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3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30화
30화. 암운행보
우웅.
임맥에서 한 차례 떨림이 인다.
천강은 눈을 감고는 두 개의 기운을 한데 모으는데 집중했다. 태극문양으로 뱅글뱅글 돌던 기운이 서서히 하나로 융합된다.
'거의 다 됐어. 이제 막바지.'
우웅.
다시금 떨림이 일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더욱 컸다.
천강의 의지를 받든 진기가 하나로 모인다. 섞이고 섞여 하나의 색으로 변모한다.
그러다 비로소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체내에 있던 모든 기운이 크게 요동쳤다. 그것들은 임맥의 아래부터 위 끝까지 쫘악 펼쳐졌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잔잔해졌다.
스스스.
파도의 일렁임이 멈춘다. 깊은 바다와 같이 고요함이 맴돈다.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성공이다.'
10명분을 흡수해 기의 바다가 안착했으니, 이제부턴 진기를 하나로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진(時辰)이다.
그래서일까? 살짝은 홀가분함이 올라왔다.
'이젠 싸움이나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로 조금은 덜 주저해도 되겠어.'
솔직히 그동안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뭐 1년차가 잘 나가니, 선배들 입장에선 아니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어이. 네가 이번에 최강자가 된 녀석이라고?"
"이거 우리가 인사라도 올려야 하나?"
"어이쿠. 최강자님. 인사 받으십시오. 쿡쿡."
뭐 대략 이런 식.
그래도 다 참고 넘겼다. 괜히 미리 손 봐줬다가, 다음번에 진기 흡수하려 할 때 싸우기 싫다며 싹싹 빌면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젠 다르다.
'자, 그럼 어디…… 선배놈들 손 좀 봐주러 가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깐족대는 선배들에게 손짓.
"어이. 선배들. 우리 잠깐 저~기서 이야기 좀 할까?"
***
"형님?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말은 그리 해도 천강의 얼굴엔 불만이 그득했다. 그도 그럴 게…….
'이것들 왜 이렇게 배짱이 없어?'
시비 트는 놈들을 불러내 손을 한 번 봐줬다. 그런 뒤 내공을 빼앗아 하나로 만들고 기분 좋게 그 다음 희생양을 찾는데…… 갑자기 불만 종자들이 막 도망 다니는 게 아닌가?
천강이 떴다 하면 바로 몸을 숨기는 녀석들.
나름 은밀히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소문이 난 모양이다.
'끙……. 그렇다고 좀스럽게 과거 일까지 끄집어내 족칠 수도 없고.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100명을 채우지?'
어디서 암살자라도 안 나타나나?
전생에는 그래도 이틀에 한 번 꼴로는 나타난 것 같긴 한데 말이다.
"천강?"
"예? 아, 초아 누님."
"고민 있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해?"
"하핫.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든다. 머리를 한데 묶어 늘어뜨린, 15살 즈음 되어 보이는 소녀가 수면 위에 서서 천강을 내려 보고 있다.
그녀의 발밑으로는 목검 단도가 자리해, 그녀의 몸을 물 위로 지탱해주고 있었다.
'보법, 신법, 경공에 특화라고 하더니…… 빈말은 아닌가 보네.'
천강의 시선을 느끼고는 방긋 미소 짓는 그녀.
"왜? 내가 물 위에 떠 있는 게 신기해?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다고 하면 가르쳐 주실 건가요?"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경공은 배워두면 분명 쓸모가 있어 보였다. 특히 치사하게 기습하고 도망치는 암살자들 쫓아할 때.
"나야 천강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줄 생각이야. 대신 알지? 우리 사문 들어왕!"
윽……. 그놈의 사문.
존심 상해서 절대 안 들어간다. 주태 녀석을 스승으로 모시라고? 에라이. 퉤.
그에 거절하려 했으나 천강보다 먼저 반발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연화였다.
"조교님. 그리 노력해도 이젠 소용없어요."
"무슨 뜻이야?"
"아빠가 천강을 저희 사문으로 들일 거라 하셨거든요! 후훗."
"뭐?! 그게 뭔 말이야? 당장 불어, 천강!"
초아가 쭈그리고 앉아 천강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린다. 그런 그녀에게 달라붙어 천강을 떼어내려는 연화.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지금껏 종용했는데 조교님 사문에 안 들어가는 거 보면 몰라요? 딱 봐도 들어가기 싫은데 조교님 생각해서 둘러대는 거고만!"
"무슨 소리야? 우리 천강은 부끄럼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그리고 천강이 퍽이나 너네 사문에 들어가겠다!"
"저희 사문이 왜요!"
"솔직히 우리 스승님은 서열 7위잖니? 꼭 개인 능력이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순 없지만, 17위보다는 더 낫지 않겠니? 호호호."
"이익!"
연화와 초아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리 노려보다 결국 다시 천강 앞으로 모였다.
"선택해, 천강. 나야, 요 꼬맹이야?"
"나지? 천강 나 맞지?"
역시 여자는 멀리해야…….
왜 사문에서 본인들로 선택지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
"천강?"
"천강!"
그때 다행이도 물속에서의 심법 훈련 시간이 끝났는지, 조교 소용이 밖으로 나오라 소리쳤다.
"다들 밖으로 나와라."
"야야. 빨리 나가자!"
"와아아!"
너도나도 허겁지겁 나가는 흐름에 맞춰, 연화와 무진이 또한 발을 움직인다.
"우리도 가자, 천강아."
"네, 누님."
제자리서 폴짝 뛰어 단도를 챙기고는, 물 위를 달리듯 걸어 나아가는 초아.
그걸 보니 왠지 조금은 탐이 난 천강은 그녀를 따로 불러내 설득했다.
"사문 안 들어가고 누님이 그냥 슬쩍 가르쳐주면 안 돼요?"
"안 돼. 이건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부탁인데요?"
두 손을 한데 모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부탁한다. 초아가 볼을 붉히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윽……. 그, 그래도 안 돼. 스승님에게 걸리면 나 진짜 죽는단 말이야."
"정말 안 돼요?"
반짝반짝.
그러나 확실히 기본은 되어 있는지, 이리저리 부탁해도 거절하는 그녀.
"그…… 넌 아직 사문에 안 들어가 봐서 모르나본데, 사문의 무공을 다른 이에게 함부로 가르치는 건 금기시 되는 일이야."
"저희가 남인가요?"
"그, 그건 아닌데……."
"흠. 그럼 어쩔 수 없죠. 연화나 소용 조교에게 부탁해서 배우는 수밖에."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몸을 돌린다.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란 자괴감이 좀 들었으나, 뭐 어떤가? 남들이 보기엔 이제 열 살 어린애인 걸.
"처, 천강?"
"말 시키지 마세요. 저 별로 대화하고픈 기분 아녜요."
그러자 안절부절 못하는 초아.
그걸 통해 가능성을 엿본 천강이 나직이 투덜댔다.
"연화나 소용 조교, 둘 중에 누가 더 경공을 잘 하려나. 아무튼 가르쳐 준다는 쪽엔 나중에 부탁하나 꼭 들어준다고 약조해야지. 그 어떤 부탁이든 들어준다고……."
"잠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린다. 불안한 듯 입술을 짓씹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주위를 한 번 슥슥 둘러보더니, 천강에게 바짝 다가와 귀에 대곤 소곤소곤 말했다.
"아, 알았어. 너한테 경공 가르쳐 줄게. 대신…… 진짜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더 들어주는 거다?"
"네, 누님!"
"꼭이야! 잊어버리거나 하면 안 돼."
"물론이에요. 그리고 제가 누님 좋아하는 거 알죠?"
"그, 그, 그래?"
헤벌쭉……. 초아, 단번에 행복한 얼굴이 된다. 그렇게 천강은 사백동굴 4구역 개인실에서 초아로부터 일대일 교습을 받게 되었다.
처음엔 혹시나 보는 이가 있을까 하여 주위를 수시로 살피며 조마조마해 하는 초아였으나, 곧바로 천강에게 빠져들어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니…….
"너…… 정말 이전에 그 어떤 경공도 익힌 적 없어?"
"예."
"말도 안 돼. 초상비를 단 한 번 보고 터득하다니……!"
뭐. 초상비 정도는 전생에도 쓸 줄 알았으니까. 아는 걸 쓰는데 뭐가 어려울까?
"내가 남자 하나는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뛰어난 인재였을 줄이야."
"예에?"
천강이 그게 무슨 뜻이냐며 눈을 반만 뜨자, 초아가 호호 웃으며 얼버무린다.
"아냐아냐. 나 혼자 중얼거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이제 뭘 배우면 되는 건가요?"
"초상비를 쓸 수 있다면, 바로 우리 암운신공의 경공술을 배워도 되겠어. 좀 심오하니까 잘 보라고. 이런 식이야."
암운행보(暗雲行步).
초아가 느릿느릿 발을 옮기며 경공의 원리를 하나하나 세밀히 보여준다. 천강은 두 눈에 힘을 줘, 기의 흐름과 운용 방식을 차근차근 확인해 나갔다.
"봤어?"
"……한 번 더 보여주세요."
"그래."
두 눈을 부릅뜨고는 집중하는 천강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초아.
그녀는 천강의 요구에 무려 열 번을 연달아 사용했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에야 시현을 끝낼 수 있었다.
'익히는데 얼마나 걸리려나.'
과거 초아는 이걸 익히는데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재능이 있다던 이들도 보통 반 년 정도 걸리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자리한 나선의 원리를 정확히 알아채지 못하면 절대 익힐 수 없는 까닭이다.
'가르치는 나도 배우는 천강도, 둘 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뭐 일주일이면 되겠지.'
자신이 선택한 남자인 만큼, 사심을 듬뿍 담아 그렇게 일주일로 보정하는 초아였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꽤 많이.
"응? 바로 시도해 보려고?"
"예."
"후훗.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걸? 이게 말이야.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스슷. 스스슷.
"어…… 어?"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겉모양새도 그렇고, 그 안의 내기 움직임도 그렇고. 정확히 따라하는 천강.
초아의 입이 열리다 못해 떡 벌어졌다.
"어어어?"
"흠. 역시 누님 말대로 쉽진 않네요."
"너…… 너어 어떻게 한 거야?"
암운신공은 기본적으로 암살자 무공이다. 심법부터해서 보법까지.
모든 게 다 그것에 맞춰져 있다.
쉽게 말해, 보고도 파악이 매우 어렵단 의미다. 따라 하기는 더더욱.
'그런데 겨우 열 번 보고 한 번에 성공한다고?'
물론, 사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주태와 천강은 암운곡 동기다. 비록 졸업 이후에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다고는 하지만, 5년간 함께 지낸 동료이자 경쟁자.
그런 까닭에 당시 천강은 암운신공의 초기 개발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의 장점이나 단점, 원리 그런 것들을.
'주태 녀석…… 50년간 발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군. 이런 식으로 보완을 한 건가?'
과거 주태가 보여주었던 무공의 원리와 지금 초아가 펼치는 형(形)을 합치면 흉내 내는 건 아주 쉬운 일.
천강이 다시 경공을 펼친다. 이번에는 속도도, 자세도, 흐름도 매우 안정적이다.
"하, 하하핫.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알 리 없는 초아는 그저 연신 경탄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왈.
'혹시 나……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 아닐까? 이런 멋진 낭군님이라니!'
당사자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말을 마음속으로 서슴없이 해대는 초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