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0화
10화. 거래
"난 이해가 안 돼."
13번의 중얼거림에 11번이 다가와 묻는다.
"뭐가?"
"저 99번 말이야. 아까 뛰는 거 봤어? 하……. 진짜 간신히 중간 수준을 유지하더라."
"하긴. 들어올 땐 거의 숨넘어가기 직전이었지."
"근데 66번을 이겼다고? 저 헐떡대는 녀석이? 난 도저히 못 믿겠어."
13번이 99번에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11번이 그의 옆을 따라붙으며 물었다.
"야. 뭐하려고?"
"뭐긴. 한 판 붙어보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 그게 의미 있어?"
11번이 보기에 지금 13번은 그저 화를 풀기위한 상대를 찾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반 아이를 상대로는 쪽팔리니, 그나마 명성 있고 약해보이는 이를 찾아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99번의 명성은 과장이 좀 들어가 있긴 해.'
그러나 그건 그거고. 굳이 그걸 증명해서 득볼 게 뭐란 말인가?
그러나 13번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저 녀석을 쓰러뜨리면 내가 66번을 이긴 거나 다름없잖아?"
"아니, 그건 좀……."
그러나 66번에게 철저하게 깨진 13번의 머릿속엔 더 이상의 정상적인 사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웅성웅성. 아이들이 천강 패거리와 마교 자제 둘을 에워싼다. 천강이 누워있다 슥 13번을 올려봤다.
"뭐냐."
"아, 네가 66번을 이겼잖아? 그래서 한 수 좀 배워보려고."
"배우러 왔다는 놈의 자세가 그 따위냐?"
천강이 눈을 작게 뜨고는 묻자 13번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탁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강.
'하아. 이 녀석 생각이 뻔히 보이는구만.'
조그만 녀석이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서.
지금 이 녀석과 싸워서 천강이 득볼 게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강해지기 전에 싸우는 건, 주위에 약점만 보여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금 있으면 졸업 관문. 괜히 다치면 통과하는데 지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약아빠진 놈에게 꼬리 마는 건 존심이 상한단 말이지.'
무엇보다 여기서 거절해본들 강제로 덤빌 것이고, 설령 싸움이 무마 되도 그의 명성은 깎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곧 더 귀찮은 일들을 불러올 터.'
생각을 정리한 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고, 다음 지역 가서 붙자. 그땐 네가 원하는 대로 싸워주지."
"그냥 지금 싸워!"
"안 돼. 너도 알다시피 이제 관문까지 10일도 안 남았어."
"하. 그깟 시험……."
"그깟 시험? 관문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제 아무리 네가 마교 자제라도 관문에서 떨어지면……."
뒷말은 생략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졸업 관문이란 게 어떤 건지 부모로부터 들었을 테니.
13번이 마른 침을 삼키고는 입을 다문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13번.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그래?"
"어떻게 되는지 우리도 알려줘."
"11번, 어떻게 되는 거야?"
둘 다 말을 못한다. 결국 그들은 질문 공세만 받다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에 다시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려는 천강. 그때 한 소녀가 다가왔다.
"저기 99번……."
"응?"
"조교님께서 너 불러오라고 하는데……."
드디어 날 부르는구나, 이 육포 도둑년!
"나 그럼 잠깐 갔다 올게."
"어. 빨리 와!"
"다녀오세요, 형님."
그렇게 천강이 자리를 비우고. 아이들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쑥덕거렸다.
"지금껏 조교가 누구를 개인적으로 불러낸 거 본적 있어?"
"아니. 난 못 봤는데."
"나도. 심지어 방금 들었지? 마교 자제들만 아는 정보를 똑같이 알고 있는 거."
"그럼 역시……."
"응. 마두의 자녀가 확실해."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쥐 굴 무리 사이로 천강의 정체는 마두의 자녀라는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었다.
***
"저 왔어요, 누나."
"단둘이 있을 땐 초아누나라고 하렴!"
"아, 네에……."
천강은 고개를 내려 그녀의 왼손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때 그의 것이었던 육포주머니가 들려있었다.
"이거 먹을 만하더라? 요새 입이 심심했는데 좀 즐거워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든다.
"너도 하나 줄게 먹어봐. 자, 아~ 해. 내가 직접 넣어 줄게."
"그냥 제가 먹을 수……."
"아~"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벌린다. 조교가 그의 입에 육포 하나를 물려준다.
"옳지. 잘했어!"
"저기……."
"응. 왜?"
"그거 돌려주시면 안 돼요?"
천강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묻자, 조교가 눈웃음치며 답한다.
"아, 이거 네 거였어? 어머. 난 암실에 버려두었기에 주인 없는 건 줄 알았는데?"
"제 거 맞아요. 아니 근데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분명 감쪽같이 숨겼다 생각했는데."
"알고 싶어?"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9번 암실은 넓다. 그 속에 숨겨두면 사실상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녀는 찾았다.
즉, 지금 눈앞에 조교는 천강이 그곳에 숨겼다는 걸 알고 뒤졌다는 의미다.
초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 너한테 관심이 좀 많거든. 그래서 줄곧 네 뒤를 따라다녔어."
"저를요?"
내 뒤를 따라다녔다고? 전혀 못 느꼈는데?
분명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심스런 흔적이나 흐름, 분위기도.
천강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초아가 그의 볼을 꽉 잡아당긴다.
"넌 모르겠지만, 마공 중엔 몸의 기척을 완전히 숨겨주는 것도 있거든. 짙은 어둠. 옷자락 소리나 머리털의 잔음조차도 들리지 않는 비법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천강은 약 65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암운곡을 같이 졸업했던 동기가 했던 헛소리를.
- 짙은 어둠. 옷자락 소리나 머리털의 잔음조차도 들리지 않는 검은 구름과 같다 하여 일명 암운신공! 어때, 천강? 죽이지 않냐?
- 오글거리거든? 그냥 일이나 하자.
그때 그 녀석의 제자인 건가?
"응? 99번, 왜 날 그렇게 보니? 아! 혹시 내가 꽃처럼 아름다워서?"
"아, 네……."
성격으로 봐서는 제자가 아니라 딸인 것 같네.
천강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 그녀가 이리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예쁘단 소리를 듣고 싶어 이러진 않을 것이고…….
"무얼 원하시는 거죠?"
"후훗. 우리 꼬맹이, 눈치가 아주 빨라? 역시 내가 점찍은 애다워!"
무슨 그런 불안한 소리를…….
조교가 볼을 놓아주고는 한 발짝 떨어진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생각이라도 하듯 천정을 바라보며 천강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쭉 지켜봤는데 말이야.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지. 어린애치고는 조숙하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어. 그러면서도 굉장히 계획적이고."
"정체가 뭔지 궁금한 건가요?"
"응. 궁금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내가 진짜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니까."
"그럼 초아 누나가 원하는 건 뭔가요?"
빙그레 웃는 조교의 얼굴이 천강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형형히 빛나는 그녀의 두 눈엔 일종의 광기가 어려 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강한 의지도.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이 누나에게 말하렴. 그 무엇이 됐든 내가 힘닿는 데까지 들어줄게. 이딴 말라비틀어진 고기가 아닌 진짜 고기를 원한다면 당장 내일부터 챙겨 줄 수도 있어. 대신……."
초아가 천강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어때?"
- 천강아. 사실 마공을 익히면 어떤 식으로는 정신이 비정상적으로 변하게 된단다.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 그녀가 보이는 반 협박성 행동은 전형적인 마인의 행태.
사실 이것 때문에 마교 여자들이 인기가 없었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게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천강은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싫다면요? 전 어떻게 되나요?"
"글쎄……?"
웃고는 있으나 살의 가득한 얼굴.
명백히 죽이겠단 뜻이다.
'딱히 선택지는 없나.'
상대가 적당히 강해야지, 평범한 몸뚱어리로 일류급 고수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천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부탁이 뭔지는 몰라도, 이후 수틀리면 역으로 밟아주면 그만이기에.
"좋아요. 약속 꼭 지켜주세요, 예쁜 초아 누나!"
"어멋. 얘도 참! 후훗. 걱정 마렴."
"그럼 저 바로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응? 뭐니?"
초아가 말만 하라며 그를 꼬옥 품어 안는다.
한손에도 다 잡히지 않을 꽤 커다란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천강은 북명신공의 구결을 떠올렸다.
엄지부터 해서 어깨를 지나 임맥까지 이르는 기의 흐름을.
'이왕 물이 들어온 거 적극 이용하는 게 좋겠지.'
특히 암운곡 들어가서 눈치 안보고 편히 지내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지는 게 낫다.
그에 천강은 가슴팍에서 고개를 떼 머리를 들고는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제 부탁은……."
***
"아, 99번 왜 이리 늦어."
1번이 작게 투덜대며 신경질적으로 땅에 발길질을 해댄다. 그 옆에서 98번은 그녀를 달래느라 진을 뺀다.
"형님, 금방 오실 거야. 진정해."
"아니, 뭐하길래 한 시진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아! 혹시 그 여우같은 년이랑……."
"응? 여우같은 년?"
동기 중에 여우를 닮은 애가 있었나?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는 98번이 어리둥절해한다.
그런 그때 막 공동으로 들어선 천강을 발견하곤 98번이 소리 높여 외쳤다.
"어? 저기 형님 오셨다!"
1번의 고개가 번쩍 돌아간다.
천강이 다가오자마자, 그녀는 그의 멱살을 잡고(?)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러며 매섭게 추궁하기 시작.
"왜 이리 늦었어?"
"아,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 좀 하다 보니 그랬어. 근데 왜 그래?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냐? 왜 표정이 그리 안 좋아?"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엉뚱하기 그지없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데? 그 여우같은 년이랑 뭔 이야기 했는지 나도 좀 들어보자."
"아니, 무슨……."
왜 취조 받는 기분이지?
마치 딴 여자랑 하하호호 놀다가 약혼녀에게 걸리기라도 한 듯한 상황에 천강이 고개를 돌려 98번을 바라봤다.
98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본인도 모른다는 뜻이다.
천강은 시선을 다시 1번에게 돌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1번의 2차 공세가 시작됐다.
"둘이 혹시 무슨 긴밀한 사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
"내가? 내가 조교님이랑? 뭔 그런 말도 안 되는……! 야,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라. 어후. 진짜. 상상만 해도 소름 돋네."
아까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떠올린 천강이 양팔을 슥슥 문지르자, 그제야 매섭던 1번의 눈이 순한 양 마냥 온순해졌다.
"그래? 그럼 뭐…… 다행이고."
"?"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바라보자, 1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방긋 웃는다.
'하긴 그게 뭐 중요하겠어. 지금 내 코가 석 자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