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9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9화
29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다
"그러니까 우리 연화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예."
사백동굴 제 1구역 한쪽 구석.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채, 천강이 두 마인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당하고 있다.
분명 궁금한 게 있어 묻는다고는 하는데, 이건 질문이라기 보단 추궁에 가까워 보인다.
"그냥 같은 쥐 굴 출신으로 동기일 뿐입니다."
그 대답에 바로 딴지를 거는 화정마녀.
"거짓입니다, 어르신. 그런 자가 아가씨의 머리를 막 쓰다듬고 그럴 리 절대 없습니다."
"아니, 그건…… 그냥 잘했다는 격려 차원에서……."
"격려라면 그저 어깨를 토닥여 주는 거로 충분하지 않나?"
틀린 말이라 할 말이 없다. 그 기세에 힘입은 화정마녀는 더욱 천강을 몰아세웠다.
"그리고 머리 쓰다듬는 건 그렇다 쳐도, 아가씨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르신!"
"그, 그것은……."
아니, 그것도 봤다고? 이 년놈들, 대체 언제부터 감시하고 있던 거야?
천강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든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천강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젠장. 내가 아비라도, 힘들여 키운 딸아이에게 딱밤을 먹였다면 진짜 가만 안 둘 것 같은데…….'
권광투마는 생긴 걸로 보면 이해보다는 주먹이 앞설 인물이었다. 그 옆에 여인은 두말 할 필요도 없고.
화경 고수 두 명 사이에 낀 천강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 모습에 때가 되었다 느낀 걸까? 화정마녀와 권광투마가 각각 천강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곤 왈.
"자, 설명을 해 보실까? 왜 우리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딱밤을 먹이고 그랬는지?"
두 고수의 질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천강은 그저 입이 움직이는 대로 변명을 했다. 그 변명이란.
"그, 그냥 얘가 귀여워서 그랬습니다."
귀엽다. 솔직히 그냥 쓸 만한 단어이지 않은가?
지나가는 똥개 새끼를 봐도 귀엽고, 나무 위에서 짹짹 울어대는 새 새끼를 봐도 귀엽고.
본디 모든 생물은 새끼 때 귀여운 법이다.
그래서 귀엽다고 했는데, 아니 글쎄 그걸 아주 단단히 오해하고 나선 두 사람이었다.
"흠! 우리 연화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니……."
"예?"
"다른 놈 같았으면 단박에 얼굴을 으깨놓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암운곡 최강자……. 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마."
"아니, 저기……."
"천강이라 했지? 복 받은 줄 알아라. 아가씨와 연을 맺을 기회를 얻는다는 게 절대 쉬운 게 아니다."
"저기 두 분 잠시 제 말 좀……."
"그럼 율아. 질문은 이쯤 끝내는 게 좋겠구나. 우리가 두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선 안 되지 않겠느냐?"
"저어……."
"알겠습니다, 어르신."
"……."
***
"헤헤."
싱글벙글 미소가 끊이질 않는 연화와 그에 반해 다 죽어가는 천강.
그 사이에서 무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묻는다.
"형님. 대체 권광투마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길래 표정이 그러십니까?"
"있다. 그런 게. 하아……."
아까 일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밖에 나온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연화와 다 죽어가는 천강 사이에서 어느 박자를 맞춰야 할지 몰라 그저 어색하게 웃는 무진에게, 천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우야."
"예, 형님."
"내가 인생의 뼈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조언을 하나 해줄 테니, 꼭 기억해라."
"말씀하십시오."
"살면서 무엇이든 조심해야 하지만, 그중 특히 여자를 조심…… 멀리해야 한다. 안 그럼 어떤 식으로 코가 꿰일지 모른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무진이 천강의 뒤로 가 어깨를 꾸욱꾸욱 주무른다.
그때 조교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다들 밖으로 나와라."
그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헐레벌떡 물 밖으로 빠져나가는 아이들.
"아, 씨! 드, 드디어 끝났다!"
"개 추워!"
"앞에 빨리 좀 나가. 빨리!"
암운곡 1년차들은 하루 두 시진 심법 훈련을 한다. 그중 한 시진은 뭍에서, 한 시진은 지하수로 물속에서.
일 다경만 가만히 있어도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천산의 지하수는 차갑기로 유명한데, 그런 곳에서 한 시진 동안 심법 수련을 했으니…….
이는 사실상 심법 훈련이라기 보단 고문에 가까웠다.
설령 내기를 운용해 몸의 체온을 보호해도, 이제 갓 열 살짜리들이 얼마나 버티겠는가?
첨벙.
첨벙첨벙.
2번 패거리는 물론 마교 자제들까지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가고. 오로지 천강 일행과 2번, 7번만이 여유롭게 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2번은 내기가 많아서, 그리고 천강 일행과 7번은 흑이끼를 복용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그 이끼가 좋긴 하네요, 형님."
"……그러게 말이다. 차라리 추워서 고통스러웠다면 이런 번뇌도 없으련만."
"하, 하하핫. 힘내십시오."
그렇게 천강이 무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였다.
싸아아-
섬뜩.
작게 투덜대던 천강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바짝 굳은 표정이 얼굴 위로 올라온다.
"형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물에서 나오다 말고 어둠 속 깊은 지하통로를 가만 바라보는 천강.
'뭐지? 방금 분명…… 살기였는데?'
이곳에 환생한 이후로 처음으로 느껴보는 짙은 살기.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진한 감정이었다.
'설마 소운 녀석인가?'
내게 싸움을 진 것이 분해, 복수를 하려고 물속에서 날 기다리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5년차 무리와 소운 녀석의 모습에 천강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저어…… 형님?"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무진아."
"예."
물 밖으로 나가 옷의 물을 꾹꾹 쥐어짜낸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의 물마저 털어내자,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5년차 무리가 찬찬히 다가와 천강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네가 천강?"
"그렇다면?"
"난 5년차 방중이다. 만나서 반갑다."
나름 정중하게 나오는 소년. 천강은 그 손을 맞잡고는 위아래로 흔들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애들에게 들었다. 여기 소운을 이겼다고?"
"뭐 이런 조무래기를 상대로 이겼다고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긴 하지?"
순간 소운이 발끈해 눈을 치켜떴으나, 천강이 한 번 쳐다봐주자 바로 꼬리를 말았다.
그걸 지켜보던 방중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네가 암운곡 최강자다. 그런데 듣기론, 넌 기존 규칙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이야."
천강이 무슨 뜻이나며 미간을 찌푸리자, 설명이 부족함을 깨달은 방중이 살을 덧붙였다.
"아니, 후배들이 우릴 보고도 인사를 안 하지 뭐야."
즉, 천강이 암운곡의 관습을 고수하는 소운을 완전히 작살 내놓은 탓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단 뜻이었다.
'확실히 그건 문제로군.'
천강이 소운 녀석을 밟은 건, 어디까지나 그가 자신의 동료를 건들었기 때문이다. 건방진 건 덤.
그러나 녀석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마교는 힘의 논리. 강자가 규칙을 만드는 것 또한 맞고, 후배가 선배에게 예를 갖추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모름지기 힘은 힘이고 예는 예니까.
단순한 힘의 논리를 떠나 같은 마교의 일원으로서, 먼저 마교에 들어선 이에게 나중에 들어온 이가 일정한 예를 갖춰주는 건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천강이었다.
'과거에 이걸 입 밖으로 꺼냈다가 괴팍하단 소리를 들었었지.'
공자님 이야기 꺼낸 뒤론 미친 놈 소리까지 들었고 말이다.
아무튼. 이대로 놔둘 순 없고 뭐든 결론을 내야 하는 상황.
"흠……."
천강의 결정이 궁금한 이들이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1년차부터 해서 5년차까지.
그러나 대부분의 얼굴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천강이 이제 1년차이니만큼, 같은 신입이나 후배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 예상한 탓이었다.
그러나 천강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배에게 인사하는 규칙은 그대로 둔다. 대신 허리를 숙이거나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은 용납하지 않을 거다. 자유롭게, 편하게들 인사하라고. 같은 암운곡 출신 형제라 생각하고."
웅성웅성.
좌중이 시끄러워진다. 선배들의 얼굴이 펴지고 1년차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유롭게 하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현실 상 그게 쉽지 않았기에.
그러나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동기들에게 천강은 그만큼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그걸 확인한 천강의 입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럼 날 따르는 우리 애들을 위해, 그리고 마교의 발전을 위해…… 하나 더 가볼까?'
바로 두 번째 발표.
"그리고 현 시간 부로 후배에게 일 시키는 규칙을 없앤다. 꼴에 선배라고 후배에게 강압적으로 일을 떠넘기는 거…… 앞으로 금지란 이야기다. 위에서 내려온 일, 후배들에게 미루지 말고 다 같이 하라고."
그러자 이번엔 후배들의 얼굴이 펴지고, 선배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내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
"선배가 후배들에게 일시키는 건 오랜 전통인데."
"최강자가 됐다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하……. 당장 내년에 신입들 맞이할 때 4년차인 나도 가서 일하게 생겼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강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으니, 암운곡 생활하며 제일 쓸모없다 생각한 게 바로 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가만 놔두자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커지는 소란.
그러나 천강이 한 마디 하자,
"불만 있는 놈은 나와. 날 제치고 최강자가 되겠단 도전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곧바로 조용해진다.
그 누가 나서겠는가? 전 최강자였던 소운을 한 합에, 그것도 손가락 두 개로 쓰러뜨린 괴물을 상대로 말이다.
1년차부터 시작해, 윗 선배들의 얼굴을 싹 한 번 훑어본 천강이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그 모든 규칙에서 난 예외다. 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인사 할 거고, 선후배 상관없이 일도 시킬 거다. 그러니 그렇게 알아두도록. 뭐…… 불만 있음 알지?"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짓는 사람들.
그러나 천강이 스윽 쳐다보다 다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불만이 있는 몇몇이 조교들과 교관들에게 가서 따졌으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싸워서 네가 최강자가 되면 되잖아?"
"불평할 시간에 훈련이나 열심히 해라. 엉?"
이미 조교들보다 천강이 압도적으로 강해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고, 조교 내 실권자인 초아가 천강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재 암운곡은 여울나무에 밀려 이렇다 할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런 시기에 묵범귀영의 기록을 깬 인재의 등장은 암운곡을 다시 드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만큼, 교관들은 천강이 하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잠잠히 침묵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연화야, 무진아. 가자. 밥 먹을 시간이다."
"예, 형님."
"좋아! 밥이다!"
그렇게 암운곡에 들어온 지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게 된 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