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5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52화
52화. 격전
스슷. 스스슷.
무대 위로 한 소녀의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뒤를 날카로운 바람이 뒤쫓는다.
그러다 기회라 여겼는지, 상대를 향해 쭉 돌진해 나가는 아이.
파앙.
마치 한 발의 화살처럼 단숨에 쏘아져 나간다.
그러나 그 상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무릎 위에 놓인 고금의 줄을 튕겼다. 그러자 그 순간, 바닥에서부터 바람 갈퀴가 피어오르며 둥글게 막을 형성했다.
소요절기 제 3식, 연꽃.
"쳇."
쏘아져 나가던 소녀가 발로 바닥을 박찬다. 몸이 활처럼 휘더니, 그 위험영역에서 단번에 벗어난다.
그리고는 상대를 보며 가만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
쥐 죽은 듯이 집중하던 구경꾼들의 환호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루할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지금껏 봐온 그 어떤 기경만회 경기보다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말이 1년차의 싸움이지, 이것은 거의 마인들의 싸움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잘한다! 둘 다 힘내라!"
"접근해서 단번에 장외로 밀어버려!"
"어떻게든 방어해!"
시끌시끌한 관중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화정마녀. 그녀는 연화의 몸놀림에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권광투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께서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특히 보법이 말이 아니게 성장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분명 쥐 굴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주먹질과 발차기를 열심히 단련할 뿐, 보법과 신법엔 늘 게으른 딸아이였다. 그런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이 정도의 성취라니?
"아무래도 그 천강이란 아이를 보고 도전을 받은 모양입니다. 본디 주변에 자신보다 강한 또래가 있으면 자극을 받곤 하잖습니까?"
"그래. 그래서 늘 경쟁자가 있는 게 좋은 법이지."
그러나 진실은 그들의 생각과는 꽤 달랐다.
연화가 보법이 늘게 된 건 천강 때문이 아닌 초아 때문이었다. 매번 약 올리고 도망 다니니, 어떻게든 잡겠다며 힘도 속도도, 그리고 기교도 자연스레 는 것이었다.
"근데 문제는 문제네요. 저래선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겠는데요."
그도 그럴 게, 상대는 사각 모양의 경기장 한 쪽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연화의 입장에서는 적을 공격하려면 저 날카로운 음파 공격을 어떻게든 뚫고 유효타를 먹여야만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아가씨께선 아직 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시겠죠?"
"당연한 소릴. 그렇게 명상을 하라고 해도 먹고 뛰는 걸 더 좋아하니……. 아무래도 이번 판은 힘들겠다고 봐야겠지."
최소 기를 응집해 음공을 쳐낼 수만 있어도 승산이 있을 텐데.
그러나 그가 지금껏 봐온 바로는 쉽지 않아 보였다.
'먹는 것에 쏟아 붓는 열정에 반만 노력했어도 진즉에 일류는 넘어섰을 것을. 킁.'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연화의 두 주먹에 기운이 맺히더니, 상대의 음공을 쳐낸 것이다.
권광투마의 눈이 단번에 휘둥그레지는 순간이었다.
"연화, 그만 포기해."
"헹.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지."
"넌 날 이길 수 없어. 왜 포기를 안 하는 거야? 잘못하면 다친 다고!"
"간단해! 이번에 우승하면 하루 한 번에서 하루 두 번으로 고기를 늘려준다고 했거든!"
청청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동안 봐온 바에 의하면 연화는 먹을 것, 특히 고기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마인들은 정신적으로 문제 하나씩은 달고 산다더니…….'
연화가 다시 자세를 잡는다. 청청 또한 고금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는 흘끗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아직도 무진의 자리는 비어 있다. 청청은 입술을 짓씹고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연화야. 미안하지만 난 절대 질 수 없어.'
무진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말한 뒤 협조를 구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그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오른쪽 허벅지가 아려온다. 청청은 다시 고금 줄을 튕겼다. 그러자 매섭게 쇄도해나가는 바람의 칼날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연화의 두 주먹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더니, 그것들을 쳐낸 것이다.
"싸움은 끝났어!"
***
"자, 이쯤이면 되겠지?"
고개를 돌려 동생들이 있을 곳을 바라보는 일귀. 설마 이리 멀리 이동해와 싸워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이러다 제 동생들이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시려고."
"에이. 안 그래. 네 동생들이 너를 두고 도망친다? 절대 그럴 애들이 아니던데?"
"……."
"그리고 걔들이 도망가도 난 널 잡으면 그만이니까 상관없어."
"마치 경공마저도 절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 하시는군요."
"중간에 내뺄 생각으로 싸움 건 거라면 절대 성공 못한다, 너."
훗. 일귀에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곧바로 자세를 낮추고는 천강에게 집중하는 남자.
서늘한 시선이 천강에게 날아와 꽂힌다.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와 같이, 몸을 웅크린 자세가 매우 위협적이다.
'하……. 그래, 이거지. 이게 진정 암살자의 눈길.'
수준 낮은 것들에게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기운.
살기는 살기이나, 수십 년을 벼르고 벼른 그 날카로운 예기는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직접 마주 대 살을 도려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모처럼 진짜 고수와의 만남에 천강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뭘 망설이는 거지! 자, 어서 덤벼봐!"
팡.
파공음이 울렸다. 분명 앞쪽에서 울렸으나, 천강은 후미를 방어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쪽에서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날붙이.
천강은 온몸에 소름이 바짝바짝 오르는 걸 느꼈다.
'오랜만이다. 이런 고수는!'
물론 얼마 전 현경급 고수와 맞붙은 적이 있었으나, 당시엔 무진의 상태가 급박해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쫓길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 천강의 신형이 일순 좌우로 일렁였다.
암운행보.
츠팟. 츠츠츳.
어떻게든 뒤를 잡으려는 자와 그 공격을 피하려는 자.
천강과 일귀의 신형이 수풀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 수풀 한 가운데로 미친 듯이 움직인다.
'주태 녀석 제법이잖아?'
발밑에 기운을 나선으로 움직이는 간단한 방법만으로도 언제 어느 자세에건 간단하게 움직임을 바꿀 수 있다니.
그러다 보니, 일귀의 매서운 공격들이 천강에게 유효타를 전혀 먹이지 못하고 있었다.
전생에 따로 신법 보법 배운 것이 없어도 잘만 칼질을 피하고 다닌 천강으로서는 거의 발에 날개를 단 꼴이 된 셈이었다.
"어이. 그 정도밖에 안 돼? 그런 식으로는 절대 날 쓰러뜨릴 수 없을 텐데?"
"큿."
천강은 일귀를 더욱 보챘다. 그의 진짜 힘을 끌어내, 이번엔 북명신공의 방어수준을 한 번 점검해볼 생각이었다.
그 도발이 성공한 걸까. 갑자기 일귀의 기세가 돌변했다.
살혼살검 제 4식 활개.
갑자기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수십의 암기들.
"그 정도로는 끄떡없다니까!"
그러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매서운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기를 이용해 임의로 만든 회오리였다.
사방에서 암기들이 짓쳐든다. 천강의 몸이 강한 바람에 허공에 붕 떠오른다.
오오. 이것은……?
"이번 건 도망가지 못할 겁니다!"
살혼살검 제 5식 용오름.
바닥에서부터 내기를 머금은 수많은 암기들이 하늘 위로 솟구친다. 이내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금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바닥에 착지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귀.
'성공이다.'
살혼살검의 최종 비기 용오름. 웬만한 화경 고수도 저것에 한 번 걸려들면 뚫고 나오긴 힘들다.
이 비기의 최대 단점이라면 기술이 시전 될 때까지 상대를 영역 안쪽에 묶어두어야 하는 것인데, 그의 적은 오만함이 가득해 가만히 구경을 했고 그 덕에 일귀는 손쉽게 기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너덜너덜해져 시체가 되는 걸 지켜보는 것 뿐.
그런데 선풍을 바라보던 일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회오리 안에 갇혀있는 소년이 여유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서, 설마…….'
팡! 하늘 위로 솟구치던 기의 폭풍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는 이내 서서히 와해돼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결말을 지켜보던 일귀가 뒤로 자빠졌다. 천강은 그의 앞에 착지하며 생긋 웃었다.
"오. 겉만 반지르르한 화경은 아니라더니 참말이구만? 이 기술을 당한 게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고깃덩이가 됐겠어."
"어, 어떻게……. 이 기술은 화경이라도 절대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뭐 내가 원체 잘나야 말이지. 왜? 어떻게 막았는지 궁금해?"
일귀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천강은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모조리 흡수했어. 날아드는 암기며, 날 공중으로 띄우고는 갈아버릴 것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이며. 그냥 모조리 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 봐봐. 눈앞에 있잖아?"
절망과 좌절에 빠진 남자. 천강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진 거 인정?"
"……인정합니다."
"좋아.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으니 내 한 가지 말해주지. 네 패인은 이 기술을 실패해서가 아냐."
"예? 그러면?"
소년이 웃으며 말한다.
"네 판단이 틀린 거야. 너 내가 흡공 쓰는 거 알았어 몰랐어?"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을 쓴다?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 그렇지만 이 기술도 안 먹히는데 다른 게 먹힐 리가……."
"쯧쯧. 그게 네 패인이란 뜻이야."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거리를 슥 벌리며 왈.
"광범위하게 공격하는 게 아니라, 하나에 집중해서 유효타를 먹일 생각을 했어야지. 어떻게든 내 뒤를 잡아서, 단 한방에 죽이겠단 각오로 말이야."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렇긴 한데, 적어도 돌멩이 100개 던지면서 그 중 하나라도 맞아 죽길 바라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중간에 실패하더라도 도주각을 잡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지금 널 봐봐."
천강의 시선이 일귀의 단전에 닿는다. 일귀의 입이 곧바로 다물어진다.
"이 기술 한 방에 있는 내공 싹 끌어다 써버렸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겠어?"
"자고로 싸움에서 이기려면 내 모든 것을 던져야……."
"아, 변명은 됐고. 일어나. 그리고 덤벼."
"예?"
"두말 하게 하지 마라. 일어나. 덤비라고."
기세에 눌린 일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천강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천강은 일귀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네가 화경들하고 일대일로 싸워본 경험이 별로 없는 모양인데. 우리 정도 수준이 되면 화려함은 필요 없어.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해. 자, 한 번 해봐."
일귀의 움직임이 단조로워진다. 천강은 그를 더욱 몰아붙였다.
"더. 더 빨리 움직여. 잔가지는 더 쳐내고. 한 방 한 방에 네 목숨을 걸란 말이야."
슷. 스슷. 스슷.
"더 빠르게. 움직임은 최소화 하고! 팔다리 더 자유롭게 써."
더욱 더 빨라지는 움직임. 그리고 단조로워지는 공격.
그때 밑에서 훅 올라오는 발차기에 천강의 상의가 후두둑 찢겨나갔다. 그제야 천강은 만족스런 얼굴로 거리를 벌렸다.
"잘했어. 나보다 신법이나 권각술이 더 나아서인지는 몰라도 느는 게 빠르네."
천강의 칭찬에 일귀가 숨을 돌리며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왜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 겁니까? 전 오늘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당신의 동료를 인질로 잡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이라니요."
"정말 그게 궁금한 거야?"
그렇다며 일귀가 고개를 끄덕인다.
천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무림이란 게 그렇잖아? 아침엔 칼을 서로 맞대며 싸우다가도 오후에는 술 한 잔 걸치며 푸는."
"예? 그게 무슨……."
"아, 살수들의 세계는 안 그러려나? 아무튼 오늘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도 신경 안 쓸 테니."
"그런……."
일귀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리고는 마치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가 천강 앞에 넙죽 절하며 외쳤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인!"
"대인은 무슨."
그저 오늘 기분이 좋아 몇 마디 조언을 해준 것뿐이었는데, 이리 나오니 괜스레 쑥스러운 천강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에에? 잠깐 뭐라고?"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천강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아니, 왜?"
"지금껏 살아오면서 대인처럼 큰 그릇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을 형님으로 모신다면 인생에 큰 행운일 것입니다."
천강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는 왈.
"야야. 너 어디 가서 네 얼굴을 봐라."
"얼굴요?"
"네 나이가 몇인데 나한테 형님이야? 형님은 무슨. 어디 호숫가나…… 아니, 아니다. 차라리 날 봐봐. 이런 어린애한테 형님 소리 하고 싶냐?"
그러자 일귀의 대답이 더 가관이다.
"그럼 주군?"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