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6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62화
62화. 회동
"오늘이군."
달빛이 차게 비치는 밤.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 사내가 읊조렸다. 그와 함께 있던 이가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주쳤을 겁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런데 교주님, 너무 인력을 과하게 보내신 건 아니신지……."
그도 그럴 게, 무려 화경만 여덟이 투입됐다. 흑철마괴, 비격창마, 흑귀를 제외한 암운곡 모든 교관이 다 참가한 셈이었다.
그러나 천마는 그리 생각 안 하는 모양이었다.
"슬슬 적들도 움직일 걸세. 우리를 잡으려고 제대로 된 인력을 투입할 거야. 그러니 이쯤에선 우리도 제대로 된 전력을 투입하는 게 옳은 판단이네."
그리고 그런 천마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시각 현장에서 은밀히 잠입해 있던 암운곡 교관들이 적들의 수준을 파악한 것이다.
"다른 것들은 다 잔챙이인데, 한 명이 경지 파악이 안 되는군. 적수마도, 그대가 보기엔 어떠한가?"
"나 또한 파악이 안 되네."
"그렇다면 역시……."
"그래. 현경이라 봐야겠지."
현재 중원엔 생사경(生死境) 급 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지 파악이 안 된다면 현경일 게 불 보듯 뻔했다.
"흠. 현경이면 우리도 어느 정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데."
"이번엔 우리가 물러나야겠군. 회동이 끝나고 파할 때, 마교의 배신자들만 처단하도록 한다."
지휘를 맡은 이의 지시에 다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의 만남은 이제 막 끝을 맺고 있었다.
***
"야, 너 미쳤어?"
천강의 입을 가슴으로 틀어막은 초아가 매섭게 노려본다.
천강은 안면을 부드럽게 뭉개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조용히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도 새 건물인 만큼 방음이 잘 되는지, 확인하러 오는 이는 없었다.
북명신공도 완성했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준비를 하는 두 사람. 그때 청청이 천강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어, 그래. 그런데 그 전에 나도 하나만 물어보자."
"네, 물어보세요."
"너 왜 나한테 존댓말 쓰는 거야? 연화랑 무진한테는 반말 잘만 하더만."
청청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게 왠지 편해서요. 왠지… 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난 또 뭔 특별한 이유가 있나 했네.
"그럼 이제 네 차례야. 물어봐. 신병이기(神兵利器)도 만지게 해줬으니,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선에선 다 대답해 줄게."
그 한마디가 꽤 도움이 된 걸까? 잠깐 망설이던 청청이 곧바로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혹시…… 저,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천강의 눈이 동그래진다. 순간 질문을 이해 못한 천강은 잠깐 초아를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회수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안. 난 이미 두 여자만으로도 충분해서 네 마음을 받을 여유까진 없다."
내 뒤에 서있는 엉큼한 초아랑, 숙소에서 코 골며 자고 있을 먹보 연화만으로도 이미 한계 초과거든.
그러자 청청이 깜짝 놀라며 발끈한다.
"아,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제 이야기는 제가 무진이랑 어울릴지! 에… 그러니까 그런 겁니다아……."
아아. 그런 거였어? 그런데 천강의 의문은 여전하다.
"근데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그게…… 아무래도……."
"아무래도 뭐? 그냥 서로 좋아하면 그만 아냐?"
"에? 무진이도 저를?"
청청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녀는 그 사실이 쑥스러운지 잠시 몸을 배배 꼬다가, 푹 한숨을 쉬며 자신의 고민을 드러냈다.
"그, 그래도…… 제가 다리가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좀 안 어울릴까봐 걱정이에요."
"거참 답답하구만."
"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쓸 거 뭐 있어? 그런 식으로 살아봤자 네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된다?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나?"
끄덕끄덕. 소녀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그리고 무진이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네가 손이 없던 발이 없던 말이야."
적어도 천강이 봐온 무진의 성격은 그러했다.
"그럼 나 이만 간다."
"예……."
초아와 함께 문으로 다가가는 천강. 나서기 전 잠깐 뒤를 돌아본다. 두 손을 꼬옥 모으고는, 아직도 뭔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외발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뭔가 어른스러워 보여도 아직 애는 애로구만.'
천강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한 마디 해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하는 말인데, 너희 둘 잘 어울려. 적어도 내 눈엔 말이야."
화악- 청청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양 손을 불끈 움켜쥐며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어떡해. 무진이네 형님에게도 허락받았어!'
결국 그날 밤, 청청은 가슴이 심히 뛰어 잠을 한숨도 못 자게 되었다.
***
"후훗. 무진이에게 푹 빠지긴 했나보네."
"그러게 말이에요."
"천강, 우린 언제 진도 나가?"
"네?"
"아, 못 알아듣는 척 하지 말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대체 열 살짜리에게 뭘 바라시는 거죠?"
천강은 능숙하게 초아의 공세를 맞받아치고는, 잠겨 있는 복도 창문을 통해 슬쩍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깥은 이제 막 새벽에 들어설 준비를 하느라 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젠 바로 숙소로 갈 거지?"
"예, 그래야죠."
북명신공도 완성했겠다, 이제 잠 좀 자면서 피로를 풀어야지.
그에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무언가가 천강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응?'
그건 묘한 기운이었다.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운.
얼마나 정순한지 곤륜이나 소림사 놈들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그것은 호기심 많은 천강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우거진 수풀, 깊은 심연 속으로 한 쌍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것은 천강과 눈이 마주친 순간, 후다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강, 왜 그래? 저기에 뭐가 있어?"
"누님."
"응?"
"누님은 지금 바로 숙소로 돌아가세요."
"그럼 너는?"
"전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요."
"그럼 나도 같이 가. 너 혼자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
천강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큰 거 좀 보고 가려고요."
"아……. 미, 미안. 그럼 나 먼저 갈게. 편히 보고 와!"
"네에."
초아가 후다닥 자리를 비켜준다. 천강은 그녀가 숙소 건물로 들어서는 걸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발을 놀렸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틀림없어. 녀석은 신수야!'
영물은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거대한 흑사와 마주하지 않았던가?
놈들은 분명 광대한 기운을 지녔지만 그 정순함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당산에 눌러앉은 호랑말코 녀석들과 비슷한 수준.
그런데 아까 본 놈은 차원이 다른 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다살다 내가 신수를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녀석이 남긴 자취를 따라 빠르게 뒤쫓는다. 천강은 그대로 풍미관 북쪽으로 올라갔다.
***
고요한 숲. 어두운 수풀 안으로 두 무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정보들을 서로에게 전해주었고, 의문이 드는 부분에 있어서는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그 중 가장 논점이 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잠깐. 흑살마신이 살아있고, 복귀를 선언했다고?"
"그렇다. 그로 인해 그쪽에서 보내준 제갈태유와 우리 쪽 마두 하나가 그의 거처에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혹 잘못 본 것은 아닌가?"
"그럴 수도. 발견 당시 단전에 내기들이 하나도 없었다고는 했는데, 그걸 진술한 게 괴기나한이었거든."
그러나 대화하는 이들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흑살마신이다. 흑살마신이 누구인가?
50년 전. 오랜 기간 준비해온 그들의 대의를 단 하루 만에 망쳐놓은 인물 아니던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실제로 그를 만나본 이는 없지만, 이전 세대로부터 수차례 경고를 전해들은 그들로서는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보고는 드려보겠네. 그 사이 자네들은 흑살마신이 살아있는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것을 확실히 알아봐주게. 아마 살아있는 게 확실시만 된다면, 위에서도 바로 지원을 보내줄 것이네."
"알겠다. 그럼 그리 하도록 하지."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는 서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중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낯빛이 굉장히 어둡다.
"하……. 큰일이로군. 하필 흑살마신이 살아있다니."
"그 마두가 그리 대단합니까?"
이번 만남의 총책임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단하지. 내기가 얼마나 광활한지 금강불괴마냥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고. 한 번 손에 붙들리면 절대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그건 그냥 쳐내면 되는 것 아니오?"
"하하핫. 모르는 소리! 제 아무리 화경이라 한들 그의 손에 붙들리면 마른 장작이 될 뿐이네. 그 누가 그런 괴물을 상대로 이기겠는가?"
그러면서도 제일 뒤에서 따라오는 이를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현경급 고수가 함께 있으니, 눈앞에 나타난들 걱정할 게 전혀 없지만 말일세."
"하핫. 그렇소. 모용세가에서 제일가는 무인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그 무엇이 걱정일까?"
"과찬이십니다."
"허허. 거 겸손하기는."
일도 잘 끝났겠다, 어찌됐든 편한 걸음으로 숲길을 나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제일 후미에 자리한 모용진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아까 만남에서 마교 쪽 경호를 서던 이들 중, 세 명이 영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내기가 전혀 안 느껴져?'
살수들이라 숨기는 데 능한 것인가?
그러나 그리 생각하기엔 좀 뭐한 게, 자신은 무려 현경이다. 현경이 그 어떤 기운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혹시 무영삼귀였던 건가?'
그나마 살수 중 세 손가락에 든다는 그들이라면 조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음?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나?"
"……아닙니다. 근데 책임자 어르신,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씀해 보게. 내 모용제일검에게는 질문을 받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니. 궁(宮)에 관한 일만 아니라면 내 뭐든지 이야기 해주겠네."
"아까 마교 쪽에서 경호로 나온 세 명. 정체가 뭔지 아십니까?"
마치 기억을 끄집어내듯 총책임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듣기로는 마교 쪽에서 은밀히 키우는 비밀병기라 들은 것 같네. 실력들이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이들을 셋이나 보낸 걸 보면… 저쪽에서도 우리처럼 이번 만남에 끝을 보려고 했던 거라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아쉽게 되어 버렸소. 하필 오늘은 조용한 것이 말이오."
"하핫. 그러게 말일세. 차라리 나타나 주는 게 우리에겐 더 득이 됐을 터인데 말이야."
그런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 있던 모용진이 두 사람 앞으로 나섰다.
"두 분 모두 뒤로 물러서 계시지요."
"응? 왜 그러는가?"
"범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래도 오늘은 일이 있어 조금 늦게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 앞으로 훅 튀어나오는 한 인영.
모용진은 곧바로 검을 출수했다.
검은 그림자가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공중에서 검의 궤도를 스르륵 회피한다.
"허, 허공답보?!"
"아니, 허공답보라면 현경 고수 아니오?"
모용진의 검격을 피한 검은 인영이 부드럽게 자세를 회복한다. 그리고는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더니, 살짝은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넌 뭔데 다짜고짜 살격이냐?"
"왜 살격을 받은 지는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뭔 개소리야? 지금 신수 뒤꽁무니 쫓다가 놓쳐서 빡쳐 죽겠고만."
그랬다.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신수를 만나보겠다며 그 뒤를 쫓고 있던 천강이었다. 계속 추격해 북쪽으로 올라오다 보니, 우연히 이들과 마주치게 되어버린 것.
그러나 모용진 입장에선 합리적 의심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시간에 그것도 이 외딴 곳에서, 화경급 고수가 딱 우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다?'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에? 소년?"
"서, 설마 반로환동(返老還童) 고수?"
두 구경꾼의 경악 속에 모용진이 자세를 잡는다. 그런데 정작 천강은 그런 그를 무시하고 다시 바닥을 훑는다.
'아, 분명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 텐데.'
갑자기 이 근처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이리저리 찾느라 고생 중인 천강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모용진은 자신을 도발한 것이라 판단, 재공격을 시도했다.
천운삼검.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빠르게 검격이 쇄도해 들어간다.
땅바닥을 살피던 소년이 흠칫 하더니, 암운행보를 사용해 가볍게 회피한다. 천강은 자꾸만 방해하는 그의 행태에 짜증을 냈다.
"야! 너 자꾸 귀찮게 할래?"
"무기를 들어라. 비명횡사 하고 싶지 않으면."
"……?"
뭐야, 이 녀석? 다짜고짜 칼을 들이밀고는 무기를 들라니?
'달밤에 칼춤 못 춰 안달 난 미친놈인가?'
꼭 이런 놈들이 있다. 마인들 중에.
마인들은 다들 하나씩 이상증세를 달고 사는데, 그중 광증에 시달리는 놈들의 증상이 꼭 이랬다.
'자고로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 했어.'
천강은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공격.
그런데 이번에는 위력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성광추혼검.
검격이 뱀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쫓아온다. 사방에 검풍을 일으키며 소년을 둘러싸고는 맹렬히 추격한다.
쿠구구구구.
우수수 쓰러지는 숲의 나무들. 그러나 이번에도 천강은 상처 하나 없이 그것들을 다 피해, 한 아름드리나무 위에 안착했다.
"흥. 참으로 쥐새끼 같은 놈이로구나."
"너 진짜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라. 엉? 내가 지금 하던 일만 아니었어도 넌 진즉에 죽었어."
"그래? 그런데 그 하던 일도 이제 못하게 됐으니 그럼 어찌할 거냐?"
"응……?"
천강의 고개가 밑을 향한다. 금방 전 소동으로 주변이 온통 난리가 나, 추격을 할 만한 흔적이 모조리 사라진 상태다.
말 그대로 미친 놈 하나 잘못 만나, 신수를 만날 기회를 공친 셈.
천강의 이마에 혈관이 툭 튀어 올랐다.
"너…… 진짜 뒈지고 싶은가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