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3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35화
35화. 가택 침입자들의 말로
"그, 그만……."
"여어. 이제 좀 진실을 말할 생각이 들어?"
무려 반 시진동안 몽둥이찜질을 당한 제갈태유.
고개를 든다. 열 살 배기 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소를 띠고 있다. 그 앞에서 제갈태유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사실을 말할 것이냐, 아니면 거짓을 고할 것이냐.
'안 돼. 겨우 이런 꼬맹이에게 나 제갈태유가 굴할 수는…….'
그러나 한손에 들린 몽둥이를 보는 순간,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맞았다간 진짜로 죽을 것 같았기에.
"실은…… 흑살마신이 죽은 걸 확인한 뒤, 그의 물건들을 훔쳐가려 했습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응? 나는 팔 안 아프고, 너는 몸 안 아프고. 자자, 이제 일어나."
"네, 네엣. 감사합니다."
"걸을 수 있겠어?"
"네에……."
천강이 그의 팔을 슥슥 쓰다듬어 준다. 원래대로라면 머리를 만져줄 터이나, 이제 열 살밖에 안 된 꼬맹이라 키가 안 닿은 탓이었다.
"고생했어. 그럼 이만 돌아가 봐."
"저, 정말 보내주시는 건가요?"
"응. 내가 약속했잖아? 어여 가. 비참하게 마교에서 죽지 말고 제갈세가까지 잘 돌아가라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인."
"그리고 왜 돌아왔냐고 물으면……. 음. 그래. 흑살마신이 살아있었다고 핑계를 대. 그럼 아마 뒤에서 이 사건을 꾸민 놈들도 바로 납득할 거야."
아마 다시는 이곳을 노리지도 않겠지. 죽은 줄 알았던 흑살마신이 살아있다? 캬! 나라도 지려서 안 올 듯.
죽기 전 마교 서열 1-10위와 10 대 1로 싸워 이긴 전적이 있으니, 다시는 이곳을 넘보는 놈은 없을 것이라 확신하는 천강이었다.
"대신 외모는 적당히 거짓말해야 하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넙죽 절한 뒤 절뚝거리며 시야에서 멀어지는 남자. 그렇게 천강은 제갈태유와 헤어졌다.
"그럼 어디 다른 놈들도 매질을 해주러 가볼까?"
도둑질을 하다 걸렸으면, 응당 죄 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화경 놈은 죽었을 테고. 마인 두 놈은 적당히 반 시진씩 손봐주고 돌려보내자고 생각하는 천강이었다.
그러나 그런 천강의 계획은 틀어졌으니, 진기를 모두 빼앗기고 점혈을 당한 탓에 지붕에서 떨어진 마인 둘이 모두 목이 부러져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끽해야 살아있는 건, 얼굴이 거무틱틱하게 변해 산송장이 되어있는 화경고수뿐. 천강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어. 도둑형씨~ 아직 살아있네?"
"난 도둑이 아니다……. 이 몸은…… 마교서열 97위 마도추귀다……."
"이야. 마두였어? 아니 그런 대단한 분이 왜 남의 집을 털러와?"
정말 놀랍다는 듯 묻는 질문에 녀석이 버럭 화를 냈다.
"난 이곳을 도둑질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집주인을……. 쿨럭쿨럭."
"야야. 제갈놈이 다 불었어. 너희들 도둑이라고."
"거짓이다. 우린 그런 천박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뭐 전후사정은 됐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 있어?"
오해를 해명하고자 하나, 말이 1도 안 먹히는 천강.
안 그래도 죽어 가는데 그로 인해 성질이 뻗쳐 더 빨리 죽을 것만 같은 마도추귀였다.
그리고 실제로 화를 낼 때마다, 간신히 막고 있던 독이 온몸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마도추귀는 분노를 삭이며 나직이 물었다.
"대, 대체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그런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짙은 내공이라니……. 설마 반로환동한 흑사대냐?"
흑사대는 간자들을 처단하는 마교의 비밀단체다. 늘 은밀히 움직이기에, 전생에 천강조차도 그들의 존재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흑사대가 아닌 천강은 솔직하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글쎄. 그냥 평범한 무림인?"
"크, 큭큭큭……. 하긴. 곧이곧대로 대답을 해줄 순 없겠지. 쿨럭. 쿨럭쿨럭."
마도추귀의 입에서 다량의 피가 쏟아져 나온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는 사력을 다해 입을 움직였다.
"그, 그럼 죽기 전…… 마지막으로 묻자……. 그것만은 꼭 대답을 해다오."
"뭔데?"
"난 화경이다. 그런데……. 쿨럭쿨럭. 도, 독에 당했다……."
진기가 충만해지고 각 기혈이 뚫려 신선의 골격을 갖추는 것을 환골탈태라 한다.
그리고 그 환골탈태를 겪게 되면, 자연스레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를 화경이라 칭했다. 그렇기에 보통은 화경부터는 독에 당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런 꼴이 되었냐 이 말이지?"
"그래……."
"너 서열이 어떻게 되었더라?"
"마교 서열 97위…… 마도추귀다……."
"97위. 쳇. 생각보다 별로 안 높네. 독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검증하기엔 애매하구만."
그러자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놈이 발끈한다.
"내 이래봬도…… 실력만으로는 능히 70위……."
"개소리 집어치우고. 말은 누가 못해? 실제로 70위에 들어보지 않았으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감히…….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뭘 알긴. 다 아니까 이리 말하는 것이다, 이놈아. 아무튼 어떤 독인지 궁금하다 했지?"
어차피 말싸움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강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독 바른 암기를 들어 그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일각산독이라고 알아?"
"그게…… 뭐지?"
"뭐 모를 줄 알았어. 나도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으니까. 약 55년 전에 사천당문의 가주가 직접 만든 독인데. 그 뭐랬더라? 화경급 고수라 할지라도 일각이면 완전히 중독 시킬 수 있다고 했던가? 암튼, 몸이 서서히 굳어가다가 종국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아."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그런 걸……. 쿨럭쿨럭."
"어떻게 내가 그걸 가지고 있냐고?"
끄덕.
천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당가에 몰래 들어가서 훔쳐 나왔어."
"……?"
"아니 객점에서 우연히 그 가주 놈을 마주쳤는데, 겁나 재수 없게 말하는 거야. 지가 만든 독을 가지고 나왔으면 나 같은 건 바로 빌빌 거리게 만들 수 있다나? 하. 싸움 못하는 것들은 꼭 지고 나서 어찌 그리 입을 잘 놀리는지. 완전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니까?"
55년 전의 사천당문 가주?
추도마귀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게, 사천당문 전대 가주면 현경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데 눈앞에 어린 아이가 그런 그와 싸워 이겼단다.
물론 천강과 싸울 당시에 그는 화경이었으나,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추도마귀의 입장에서는 아득한 선배를 마주한 것과 같은 기분이라 할 수 있었다.
'하하핫. 진정한 고수를 못 알아보고 그 앞에서 까분 꼴이라니……. 아직 난 멀었구나.'
수치심과 분노를 표출하던 마두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막던 독기를 풀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싸움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 것이다.
천강은 시체 세 구를 내려다보며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흠.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잘못 생각한 것 같아.'
흑살마신이 살아있으면 더는 도둑이 안 들겠지 라고 생각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게 알려지면 날 아는 이들이 모두 찾아올 것 아닌가?
'난 다시 암운곡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지.'
이런 꼴로 흑살마신임을 밝혀서 득 될 건 조금도 없었다.
마교는 힘의 논리. 흑살마신이 어린 아이가 된 데다가 화경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단 사실이 퍼지면, 분명 손을 쓰러 올 것이다.
과거 북명신공 비급서를 얻기 위해 죽여야만 했던 마두들의 지인들부터 해서, 탐욕에 물든 현 마교의 고수들까지.
'젠장. 그럼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그냥 자리를 비우자니 자신을 찾는다고 온 집안을 뒤지다가 우연찮게 창고를 발견, 이후엔 물건들을 쏙쏙 훔쳐갈 것 같은 상황이다.
"안 되지. 암. 그건 절대 안 돼."
결국 천강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로 했다.
우선 시체들을 본보기로 집 밖에 일렬로 늘어놓고, 바위 하나를 주워와 검기로 경고성 문구를 쓴다.
『흑살마신 왔다감.
잠깐 자리비운 사이에 내 물건 손대면 가만 안 둔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지인들 중엔 그의 글씨체를 아는 이들이 많다. 천강은 십삼경(十三經)을 즐겨 읽었으며 심심할 때마다 그 글을 바닥에 쓰는 괴짜였기에, 그와 한 번이라도 임무를 함께한 이들이라면 그의 필체를 다들 알고 있었다.
천강은 홀가분한 얼굴로 창고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영약 몇 개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당장은 이 정도면 되겠지."
그 자신이 먹기 위해서라기보단, 동료인 연화와 아우 무진,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이래저래 도와준 초아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암기들.
천강은 독을 잘 처리한 뒤 그것들도 챙겼다. 당가에서 독을 훔쳐 나올 때 왠지 비싸보여서 함께 가져온 것이었는데, 정작 천강에게는 그다지 쓸모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초아랑 2번, 반반씩 나눠주지 뭐.'
자, 그럼 이제 암운곡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
***
상수리나무 숲 끝자락. 한 사내가 비척비척 몸을 움직이고 있다.
오목골의 출구를 향해 나아가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그의 이름은 제갈태유. 방금 전 천강이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건진 사내였다.
그는 흘끗 뒤쪽을 바라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건방진 꼬맹이놈. 감히 날 이 꼴로 만들어? 내 밖에 나가기만 하면, 바로 사람들을 끌고 와 아주 죽을 때까지 똑같이 매질 해줄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향후 마교와 힘을 합쳐 제갈을 집어삼킨 뒤, 강호를 호령할 위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이리 개 패듯 패?
순간 아까 맞은 기억이 떠오른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을 재빨리 비웠다. 그리고는 이 받은 수모를 몇 곱절로 갚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근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금방까지는 경황이 없어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는 명색이 정파 최고의 두뇌 가문 제갈세가 출신이다.
여유가 생기자 멈추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두 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분명 우리 내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단 말이지.'
과거의 기록들을 떠올려 본다. 강호에 등장했던 역대 마인들의 수많은 무공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러다 번뜩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 잠깐. 흡공이면……."
설마 진짜 흑살마신?!
제갈태유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 사실을 어서 알려야 한다. 마교에도, 그리고 그 윗선에도 알려야 해!'
나이가 예상보다 너무 어린 탓에 못 알아봤지만, 분명했다. 흡공은 딱 두 종류다. 천마신공 혹은 흡성대법.
그런데 얼마 전 천마의 아들이 암운곡에 들어와 수련하고 있다 했으니 천마신공은 아니고, 남은 건 단 하나. 흡성대법 뿐이었다.
'크하하핫. 이 사실을 알리기만 한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이번엔 보상을 톡톡히 받을 수 있을 거야!'
겸사겸사 건방진 꼬맹이를 손보는 건 덤!
그런 기쁜 희망을 가지고 오목골의 출구를 통해 나가려는 그 때였다.
"어……?"
눈앞으로 한 노인이 나타났다.
정돈하지 않아 이리저리 휘날리는 회색빛의 수염과 머리칼.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광대한 팔뚝. 그리고 야차를 떠올릴 만큼 괴팍한 얼굴.
"다, 당신은……."
"이것들이…… 이젠 하다하다 정파새끼까지 마교 내부로 들여와?"
"자, 잠깐.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 한데…. 저희 일단 대화로……."
"문답무용! 지옥에 가서나 변명해라, 이 입만 산 것들아!"
주먹을 꾹 움켜쥔 맹익이 있는 힘껏 머리를 내려쳤다.
단 일격에 제갈태유는 그 자리서 즉사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목이 부러지기도 전에, 스스로 지레 겁을 먹고는 심장이 멈춰버린 것이었다.
제갈태유를 처리한 맹익은 그대로 발을 놀려 흑살마신의 거처로 뛰어갔다.
"갈! 이것들 모조리 찢어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