 당도하고 있다고 한다."
"……제길. 일단 동료들과 총책임자 시체만 가지고 이탈한다. 나머지 시체는 사방으로 퍼뜨려서 추적을 못하게 만들도록."
마치 한 몸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신들.
그들은 이내 천산 바깥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
터덜터덜. 한 소년이 누렇게 익은 곡식들 사이를 걸어간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어깨가 추욱 처져있었다.
'밤새 움직였는데 소득이 없어.'
신수도 못 만나고, 현경 잡는 독은 정체도 못 알아내고.
이곳을 뛰쳐나갈 때만 해도 신이 나서 피곤한 줄을 몰랐는데, 정작 모든 일이 끝나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천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는 암운곡 담당 관리자 추밀이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농상집요(農桑輯要)? 농사 관련 책인가요?"
"음? 아아. 그래, 맞다. 내가 여기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추밀이 방긋 미소 짓는다. 그는 바닥에 놓아둔 물통을 집어 건네주며 말했다.
"이름이…… 천강, 맞지?"
"아, 예."
"아침부터 대차게 훈련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구나?"
천강이 몸을 내려다봤다. 피곤해서 몰랐는데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다 된 상태다.
"아하하. 그러네요."
천강은 내력을 순간적으로 발산해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었다. 더러워진 옷이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물 감사합니다."
"그래. 새벽부터 수고 많았는데, 오늘은 일 나오지 말고 방에서 좀 쉬려무나. 내가 애들에게 잘 말해둘 테니."
"감사합니다, 추밀님."
"그래. 어서 들어가라."
이립(而立)즈음 되어 보이는 사내가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왠지 모르게 호감이 이는 그 미소에 천강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숙소로 들어섰다.
침대에 눕자마자 빠르게 찾아오는 수마(睡魔).
서서히 사라져가는 의식의 흐름 속에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아쉽네. 신수인데.'
분명 흰색 털이었지. 그것도 범을 닮은.
그걸 볼 때 녀석은 백호(白虎). 사대신수 중에서도 인간에게 제일 우호적으로 알려진 영물이다. 인간들 틈에 끼어, 사람의 형태를 한 채 함께 사는 걸로도 유명하고.
'분명 조금만 빨리 뛰었어도 마주쳤을 텐데.'
신수를 마주치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일생의 운명을 뒤바꿀 기연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신수는 자신이 인정한 인간에게 특별한 힘을 나누어준다. 그것은 자신의 혼(魂)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며, 길(吉)을 불러오고 흉(凶)을 내어 쫓는다. 필요한 경우엔 그 인간을 위해 산을 뒤엎는 일을 행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신적인 힘을 부여해 준다는 뜻.
그런데 그걸 코앞에서 놓치다니…….
'오늘 밤 한 번 더 찾아볼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아직 요 근처에서 대기타고 있을지.
'그래. 일단 자고. 오늘 밤부터 수색 개시다!'
***
"이, 이건 대체……."
"세상에."
풍미관 북쪽 경계 숲.
거센 태풍과 지진이 지나간 것 마냥 황폐해진 땅 위를 수십의 사람들이 샅샅이 훑는다. 전투의 흔적을 살피는 마인들은 상상 외의 현장에 마른침을 삼켰다.
실력들이 있는 만큼, 이 참혹한 광경을 만든 이가 불과 두 사람에 불과하단 걸 깨달은 것이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들이 맞붙은 것이지?"
"이 정도면 거의 마두들이 생사투를 한 것과 같지 않은가?"
그때 흩어져 있던 마인들이 빠르게 한곳으로 모였다.
그곳엔 잘 정돈된 머리, 학자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일필일사. 마교에서 교주를 제외하고 두 번째로 강하다 불리는 인물이었다.
"보고 드립니다. 암운곡 교관을 찾았습니다."
"저 또한 보고 드립니다. 이쪽에서도 교관이 발견되었습니다."
"저희 쪽도."
"그렇군요. 사방으로 흩어놓았다라……. 시체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일필일사의 질문에, 차례대로 보고를 올리는 사람들. 보고받은 이가 턱수염을 어루만진다.
"모두 독에 당했다?"
남자의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그가 있는 곳은 거대한 분화구처럼 땅이 꺼진 곳이었다.
주위 숲은 온통 산산조각이 나고, 바닥은 거대한 상처가 날 만큼 치열하게 싸웠는데 정작 사인은 독이라…….
"뭔가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군요. 다른 단서는 없습니까?"
그때 또 다른 이가 나타났다.
"보고 드립니다. 동쪽으로 쭉 수색을 하던 중, 한 남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가져온 시체를 보여주는 마인. 그제야 미간이 찌푸려져 있던 일필일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제야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모용세가의 제일검 모용진이라."
"모, 모용진? 이자가 정파의 그 모용진이라 이 말입니까?"
주위에서 웅성웅성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모용진이 누구인가? 이번에 무림에서 현경에 도달한 신인 강자 중 하나 아니던가?
이화접목(移花接木)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모용세가의 절기, 두전성이(斗轉星移)를 사용할 줄 아는 만큼, 현경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정파 내에선 10강에 들 만큼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시체로 발견되다니?
"어떤 괴물하고 맞붙었기에 그런 거지?"
"암운곡 교관 8명이서 목숨을 걸고 맞교환한 거 아닐까?"
"아서라. 8명 모두 독으로 죽었다잖아? 모용진도 독으로 죽긴 했는데, 그보다는 죽기 직전까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흔적이 나왔대."
"아니, 현경을 죽기 직전까지 팬다고? 대체 누가?"
두전성이는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되돌리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무공이다.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절대방어. 그런데 그런 무공을 뚫고 타격을 준다고?
모두가 그 사실에 혼란스러워 하는 그때였다.
"일필일사님!"
"무슨 일입니까?"
"일필일사님. 지금 당장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모용진을 잡은 이를 찾았습니다."
"호오?"
일필일사가 잔상을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마인들 또한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뒤를 따랐다.
지금은 일보다도 모용진이란 신출 괴물을 누가 잡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막말로 그걸 직접 두 눈으로 봐야, 이따 마교로 들어가서 입을 털며 술이라도 한 잔 얻어먹을 것 아닌가? 두고두고 죽을 때까지 우려먹을 수도 있고.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풍미관의 황금 곡식이 내다보이는, 숲 경계 가장자리였다.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서 있다. 그 앞에는 멋들어지게 휘갈겨 쓴 문구가 새겨져 있다.
『모용세가의 애송이가 까불기에 손 좀 봐줬다 - 흑살마신』
***
한 시진 전.
사고를 치고 돌아가려는데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가는 천강.
'잠깐. 천산 인근에서 이리 소동을 피웠다면 분명 조사가 나올 거고, 잘못하면 골치 아파지는데.'
괜히 재수 없게 자신이 한 게 걸리면 앞으로의 행동에 제약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에 천강은 고민을 하다, 사건을 단번에 수습할 핑계거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본인의 이름 팔기!
가을걷이를 하며 나름 재미를 본 까닭에 곧바로 떠오른 천강이었다.
'후훗. 이러면 사건을 깊게 파헤칠 생각을 못하겠지.'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흑살마신을 찾아야 하는데, 당장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천산 영역에 들어와 있는 정파인을 때려잡았으니 딱히 흠 잡힐 부분도 없이 명분도 완벽하다.
'그럼 이제 숙소로 돌아가 볼까?'
그렇게 사건을 수습해 놓은 천강이었다.
그런데 조용히 묻힐 거란 생각과는 달리, 사건은 매우 시끄러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들었는가? 이번에 휴가를 즐기기 위해 나서던 암운곡 교관들이…… 아니 글쎄 천산으로 넘어온 정파인들과 싸우다 모두 죽었다지 않은가?"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교관이면 모두 화경의 실력자들 아닌가? 그런데 모두 죽었다고?"
"그렇다니깐! 거기에 하필 모용세가의 제일검 모용진이 끼어있었다네!"
"이런 썅! 아니 왜 그 새끼가 여기서 얼쩡거려? 지가 사는 곳에나 있을 것이지!"
분을 참기 힘든지, 씩씩 화를 내며 술을 들이킨다.
그때 말하는 이가 검지를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닐세."
"그럼?"
"글쎄. 그걸 지나가다 목격한 한 마인이 놈을 죽였다지 뭔가?"
"아니, 그 모용진을? 대체 누가? 암운사신이라도 만났다던가?"
"듣고 놀라지 말게. 흑살마신이네."
"흐, 흐, 흑살마신? 복귀했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단 말이야?"
"그렇다네. 심지어 모용진 놈을 나무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팼다고 하더군."
그 말에 마인이 큰 소리로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통쾌하다는 듯 한참을 그리 웃더니, 술을 시켜 말하는 이에게 건네주었다.
"그거 참 속이 시원~하구만! 하하핫!"
"그렇지? 정파 놈들 요새 기세등등하던데, 아마 지금쯤이면 교육이 되었을 거야. 제 아무리 날고 긴들 싸움에 미친 자들이 모인 이 마교에는 안 된다는 걸."
그 소문은 삽시간에 마교 전체에 번졌고, 흑살마신에 대한 찬양과 경계는 이전보다 한층 더 강화되었다.
물론, 그 시각 천강은 골골대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이고, 몸살아. 진짜 죽겠네.'
왜 흑철마괴가 무진이에게 체력단련을 열심히 시킨지 바로 이해가 됐다. 화경인데도 꼼짝도 못할 정도라니.
짝!
"아악."
"천강. 빨리 말해. 너 어제 볼일 보러 간다하고 어디 갔어?"
고개를 든다. 초아가 팔짱을 낀 채, 도끼눈을 뜨고 있다.
"누, 누님 그게……."
초아를 못 믿는 건 아닌데, 원체 다양한 일에다가 큰 사고를 쳤더니 왠지 사실대로 말하기도 뭐한 상황. 그에 천강은 대충 둘러댔다.
"그…… 볼일 보고 걸어오다가 픽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니 아침이었어요."
"으이구. 내가 못 살아! 그냥 볼일 보더라도 따라갔어야 했는데."
"하, 하하핫."
초아의 표정이 한껏 누그러진다. 천강이 몸살에 시달리는 걸 알고 있는 그녀는 천강의 팔다리를 꾸욱꾸욱 주물러주었다.
기분 좋은 감각에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회복이 된다.
그에 편안하게 즐기길 잠시, 이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
"혹시 뭐 필요한 건 없어? 말만 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정말요?"
"그럼."
천강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내 간밤에 암운행보를 유용하게 써먹은 걸 떠올린 소년은 배시시 웃으며 초아에게 말했다.
"혹시 누님 사문에 새로운 기술이나 무공은 없나요? 예를 들면 공격 방법이라든지!"
그러나 그 순간 천강은 볼 수 있었다.
분명 얼굴은 활짝 웃고 있으나 그 미소와는 동떨어진,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한 소녀를.
"천~강? 우리 잠시 진지하게 이야기 좀 나눌까?"
"어……. 누, 누님. 잠깐만요. 저 아직 몸이 제대로 안 움직여서 그런데, 다음에 하는 건 안 될까요……?"
"걱정 마. 난 그저 너랑 단둘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고개를 든다. 천강을 옆에서 간호하던 초아의 이마 위로 핏줄이 선명히 서 있는 게 보인다. 입에서는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하, 하하핫. 별일 없겠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그제야 후회하는 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