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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5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3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55화

55화. 감히 우리 애들 기를 죽여

 

 

졸업을 해 마인이 되고 나면 각기 재능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배치된다.

몇몇은 정찰을 위해 강호에, 또 몇몇은 천산을 수호하는 그림자 등등.

"그중 몇 마인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곳에 배치되기도 하는데, 이따 우리를 반겨줄 사람들이 그런 분들이야."

초아의 설명에, 연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이런 곳에서 농사만 지으면 안 심심한가?"

"뭐 심심하긴 하겠지?"

"으으……. 나 같으면 이쪽으로 배치되느니 그냥 자살하고 말듯. 이게 뭐양? 기껏 마교까지 와서 무술까지 배워놓곤 농사를 짓는다니."

그때 그걸 옆에서 들은 2번 묵현이 툭 한마디 내뱉었다.

"농사부문은 자원제(自願制)다. 넘겨짚지 말아라."

"후엥?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더 이상의 설명은 일체 않는다. 더 설명해달라며 멱살을 잡는 기세가 가만 놔뒀다가는 싸움이라도 날 것처럼 보여, 천강이 대신 설명에 나섰다.

"농사 쪽은 지원자만 받아. 위에서 임의로 배치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럼 자기가 좋아서 이쪽에 왔단 이야기야? 왜애?"

도저히 본인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동글동글 뜨는 연화. 천강이 양 볼을 쭉쭉 잡아당기며 대답해 주었다.

"일단 목숨 위험할 일은 전혀 없잖냐. 잡초 제거하는 게 일이긴 한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하면 되는 일이고."

"후웅. 그런 인생이 즐거운 건가?"

아직 애구만. 천강은 그냥 연화의 수준에 맞게 한마디 해줬다.

"가축을 기르니까 고기는 원 없이 먹겠네."

"정말로?!"

"어."

그제야 연화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끄덕여진다.

"와아. 진짜 좋다! 지원자 경쟁이 매우 심할 듯!"

물론 경쟁 따윈 없다. 지원하면 바로 통과다.

그도 그럴 게, 어릴 적부터 무림인이 되는 걸 꿈꿔온 세대다. 그중 마교는 그 욕망이 극에 다다른 자들이 모이는 곳. 그런 이들이 농사를 지으려 할까?

'사실 진짜 행복은 이런 데서 시간을 때우며 사는 건데 말이야.'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마누라랑 자식들이랑 사는 그런 인생.

전생에 흑살마신은 가질 수 없었던 삶의 방식.

'쳇. 오늘 따라 스승님이 떠오르는구만.'

당시가 참 좋았지. 아침에 일어나 운기조식하고. 오전에는 훈련, 낮에는 낚시니 뭐니 시간 때우다가…… 밤에는 이런 저런 공부.

'그 시절이 참 좋았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이번 생에 나보다 강한 이가 없게 되면, 한 번 그렇게 살아볼까.

마누라도 하나 만들고, 아이들도 갖고. 집에는 가축도 키우고, 앞마당엔 농사도 짓고. 그저 그렇게. 평범하고 평안하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찬찬히 나아가던 그때였다. 앞서 산 밑으로 내려가던 인원의 보폭이 확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리는 아이들.

"우와!"

"머, 멋지다."

고개를 든다. 푸르른 창공 아래, 무르익은 곡식들이 끝없이 늘어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에, 황금빛 물결이 이리저리 출렁인다.

'드디어 도착한 것인가.'

한 해 동안 마인들의 모든 식사를 담당하는 천산의 식량창고에.

"어때? 멋지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초아.

무진과 연화, 그리고 다른 아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대자연의 광활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말로 형언 못할 어떤 감동을 주고는 한다. 감수성이 아직 풍부한 나이인 만큼 아이들의 눈엔 황홀함이 올라왔다.

딱 한 명만 빼고.

'아……. 일거리 더럽게 많네.'

이번 생은 농사나 짓고 살아보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정작 추수할 곡식의 양을 보고는 미간이 확 찌푸려지는 천강이었다.

'심지어 전생 때보다 더 넓어졌잖아?'

족히 곱절은 더 커진 것 같다.

그 말인즉슨, 일거리 또한 두 배!

천강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런데 그 때, 저 멀리서 산 밑으로 한 무리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거 여울나무 새끼들 아냐?"

"하. 우리랑 딱 맞춰서 내려오는 건 또 뭐야."

"일부러 그런 거겠지. 퉤."

그랬다. 여울나무 숲 인원들도 이제 막 하산해 도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하나 같이 불만을 토해내는 암운곡 선배들. 그런데 반대로 천강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오오. 어디보자. 생각보다 많네? 대략…… 500명 정도 되는 건가?'

그럼 암운곡이랑 합치면…… 얼추 딱 천 명이잖아?

천강의 눈이 호선을 그린다.

'크으. 좋았어! 이번에 아예 천 명 채우고, 바로 북명신공을 통달하자고!'

황금빛 들판 위로, 악당과 같은 음흉한 웃음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

 

"자네 들었는가?"

"뭘 말인가?"

"이번에 투파창귀님의 뒤를 이을 분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그게 참말인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난리가 난 것 아닌가?"

마교의 식량을 담당하는 풍미관.

본래 이맘때쯤이면 바쁜 부서이긴 하나, 오늘따라 더욱 더 바빠 보인다 싶더니……. 그런 거물급 인사가 끼어있는 탓에 그런 모양이었다.

말단부터 총책임자까지 하나 같이 굉장히 분주하다.

그런 그곳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큰 소리로 외쳤다.

"왔습니다, 대방 어르신! 여울나무 숲과 암운곡, 모두 지금 막 도착했답니다!"

"그래? 투파창귀님의 제자는?"

"계신 것 확인했습니다."

"좋아. 그럼 다들 어서 밖으로 나가자고! 우리 미래의 기둥들께 잘 보여야지!"

 

***

 

암운곡과 여울나무 숲.

양 진형이 일렬로 나란히 서서, 황금빛 물결이 이는 곡식 사이를 걸어 나간다.

거리가 고작 10보 내외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 집단 사이로 묘한 기운이 흘렀다. 2-5년차 무리가 서로를 보며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탓이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는 걸까? 응? 기경만회 때 탈탈 털린 걸 다시 상기시켜 줘야 하나?"

"하! 그때는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랬고. 우리가 네까짓 놈들에게 질 것 같냐?"

"진 주제에 변명은. 그냥 실력이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래?"

"10년 만에 한 번 이겨놓고 아주 기가 살았네, 쥐새끼들이?"

그중 특히 치열한 접전을 보이고 있는 4, 5년차들.

그 모습에 1년차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선배들과 교관, 조교들로부터 경쟁자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정작 그들 사이로는 이렇다 할 사건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몇몇은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안녕, 청청! 오랜만!"

"청청, 오랜만이야."

"응. 연화, 무진, 그리고 천강 안녕! 초아님도 안녕하신가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4, 5년차들이 홱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으나…….

"후후후후후."

미친 놈 마냥 웃고 있는 천강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들은 고개를 도로 원위치 시킬 수밖에 없었다.

스멀스멀 이전 날의 추억들이 떠오른 것이다.

'아. 저 미친 새끼, 왜 웃고 있는 거야?'

'몰라, 씨발. 실실 쪼개고 있으니 개 무서워.'

적진인 여울나무에 어느덧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천강.

그때 그들 앞으로 널따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엔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서들 오게나!"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사람들.

여울나무는 왼편에, 암운곡은 오른편에 모여 선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여울나무 쪽으로 다가가 환대를 하면서도 암운곡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행태에 천강은 그제야 왜 선배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쭈. 이젠 하다하다, 이깟 돼지 기르는 곳에서도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단 말이지?'

성대한 환영을 받는 여울나무 숲과 그 어떤 환영도 받지 못하는 암운곡.

극렬한 대비가 이루어진다. 마치 공기 취급하며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영 거슬린다.

'아……. 기분 더럽네?'

평소 남들 시선 따윈 크게 신경 안 쓰는 천강이다. 대놓고 욕을 하지 않는 한, 그냥 그러려니 흘려보내는 무난한 성품. 그게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리 느낄 정도니, 다른 아이들이 느낄 감정은 어떻겠는가?

슥 주변을 둘러본다. 역시나 다들 주눅이 들어있다.

'아, 새끼들. 감히 우리 애들 기를 죽여?'

그 때 누군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전형적인 농인(農人)의 허름한 차림을 한, 이립(而立)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추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보름 간 여러분과 상부상조할 사이이니 잘 부탁합니다."

"간만이에요, 추밀 아저씨!"

"아저씨,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등장에 확 풀어지는 분위기.

2-5년차 훈련생들이 반가운 얼굴로 그와 인사를 나눈다. 환영식다운 환영은 못 받았으나 그의 친절한 행동에, 그나마 암운곡 아이들은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렇게 양 진형은 좌우로 갈리어 각자의 숙소를 향해 나아갔다.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여기저기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하. 씨발 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어. 우리랑 시간대 맞춰서 나타나서는 꼭 저런 다니까?"

"올해만 그런 게 아닌가 봐요, 선배님?"

"어어. 매년 그래. 이쪽 풍미관 윗대가리들은 여울나무 쪽이 다 꿰차고 있거든. 딱 한분 추밀님 빼고 말이야."

"와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너무 하네요. 다 큰 어른들이…… 본인들 싸움에 애들까지 끼고 뭐하는 건지."

"야야. 이건 시작에 불과해. 이따 여울나무 쪽 숙소 몰래 가봐라. 아주 열이 머리끝까지 뻗칠 걸?"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숙소 건물.

허름하고 낡은 목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색은 칙칙하게 변색이 되고, 곳곳에는 구멍이…… 이따금씩 부는 바람엔 끼익끼익 벽면이 비명을 내지른다.

"……."

1년차들의 입이 모두 다물어졌다. 2-4년차들은 바닥에 침을 뱉고, 5년차들은 그러려니…… 세상을 달관한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천강 일행 또한 그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나마 오기 전 준비는 했는지 깨끗한 내부의 모습.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지어진지 몇 십 년이 된지 예측 불가능한 건물의 내부는 연화 같이 잠버릇 고약한 애가 잠자다간 하루아침에 폭삭 내려앉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와아. 작년보다 더 심해졌네. 이건 그냥 밖에서 자는 게 더 낫겠는데?"

"그러니까. 진짜 졸업하기 전 여기서 또 자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큭큭."

"그냥 우리 야영할까?"

내부 상태를 보고는 헛웃음을 흘리는 5년차들. 얼마나 심하면, 이제껏 단 한 번도 불만을 토해낸 적 없던 무진조차도 한마디 내뱉을 정도였다.

"형님, 이거…… 자다가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그러나 대답이 없는 천강. 무진이 고개를 돌린다. 응? 천강이 없다?

"얼레? 초아 누님. 형님 어디 갔나요?"

"천강? 방금 연화랑 같이 볼일 좀 본다고 함께 가던데?"

그러면서 초아는 떠나기 전 천강의 얼굴을 가만 떠올렸다. 막 미친놈처럼 웃는 게, 볼 것도 없이 사고 칠 상이다.

'……나까지 낄 필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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