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5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51화
51화. 제안
"음? 천강이 왜 이렇게 안 오지?"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석 출구를 살피는 초아.
천강으로부터 초아가 돌아다니지 않게 붙들고 있어 달라 부탁을 받은 무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 도로 좌석에 앉히며 말했다.
"큰 것 좀 본 뒤, 따로 만날 사람이 있다고 늦는다 했어요."
"아, 그래?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복면을 쓰고 다니는 거야?"
"음. 천강 형님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전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서."
"흐응~"
호기심을 표하는 초아. 그러나 더 캐묻진 않는다.
그리고 그때 4번째 경기가 끝이 나고, 다섯 번째 경기시작을 위해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자, 여러분. 이제 마지막 경기입니다. 원래대로라면 5년차 경기가 치러져야 했으나, 양 진형 책임자들의 만장일치로 이번 대결이 더욱 재미있을 거라 여겨져 맨 뒤로 이동시켜야만 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몇몇 사람들이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1년차들의 경기가 시시하단 걸 이미 몇 해 동안 지켜보며 깨달은 이들이 술이나 마시자며 일어났다가, 흥미를 갖고는 도로 자리에 앉은 것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남은 대결은 1년차들의 대결입니다. 그러나 그 실력은 이미 마두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 만큼인 상황……! 자, 양 진형 훈련생들 나와주세요!"
좌우 입구에서 두 아이가 나온다.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뭐야? 대단한 인물들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계집애들이잖아?"
"그러게. 심지어 쟤 좀 봐. 한 쪽 다리가 없는데? 저러고 싸운단 이야기야?"
"참네……. 그래도 좀 지켜보자고. 책임자들이 만장일치 했다잖아."
"그래도 그렇지. 쯧쯧. 대체 뭐하자는 건지."
그러나 정작 경기장 위로 올라온 두 사람은 구경꾼들의 반응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서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여울나무 대표가 너였어, 청청?"
"응. 그렇게 됐어. 원래 참가하기로 한 이가 행방불명이 돼서 말이야."
"후웅. 난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랑 어찌 싸우라고 배치를……."
그러나 연화의 그런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청청이 들고 있던 고금을 내려치는 순간, 두 사람 사이 무대 중앙 위로 칼날과 같은 바람이 쏘아져 나갔기 때문이다.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바닥의 참상.
마치 20척은 족히 되는 곰이 앞발을 힘껏 휘두른 것 마냥, 바닥이 깊게 패여 있다.
"난 약자가 아냐. 이기고 싶다면 전력으로 싸워야 할 거야."
"훗. 그래야 할 것 같네. 간만에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어."
두 사람이 자세를 잡는다.
어느덧 불만을 토해내던 구경꾼들은 침묵을 유지하고, 수습에 나서려던 사회자는 마른침을 삼킨다.
"그, 그럼 지금부터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초아와 천강, 그리고 비어있는 무진의 자리를 한 차례 바라본 청청이 재빨리 고금 펼치고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힘껏 양손을 놀렸다.
"시작!"
"누가 이길까요?"
호접일검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적삼혈마가 나직이 대답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 쪽이 이길 겁니다."
"그 정도입니까? 저 다리 하나 없는 계집이?"
호접일검으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암운곡에서 대표로 나와 있는 아이는 무려 마교 서열 17위 권광투마의 여식 아닌가?
얼마 전 간자들을 통해 절정 수준의 내기를 모았다는 걸 전해 들었을 때는 정보가 잘못 됐을 거라며 재조사를 시켰을 정도였다.
열 살에 절정 내공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보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공 양은 절정 수준이 맞고, 다만 아직 깨달음은 거기에 못 미치는 듯합니다."
그것을 통해 왜 사람들이 마두의 자식 마두의 자식 하는지를 알게 된 호접일검이었다. 얼마나 좋은 영약을 먹였기에 저 나이에 절정이란 말인가, 참.
그런데 지금 그런 아이를 이길 수 있단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저 계집은 소요악사의 손녀입니다."
"소요악사 말입니까?"
소요악사.
세상의 모든 악기를 제 몸처럼 다룰 줄 안다는 신비의 노인. 무공 실력도 상당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체 그런 분의 혈통이 어떻게 이곳에……."
"투파창귀님과 소요악사. 두 분은 형제십니다."
"예에? 그, 그런…… 그럼 설마 저 악기도?"
"맞습니다. 신병이기(神兵利器)입니다."
전설의 무구와 뛰어난 혈통의 만남이라! 그제야 호접일검은 적삼혈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이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군요."
"다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특별한 경우가 없어야 합니다."
"예?"
"소요악사의 주특기는 음공이기도 하지만, 경공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 소녀는 다리가 한쪽 밖에 없지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물론 그런다 해도 신병이기의 힘을 생각한다면 지는 게 쉽진 않겠지만.
"그런데 왜 표정이 그리 심각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적삼혈마는 손을 한 번 내젓고는 다른 일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천마의 소교주를 잡기 위해 무영삼귀가 움직였겠지.'
그들이 잘 해줘야 할 텐데.
무영삼귀. 강호에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살수 중 세 손가락에 드는 자들이다. 셋이 늘 한 몸처럼 움직이며, 세 명 모두 화경이다.
특히 첫째의 경우엔 무늬만 화경이 아닌 진짜배기.
세간의 풍문에 따르면, 그들의 기습을 받을 경우 제 아무리 현경도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묵범귀영의 기록을 깬 천마의 자제라 한들, 이번에는 절대 살아남기 힘들 것이리라.
'교주께 명월객잔에서 국수라도 사드려야겠군요.'
***
팡. 팡. 파앙!
파공음과 폭음이 연달아 일어난다. 자리에 앉아 꼼짝을 않는 천강을 향해, 일귀가 그 주위를 돌며 날카로운 일격들을 날려댄다.
그러나 천강의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올라올 뿐이다.
"오오. 너도 화경? 요새 아주 개나 소나 다 화경이야."
"……너 또한 화경이지 않나?"
"뭐 그렇긴 하지?"
천강의 주변을 가만히 맴돌며 기회를 노리는 일귀. 천강의 밑에 깔려 있던 그의 동생들이 큰 소리로 외친다.
“형님. 주의하십시오!”
“이 녀석 흡공을 씁니다!”
흡공이라고? 그제야 일귀는 눈앞에 소년에게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안 그래도 동생들이 붙잡혀 있어 제대로 힘을 실지도 못하는 와중에, 공격하는 족족 공력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니……. 공격하는 만큼 그의 손해였다.
“응? 왜. 더 안 덤벼?”
“………….”
“싱겁기는. 이 새끼도 겉만 번지르르한 화경이었구만.”
"구차한 변명일 수 있지만, 인질이 있으니 제대로 싸우지를 못하겠다."
"흐응. 그 이야기는 인질 없이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뜻?"
"그래."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무영삼귀 세 사람 중 첫째 일귀는 특별하다. 중원의 제1살수라 불리는 살혼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동료인 두 동생은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그가 우연히 만나 키운 것이었다. 그러니 같은 화경이라도 그 경지는 천지 차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난 현경의 문턱을 바라보는 경지.'
상대 또한 만만치 않겠지만, 팔 하나 정도 포기한다면 충분히 그 목숨을 취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인질이 잡혀있는 상황. 그에 일귀는 소년의 호기를 자극하기로 결정했다.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떻겠나?"
"내가 왜?"
"난 겉만 번지르르한 화경이 아니다. 너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이런 망나니 같은 짓은 그만 두고 실력자답게 둘이서 해결을 보자."
그러자 소년, 픽 웃으며 왈.
"지랄하네. 그런 녀석들이 인질을 잡는 시도를 해? 야, 솔직히 너희들도 지금 이 짓을 나한테 하려 했던 거 아냐? 엉? 내가 먼저 움직여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어후……. 고생 좀 할 뻔 했어. 그치?"
쉽지 않군.
첫 번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걸 깨달은 일귀는 이번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꺼내들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만약 네가 이기면, 우리가 받은 의뢰내용과 의뢰자의 정체를 가르쳐 주겠다."
"오. 그건 흥미롭네. 만약 내가 지면?"
"동생들을 데리고 조용히 물러나지."
"하!"
천강이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좆 까는 소리하네. 너 이 새끼, 지금 혓바닥 놀리는 거 딱 걸렸어. 내가 졌는데 조용히 물러난다고? 날 안 죽이고? 에라이. 퉤. 지나가는 코흘리개들을 속여라."
대충 둘러대며 천강을 유도하던 일귀의 얼굴에 당혹감이 올라왔다. 설마 그게 그리 해석될 거라고는 생각 못한 까닭이다.
"그, 그러면……."
"아 됐거든? 내가 너랑 싸워서 지면 내 목이 날아가는데, 내가 그딴 승부에 응하겠냐? 엉? 이대로 있어도 내가 이기는데?"
"큭……."
일귀의 얼굴에 절망감이 올라왔다. 아직 어린 나이라 적당히 말로 꼬드겨 볼까 했는데, 반대로 상대에게 경계심만 심어준 꼴이 되어 버리다니.
그때 천강이 흥미로운 제안을 꺼냈다.
"그럼 이건 어때?"
"뭐지?"
"방금 그거 말고, 다른 걸 걸고 내기하자."
"듣고 있다. 말해봐라."
그러자 소년이 눈을 반만 뜨고 말한다.
"어쭈. 말해봐라?"
"말하……시오."
"말하시오?"
주위를 한 번 슥슥 둘러본 일귀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띠는 천강.
"형님!"
"저희 때문에 고개를 숙일 필요 없습니다!"
밑에서 꿈틀거리며 발악하는 두 녀석의 내기를 한 차례 더 흡수해 조용히 시킨 뒤, 천강이 찬찬히 입을 움직인다.
"내 제안은 이거야. 일단, 네가 나와 싸워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너희 모두 그대로 보내주겠어."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내가 이기면,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줘. 목숨 빚 진 셈 말이야. 어때?"
고민을 하던 일귀가 천강에게 나직이 물었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소년은 마치 자신이 이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놓아준다? 그것도 자신의 목을 노리던 살수를?
"너 공자님이 뭐라 하셨는지 알아?"
"공자……님이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글자를 읽을 줄은 알아도, 십삼경(十三經)을 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지. 지혜가 넘치더라도 덕이 없다면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잔머리랑 꾀는 꽤 뛰어난 편이거든. 그래서 이렇게 너희들 엿도 먹이고 그랬잖아?"
기분이 좀 나쁘지만 일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내가 말이야. 이번 생은 좀 착하게 살아보려고. 옛날 같았으면 확 그냥 바로 골로 보내버렸을 텐데, 요 근래는 그런 이유로 까불어도 한 번씩은 참고 기회를 주는 중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66번 녀석은 시체로 어디 땅속에 파묻혀 있었을 것이다. 2번이나 13번, 그리고 소운인지 뭔지 하는 그 선배 놈까지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천강 본인의 생각이고. 현실은 그저 오늘 기분이 좋아 그러는 천강이었다. 괜히 전생에 마두들이 흑살마신을 괴짜라고 평가한 게 아니었다.
암운곡에 돌아가면 침대가 깔려 있을 생각에 신이 난 천강, 생긋 웃으며 묻는다.
"자.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일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로서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미리 말하지만, 전 제 동생들과는 꽤 다를 겁니다."
그러자 천강 또한 씨익 미소 지으며 왈.
"나도 미리 말하는데, 난 지금껏 네가 본 화경들과는 차원이 다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