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0화
20화. 천강
"모두들 수고했다. 맛나게들 먹어라!"
"감사합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간.
2년차들의 축하의 말이 끝나고 대략 연회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쥐 굴 아이들은 모처럼의 저녁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매 끼니 감자 하나로 때우다 고기를 먹으니……. 큭. 진짜 좋구나! 눈물 나올 것만 같아."
"나도. 흑……."
"자자. 더 먹어. 내가 이건 네게 양보한다!"
약 100일간의 사투.
훈련 강도가 강하지 않아도 잘 먹지 못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건 강하고 약하고와 관계가 없다. 고수도 굶으면 죽는다. 고수도 배가 고프면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거고.
비록 100일뿐이었지만 쥐 굴에서의 경험을 이 아이들은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이후 비슷한 고난의 순간이 다가온다면 이때를 떠올리며 어떻게든 버텨낼 테지.'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던 천강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두 아이가 서로를 노려보며 정신없이 고기를 뜯고 있다.
"그믄 프그흐스즈? (그만 포기하시징?)"
"느므므! (너야 말로!)"
몇 점 먹고는 배불러 못 먹는 이들과는 달리 밑도 끝도 없이 먹어치우는 1번과 66번.
경쟁하듯 먹어치우는 그들 앞으로는 발라진 뼈가 산을 이루고 있다.
'나랑 동년배인 게 심히 의심이 되는구만.'
66번은 그렇다 쳐도 1번은 대체 그 많은 게 뱃속에 어찌 들어간 건지…….
다 뜯은 고기를 내려놓고는 새 고기를 드는 1번. 66번도 질 새가 양손으로 고기를 각기 잡아든다. 둘은 아귀마냥 서로를 앞에 두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잠깐 바람 좀 쐬러."
"저도 따라갈까요?"
"아니다. 혼자 좀 걷고 싶구나."
조용히 자리를 벗어난 천강은 불빛이 없는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나무 사이사이로 미풍이 불러온다.
늦은 봄.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의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쌀쌀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천강은 음식을 통해 달구어진 몸을 식히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러다 한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북명신공을 운용했다.
'별 탈이 없어야 하는데.'
오늘 낮에 아무런 생각 없이 세 명의 기를 연달아 흡수를 했는데……. 문득 이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명신공 비급에서는 한 사람의 기운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린다고만 쓰여 있을 뿐, 여러 종류의 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섞으면 어떻게 된단 말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뱅글뱅글 회전하는 네 종류의 기운.
그때 귓가로 모종의 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미안하군. 혹시 내가 방해했나?"
고개를 든다. 거대한 장신의 남자가 찬찬히 다가오고 있다.
9척에 족히 달하는 키와 그보다도 더 기다란 창을 등에 매달고 있는 남자.
정돈하지 않은 긴 머리칼이 미풍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천으로는 감출 수 없는 근육들이 옷 위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금은 서늘하면서도 정제된 분위기를 피우는 그는 암운곡의 창술 교관 비격창마였다.
방해가 맞았지만 굳이 그걸 티낼 이유는 없는 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뭘 하고……. 그렇군. 수련하고 있었던 건가?"
"네, 뭐……."
"역시 한 기수의 1등은 달라도 다르군."
"1등 아닙니다. 매 기수마다 제일 강한 자가 1번임을 교관님께선 아실 텐데요?"
"그런데 아이들은 자네를 제일로 치더군. 그 누구에게 물어도 대답이 동일하다면 99번 자네가 1등이 맞겠지."
교관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천강을 마주본다. 천강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음을 깨달았다.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아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한 자리 수 번호도 아닌 거의 세 자리 수에 가까운 99번.
그런데 실력은 두 마두의 자녀를 뛰어넘어, 같은 기수 중 최강.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여 궁금해서 보러 온 거다. 그런데…… 이제 보니 강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군."
그저 내기를 흡수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까 걱정이 돼 확인중인 걸, 교관이 아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은 정했는가?"
"이름…… 말입니까?"
"그래. 앞으로 세상에 알릴 자네의 새 이름."
저녁 축제 시작 전. 교관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각자 앞으로 살아갈 이름을 정하고 내일 오전까지 조교에게 제출하라고.
"아직 못 정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뭐 어차피 내일이면 조교에게 말해야 하는 것, 천강은 자신의 이름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천강입니다."
"천……강?"
"예."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런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해……."
"아닙니다. 그저 그리 짓고 싶단 생각이 들어 그런 것입니다."
비격창마가 천강의 얼굴을 가만 바라본다. 그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운 천강은 해맑게 한 번 웃어보였다.
"……그렇군. 천강. 천강이라……. 좋은 이름이로군. 앞으로 크게 대성하겠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적당히 훈련하고 오늘은 일찍 쉬도록 해라. 쉬는 것 또한 훈련이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강은 다시 가부좌를 취하고, 교관은 찬찬히 암운곡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교관의 눈은 굉장히 복잡해보였다.
'천강이라…….'
일말의 의구심을 품고는 다가갔다가, 도리어 더욱 혼란스러워진 비격창마였다.
***
"끙. 269명 중 214명이 합격이라……."
총책임자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돋아났다.
'하필 이번 기수에 괴기나한의 손녀딸이 끼어있는 바람에.'
괴기나한은 천산의 진법과 장치들 대부분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무공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마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 결국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그는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교관들과 조교들의 입단속을 하는 것으로 하지."
"정말 그 정도 조치로 괜찮겠습니까, 흑학대신?"
"뭐…… 조교들의 입막음만 제대로 된다면 아무 문제없을 걸세. 이곳이 어딘가? 암운곡일세. 어차피 정신적으로 나약한 것들은 다 알아서 자살할 테니 문제없지 않겠는가? 끌끌."
그랬다. 쥐 굴에서는 배고픔만 견디면 되지만 암운곡은 다르다.
말 그대로 지옥훈련. 끊임없이 단련한다.
분명 버틸 만하건만 도리어 그것이 더 괴로운 곳. 끝이 없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뒹굴다보면 그냥 자살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곳.
그곳이 바로 이 암운곡이었다.
백발의 노인이 차를 머금는다.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던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비격창마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최강자는 1번이 아니라지?"
"예.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1번과 2번의 실력이 거의 박빙인데, 그 2번을 간단하고도 완벽하게 무력화 시켰으니까요."
“쥐 장수들이 굉장한 녀석을 들여왔군. 혹시 그것들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비격창마의 시선이 가만히 위를 향한다.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99번이 2번과 13번을 제압했을 때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없습니다. 마공을 썼으니까요."
"음? 마교출신이 아닌데 마공을 썼다?"
"흥미롭게도 흡공을 쓰더군요."
풍성한 눈썹에 반쯤 가려져 있던 흑학대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설마……."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곧 흑철마괴가 도착할 터이니 직접 물어보시지요. 만약 그분의 자제가 맞는다면 그가 모를 리 없으니까요."
약 10년 전.
현 마교의 하늘 천마는 한 여인을 통해 아이 하나를 얻었고, 마교 내 모두가 그 아이를 축복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배신자들로부터 위협을 느낀 교주는 믿을 수 있을 만한 수족들을 시켜 아이를 마교 밖으로 빼냈었는데, 흑철마괴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흘렀습니다. 시기가 너무 절묘합니다."
"하긴……. 쥐 굴과 암운곡을 통해 정식으로 올라선다면, 자신의 세력도 구축하고 명분 또한 굳건히 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아니, 오히려 최고의 선택일 수도."
"그런데 괜찮을까요? 이 암운곡에도 놈들에게 넘어간 간자들과 배신자들이 꽤 되지 않습니까?"
"교주께서도 대응책을 세워 놓으셨겠지. 흑철마괴가 오면 함 물어보세."
***
"천강천강천강."
"어, 왜."
"너 왜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야?"
1번 연화의 질문에 천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 말마따나 기분이 영 별로였기 때문이다.
"왜 대답 안 해줘?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줘! 해줘해줘해줘~"
"시끄러. 좀 조용히 해."
콩. 딱밤 한 대 먹여주자 그제야 좀 조용해지는 그녀.
"치이. 나 심심한데……."
천강은 98번 아우 무진에게 그녀를 떠넘기고는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젠장. 설마 진짜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졸업관문을 치르는 기간 5일. 그리고 암운곡에 들어가기 전 이것저것 준비하는 5일.
그 시간 동안은 어찌됐든 암운곡 위에서 하릴 없이 대기해야 했기에, 천강은 그 기간 동안 빡세게 심법을 운용했다.
어떻게든 4개의 기운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그런데 웬걸. 하루면 섞였던 기운이 이틀을 휘저어도 섞이질 않는다.
'제발 좀 섞여라……!'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자, 이틀 째 밤. 비로소 기운들이 조금씩 융화되기 시작했다. 그걸 느낀 천강은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씩 섞으면 하루면 충분하나, 그 이상 누적이 되면 아무래도 시간이 크게 늘어나는 것인가보군.'
후우. 진짜 좆 된 건줄 알고 걱정했네.
아무튼 이제야 섞이기 시작한 상황. 언제 또 싸움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는 만큼, 천강은 먹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심법을 운용했다.
잠자는 시간도 하루 반 시진으로 줄여가며.
그렇게 8일을 넘어 9일 째 되는 날 새벽. 천강은 비로소 그 기운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다.
"드, 드디어……."
눈을 감고는 내기를 느껴본다.
졸업관문 때 미운털이 박힌 탓인지는 몰라도, 허구한 날 떽떽거리는 이곳 조교와 비교하면 그 내공의 반의반 정도 되는 기운이 임맥에 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구름마냥 이리저리 거닐다가, 이내 기의 바다에 더 있어야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스르륵 움직여 중단전에 가 머물렀다.
'후우. 정말이지……. 웬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하나를 다 흡수하기 전에는 연달아 흡수하면 안 되겠어.'
일단 가능한 한 빨리 10명분을 흡수해 기의 바다부터 안정화시키도록 하자.
'하지만 그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천강은 그대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요 8일간 잠도 제대로 안 잔 탓에 너무도 피곤했던 탓이다.
그렇게 암운곡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