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6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60화
60화. 암운신공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반쪽밖에 떠 있지 않은 은은한 달빛 아래, 붉은 횃불이 홀로 일렁이고. 어둠이 자욱한 어느 한 공터에서 소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안에는 큰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재능이 넘치기로서니…… 사문의 신공인 암운신공을 단 한 번에 터득해 완성한다고?!"
***
반 시진 전.
"흠흠.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 사문의 비기인 암운신공에 대해서 가르쳐 줄게."
몸을 풀고는 천강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초아.
갑자기 그녀의 신형이 서서히 검게 물들어간다. 검은 도포자락을 입듯 서서히 어둠 속으로 동화되어 갔다.
이윽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소녀. 천강의 입에서 나직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 이 정도라니.'
주태 녀석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구나.
하긴. 무려 50년의 세월이다. 그 기간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시간이긴 했다.
초아가 어둠을 걷어내고 코앞에서 나타나며 생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천강의 손을 잡아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자, 봐봐. 이런 식으로 나선을 그리는데, 네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쓰는 거야."
천강의 손등 위로 기의 회전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뱅글뱅글 돌며 차차 검은색으로 물들어갔고, 상대적으로 중심부로 갈수록 짙게 어둠이 끼게 되었다.
"이게 끝인가요?"
"응. 사실 이게 다야. 이걸 온몸에 두르는 거지."
그러면서 초아가 나선을 그리는 기의 소용돌이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손등 위로 흑점의 개수가 늘어난다. 하나, 둘, 셋…… 손등을 넘어 팔 하나를 다 덮는다.
"이게 대체……."
"이런 식이야. 흥미롭지? 옷을 입듯 이렇게 몸 전체에 두르면 그 어떤 기척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아. 원하면 형태나 크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은신시키는 게 가능하지."
"정말 대단하네요."
"그치? 그래서 나 우리 스승님 굉장히 존경한다고. 이걸 직접 만드시다니."
주태 녀석.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구나.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늘 자신의 무공은 자신이 직접 만들겠다고 입에 달고 살더니, 기어이 성공한 것이다.
"자, 해봐."
"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누님?"
"응. 물론! 뭐든 거리낌 없이 물어보렴. 혹시 내 속옷 색깔이 궁금한 거야?"
이년이……? 천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이거 얼마나 촘촘히 둘러야 하는 거예요? 촘촘히 하면 할수록 뭔가 이점이 있을 것 같은데."
"역시 우리 천강 똑똑해. 좋은 질문이야! 개수를 많이 늘릴수록 더욱 은신효과가 커진다고 보면 돼. 소리도, 기척도, 내기도 그만큼 새어나가는 양이 줄어드는 거지."
"그러면 단점은요?"
세상사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공존한다. 음양의 원리처럼.
초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기가 겁나게 많이 든다는 것!"
아, 하긴 그렇겠군. 개수를 곱절로 늘릴수록 소모되는 내기의 양도 그만큼 늘어나겠지.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다. 초아는 기대에 찬 얼굴로 천강을 바라보며 응원했다.
"처음이니까 너무 무리하려 하지 말고, 손부터 찬찬히 해봐."
천강이 눈을 감는다.
고요함 속에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즐거이 들려온다. 간간히 흔들거리는 풀잎소리가 반주를 깔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스쳐지나가며 피부를 간지럽혔다.
꿀꺽.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빨리 습득해 날 놀래키려나?'
저번에 암운행보 때 보여줬던 무시무시한 재능을 떠올린 초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아마 한 시진, 그쯤은 걸리겠지?'
사실 한 시진 만에 암운신공의 묘리를 완성시킨다는 게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암운행보 때 단 한 번 만에 성공한 걸 상기하고는 나름 보정을 한 초아였다.
나름 신동이라 자부하는 그녀조차도 이걸 온몸에 두르는 데에는 1년이 걸렸다. 그걸 유지한 상태로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3년이 걸렸고.
기운용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기 전에는 말 그대로 불가능하기에 그런 것.
그런데 그녀의 생각보다 소년은 더 대단한 인물이었나 보다.
"어어?"
짙은 어둠. 옷자락 소리나 머리털 잔음조차도 들리지 않는 검은 구름.
마치 그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소녀의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강의 몸 주위 곳곳으로 검은 흑점들이 생겨나더니, 빠르게 몸 전체를 뒤덮은 것이다.
그리곤 그것은 이내 검은 옷자락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나부꼈다.
그 어떤 기척도 형상도 없이, 그저 느낌만이 잔존하는 암운(暗雲).
"하, 하하핫."
사람 기척에 숨을 죽이고 있던 풀벌레들조차 소년의 능력에 감탄하듯, 소년 주위에서 노래를 시작한다. 큰 소리로 노래하고 울부짖는다.
초아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멋져. 정말…… 최고야!"
***
"야야. 들었어?"
"뭘?"
한 소년이 볏단을 나르며 운을 띄운다. 그 옆에서 같이 걷는 소년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여 귀를 기울인다.
"어제 갑자기 몇몇이 사라진 거 기억하지?"
"그랬지. 근데 왜? 아, 농땡이 피우다 걸려서 관리자에게 끌려간 거래?"
"아니. 듣기로는 요괴에 당했다 하더라고."
"요괴? 그 무슨 해괴한 소리야?"
"아니 글쎄 걔들 말을 들어보니…… 진영에서 이탈해 잠깐 볼일을 보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에 힘이 없어서 꼼짝을 할 수 없었대.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
"에이. 그냥 어디서 단체로 놀다가 와서 변명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은가? 요괴라니, 참.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소년의 얼굴은 굉장히 진지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아까 오면서 봤거든.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입을 잘게 떠는데……. 어어? 야. 저기 봐. 저기 또 발견됐나보다."
두 소년이 헐레벌떡 움직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한 소년이 바닥에 드러누워 입만 간신히 뻐끔뻐끔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사태가 심각한지 풍미관의 총책임자인 대방까지 나와 있는 상황.
소년의 상태를 살핀 대방이 종사를 이끌고 한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듣는 이가 없나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종사야. 이거 어떡하냐. 요괴라니……."
"상부에 보고할까요, 어르신?"
"그건 절대 안 돼! 위에 보고를 하면 교주 쪽 감찰자들이 내려올 거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한 짓이 걸릴 지도 몰라."
그가 풍미관을 장악한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10년 전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 한 짓. 그리고 장악한 이후,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온 짓들까지.
이곳이 외부로부터 독립된 구역이라 망정이었지, 아니 그랬으면 진즉에 그의 목은 날아가 까마귀밥이 되었을 것이었다.
"종사야. 머리 좀 굴려봐라. 어서!"
"그럼 어르신. 닷새만 참으십시오."
"닷새? 아……. 그러고 보니 그들이 오기로 했지!"
어떤 이들이 오는지는 몰라도 화경급 고수가 한 명이라도 끼어있다면, 요괴든 악귀든 어떻게든 처리가 가능하리라.
"후우. 좋아. 애들 진정시키고, 닷새만 어떻게 잘 참으라고 해."
"예. 그럼 과일이라도 좀 풀까요? 단 게 들어가면 좀 진정들이 될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만. 그렇게 해."
그렇게 양 진영에 배급되기 시작한 과일.
암운곡 애들이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본다. 한 소년이 하품을 하며 음식을 먹고 있다.
"진짜 천강이 대단하긴 하다니깐."
"그러게. 덕분에 적들 사기도 죽고 우린 과일도 먹고."
"앞으로도 천강이 뭘 하자고 하면 그대로 따르자고. 이득을 보면 봤지, 절대 손해는 안 볼 것 같아."
아이들의 고개가 모두 위아래로 움직였다.
***
"천강."
"으음."
"천강. 그만 일어나."
몸을 뒤흔드는 감각에 소년이 잠에서 깨어난다. 천강은 하품을 한 번 크게 하고는 눈을 떴다.
간밤엔 암운신공을 숙련한다고, 그리고 낮에는 쉬지 않고 내기를 흡수한다고 돌아다닌 탓일까. 약간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피곤해?"
"누님, 제가 얼마나 잤죠?"
"음. 한 반 시진쯤 잤지? 지금 다들 저녁 먹고 각자의 숙소로 들어가 쉬는 중이야."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과연 초아의 말대로 아이들이 다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무진이랑 연화는요?"
"청청인가 걔 보러 간다고 했어. 원래는 무진이 혼자 간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혼자 보내기엔 좀 그렇잖아? 그래서 함께 보냈지."
기지개를 쭉 편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아 또한 따라 일어나 그 옆에 바짝 붙었다.
"피곤하면 너무 무리하지 마."
"아녜요."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다.
이번 추수가 끝나고 여울나무와 헤어지면 내년 기경만회까지는 못 만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려 북명신공을 완성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미룰 이유가 없죠."
그러자 그 대답을 들은 초아가 갑자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에이. 너무 피곤하면 내일 해도 되는데. 난 괜찮은데~"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초아가 몸을 배배 꼬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그 모습을 멍 하니 쳐다보던 천강은 문득 어젯밤에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럼 열 개요.'
'여, 여, 열 개?!'
'거기에다가 내일 밤 단둘이서 산보까지, 추가.'
아……. 그래서 이리 신난 거였구만?
기분이 한껏 상기된 초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천강에게 매달린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 어디 갈 거야?"
"좋은 데요."
"좋은 데 어디?"
"음. 긴장감에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요."
초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홍조를 띠는 건 덤.
"그럼 바로 갈까요?"
"응!"
그러고 이각(二刻) 후.
두 소년소녀가 불이 꺼진 숙소 내부에 앉아 있다. 그런데 소녀 쪽은 불만이 많은지 두 볼이 빵빵하게 부푼 상태다.
"단둘이 있는 것도 좋고, 침대가 있는 것도 좋아. 다 좋은데……."
초아가 침대를 내려치며 울분을 토했다.
"아니, 왜 하필 여울나무 숙소야! 응? 완전 속았어! 이거 사기야!"
"에이 속다니요. 말한 대로잖아요? 밤에 단둘이서 나왔지. 몰래 숨어들어오느라 심장도 콩닥콩닥 뛰었지.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 깰까 봐 조심조심 행동하고 있지."
사전에 나눈 이야기랑 전혀 다를 게 없구만.
물론 천강은 그녀가 뜻하는 게 뭔지 알았다. 아직 나이가 어려 감정이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나, 알아차리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날 넘어뜨리려면 백 년은 이르다, 꼬맹아.'
초아가 침대에 엎어져 사지를 버둥거린다. 이번에도 천강의 입발림 말에 속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한참을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천강을 돌아보며 초아 왈.
"설마 내 열두 개의 약조도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저 누나 좋아한다니까요?"
그러나 한방 크게 먹은 초아 입장에선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초아가 눈을 반만 뜨고는 묻는다.
"……정말?"
그러자 대답 대신 천강이 생긋 웃는다.
뭔가 상당히 불만족스럽지만, 초아는 그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제는 그녀 자신보다 천강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두 눈을 감고는 내기를 융합하는 천강을 보며, 초아 또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바로 화경부터 달아주겠어!'
다시 예전의 관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초아였다.
***
수풀이 우거진 산속.
꾸불꾸불 외로이 나 있는 길을 걷는 세 사람이 있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언덕 너머를 보더니,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다 왔군. 앞으로 하루면 도착하겠소."
"약속일은 4일 후던가?"
"그렇소. 제발 이번에는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군."
"걱정 말게. 이번엔 무려 모용의 제일검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나? 그러니 그 누가 상대가 되겠는가?"
"후훗. 그건 그렇지."
3개월 전부터 무려 8차례에 걸친 방해. 이번에는 반드시 그 훼방 놓는 세력을 일거에 토벌해, 사건을 해결하고 그 보상을 받으리라.
그들은 찬찬히 걸음을 옮겨 언덕 아랫길로 들어섰다.
마을 너머로 넓디넓은 황금빛 들판의 곡창지대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