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5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54화
54화. 물고기들을 꼬드기는 좋은 방법
짙은 어둠이 드리운 천산의 어느 동굴.
은밀한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두 그림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하나로 뭉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성공했나?"
"아니. 이번에도 습격이 있었다는구만."
"골치 아프군. 3달 전 기경만회 때도 그러지 않았나? 정체는?"
"모르네. 아무래도 윗선에서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흠. 그렇단 말이지? 알겠네. 그 사항은 전달하도록 하지. 자네는 다시 천마의 소교주 감시에 착수하도록 하게."
"알았네."
빠르게 사라지는 하나의 그림자. 남은 이가 나직이 한숨을 내뱉는다.
"대체 어느 놈이 우리 일을 방해하는 거지?"
최근 들어 외부와의 만남의 순간마다 누군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일이 잦아졌다.
안 그래도 천마의 소교주 일만으로도 정신없는 그들로서는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겨버린 셈이었다.
"일단 빨리 암운곡으로 복귀를……."
그때 그가 있는 굴로 누군가 들어왔다. 숨을 죽이고는 정체를 살피는 남자. 이내 상대를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흠. 분명 여기서 말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는데……. 음? 자넨 염화도귀?"
"하하핫. 맞네. 날세. 내 잠깐 동기를 만나서 이야기 좀 하고 있었다네. 아니 근데 흑철마괴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암운곡과는 꽤 거리가 되는 곳인데."
"나야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게 내 일 아닌가?"
"하긴. 그랬지. 그럼 더 돌아다니시게. 난 이만 먼저 가네."
염화도귀가 흑철마괴를 지나쳐 걸음을 옮긴다. 그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걸음을 빨리 놀렸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도 그럴 게, 흑철마괴는 교주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 아닌가. 아무래도 그로서는 마주하기 껄끄러운 수밖에 없었다.
그에 최대한 빨리, 그러나 티 나지 않게 그곳을 빠져나가려는 그 때, 그의 바로 뒤에서 싸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술교관 염화도귀. 내게 들킨 게 아닐까 생각하는 거라면…… 맞네."
흠칫.
"잘 가게."
하. 누구 마음대로……!
훙. 염화도귀가 빠르게 몸을 돌리며 도(刀)를 휘둘렀다. 그가 쥐고 있는 날붙이에서 뜨거운 기운이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뒤를 잡고 있는 이가 조금 더 빨랐다.
등에 손을 대고는 그대로 내기를 발산한다.
'지천뇌공.'
푸화악.
"커, 커헉……."
허리가 부러져 부들부들 떠는 남자. 그에게 다가간 흑철마괴가 그 모가지를 힘껏 밟으며 나직이 말한다. 마치 경문을 읊듯.
"배신자에겐…… 죽음을."
***
"어서 오게, 흑철마괴."
"신교의 하늘을 뵙습니다."
"어떻게 요즘은 잘 지내는가?"
흑철마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한 차례 슥 살펴본 그는 찬찬히 말을 이었다.
"일단 순항중입니다. 그 천강이란 아이가 생각보다 위협을 잘 넘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로 인해 똥줄이 타는지, 간자들과 배신자들의 움직임이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소식이로군."
"지금의 흐름이라면 내년쯤에는 암운곡 내부는 다 정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여전히 암운곡 주변엔 늘 위험이 도사리겠지만 말입니다."
교주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흑철마괴는 잠시 차를 음미하다 잠잠한 어조로 물었다.
"그냥 그 소년에게 부탁을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우리 애가 암운곡을 졸업할 때까지 대신 화살받이가 되어 달라고?"
"이득이 될 만한 걸 걸면 되지 않겠습니까? 속이다 걸려서 적으로 돌아서는 것보단 충분한 이득을 챙겨주는 게 낫습니다."
"역으로 화를 내진 않겠는가? 지금 상황에 말일세."
"자신을 이용해 먹은 걸 알면 영원히 적이 될 성격입니다. 사실을 털어놓는 게 낫습니다."
일리가 있다 판단했는지, 교주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흠.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하지."
***
우웅.
임맥의 기운이 한 차례 출렁인다.
그것들은 뭉쳤다 풀어지길 반복하면서, 꾸준히 뱅글뱅글 원을 그려나갔다.
우웅.
다시금 떨림이 일었다. 이전보다 큰 물결이 일었다.
그것은 동그란 구슬마냥 응집되었다가 바닥에 쏟은 물처럼 펼쳐지기를 반복했다.
우웅.
그리고 마침내 멈춘 움직임.
천강의 눈이 살며시 뜨인다. 입가엔 진한 미소가 올라온다.
'됐다. 완성이다!'
1개월간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구나!
***
1개월 전.
기경만회가 끝난 이후로, 천강은 쭉 한 가지 위기감에 시달려 왔다.
투파창귀라는 현 마교 서열 1위를 목도하는 순간,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에잇. 새 삶을 시작할 거면 여울나무에서 시작할 거지, 왜 하필 그 적대세력인 암운곡에서 시작해 가지고.'
안 그런가? 그렇지 않았으면 좀 설렁설렁 강해질 텐데 말이야.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여울나무에서 출발했으면 교주랑 척을 지는 셈이다.
천강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그냥 마교에서 시작한 것 자체가 문제구나.'
아무튼 이미 반 강제적으로 한쪽 편이 되어버린 상황. 천마의 소교주로 낙인찍힌 지금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일단 강해져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강해지려면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그때 천강의 뇌리에 스쳐지나가는 이전의 기억.
'잠만. 그러고 보니 녀석이 현경이라고 했지?'
이미 과거 천산의 보고에서 현경과 맞붙어서 거의 승리를 쟁취할 뻔한 천강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당장 무엇을 해야 할 지가 떠올랐다.
'일단은 내공 양을 왕창 늘리는 거야. 그 광활한 현경의 내기를 다 빨아들이고도 탈나지 않게 내 내공부터 빵빵하게 늘리는 거지.'
내기의 양을 빨리 늘리려면 융합하는 속도가 빨라야 한다.
융합하는 속도가 빨라지려면, 최대한 많은 인간들의 내기를 흡수해야 하고.
그런데 문제는…….
'물고기는 많은데, 합법적으로 잡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지.'
반만 뜨인 천강의 눈이 좌우로 움직인다. 사백동굴 내로 수많은 아이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훈련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흠. 뭔가 좋은 방법이 없나?
그때 천강에게 다가와 한마디 하는 연화.
"천강. 나 훈련하는 것 좀 봐주면 안 돼? 뭐가 문제인지 영 모르겠어."
"나 바빠. 초아 누님에게 부탁해."
"아 쫌! 봐주면 네가 부탁하는 거 나도 들어줄 테니까!"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오호라……?'
***
"야, 들었어?"
"뭔데?"
"천강이 직접 훈련 지도를 해준데! 부족한 부분을 잡아주고 세심히 고쳐주기까지 한다고 하더라고!"
"뭐? 진짜로?!"
훈련하느라 바빠야 할 사백동굴. 그런데 기이하게도 기나긴 줄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쭉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한쪽 끝에는 천강이 앉아,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상담을 해주고 있다.
"알겠어? 지금 그 기술이 성공적으로 발현이 안 되는 건 하체 때문이야. 다리 운동을 열심히 해서 장딴지에 힘이 실리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란 말이지."
"그, 그렇구나! 그런 간단한 이유였다니……. 정말 고맙다, 천강!"
"별 말씀을."
"자, 여기 대가!"
기쁜 마음으로 천강에게 손을 내미는 3년차 선배. 천강 또한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는 내기를 쭉쭉 흡수한다.
"다음에 또 상담 받으러 와도 되지?"
"물론이지. 그런데 알다시피 아직 한 번도 못 받은 사람이 꽤 돼서 한동안은 기다려야 할 거야, 선배."
"그 정도야 알지. 정말 고맙다, 천강!"
상담 받은 이가 떠난다. 그러자 바로 그 자리를 또 다른 아이가 대신한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응. 대신에."
"알아. 너 한 시진 쉬어야 한다고?"
"정답! 그러면 나 잠깐 눈 좀 붙일게."
쉬는 척 하며 내기를 하나로 합치고, 융합이 끝나면 새로 흡수하고.
그렇게 천강은 단 1개월 만에 100명분의 기운을 응집해 북명신공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매우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제 앞으로 기를 융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일각(一刻)이면 충분!'
천강의 어깨에 부쩍 힘이 들어간다.
좋아. 이 기세를 몰아 숫자 1,000명을 후다닥 채워보자고!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 가지 문제점에 봉착했으니…….
'잠깐. 얜 저번에 상담 받았던 앤데? 얘도?'
3개월쯤 되자, 암운곡 훈련생이란 훈련생의 내기는 모조리 흡수해 버린 탓에 더 이상 의미가 없었던 것.
심지어 조교들까지 상담해주며 탈탈 털어먹은 탓에 더는 새로운 내기가 보이질 않았다.
'제, 젠장. 이런 식으로 훈련이 중단되어버릴 줄이야!'
어디 괜찮은 애들 없나? 요샌 암살자도 뜸한데.
그런 그 때, 천강의 눈에 무진이 후다닥 뛰어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형님."
"어. 어디 갔다 와?"
"다들 모이랍니다."
"지금? 누가?"
"교관님이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무진과 무리를 따라 이동하는 천강. 사백동굴 중앙으로 나아가자, 미리 와 있던 방중이 그들을 맞이한다.
"여어. 천강. 어서와."
"응, 방중 선배. 교관이 모이라고 했다면서? 혹시 아는 거 있어?"
"뭐…… 이맘때쯤이면 아마 딱 하나밖에 없지?"
"뭔데?"
"가을걷이."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 딱 그 시기구나.
암운곡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런 저런 일로 훈련 외의 일들을 하게 된다.
봄에는 쥐 굴 신입들을 맞이할 준비를.
여름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암운곡 바닥에 쓸려온 흙들을 치우는 일을.
겨울에는 마을 교통을 위한 제설작업을 하고, 지금 시기인 늦가을엔 추수를 위해 지원에 나가게 된다.
이 중 수확을 도우러 가는 일에는 단 한 명의 예외자도 없이 모두 동원되는데, 이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그랬다.
외부에서 들여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마교에서는 먹을 것을 자급자족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초가을이 아닌 늦가을이 돼서야 부른 걸 보면, 아마 태풍피해보다는 수확을 위해 부른 걸 거야. 확실해."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조금 있으니 교관이 나타나 똑같은 설명을 했다.
"……하여, 글피부터 보름간 추수 일을 도울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도록."
킁. 농사라니.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천강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하루 종일 볕 아래서 일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아, 난 지금 풀베기 따위 하고 있을 시간 없는데!'
지금이야 내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해 그저 그런 살수들을 보내오지만, 슬슬 이상함을 느끼고는 진짜배기들을 보내올지 모른다.
먼젓번에 일귀도 제법 강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안 되면 본인이 직접 나설지도 모르는 일.'
그전에 어떻게든 강해져야만 한다. 시한부 인생도 벗어났는데, 이번 생은 절대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그에 어떻게 혼자만 빠져나가볼까 꿍꿍이를 부려보려는 그 때,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여울나무 새끼들하고 같이 작업하나요?"
"그래. 여울나무 쪽도 함께 한다."
그 순간 확 밝아지는 천강의 얼굴.
'오호라. 걔들도 전부 나온다 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