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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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7화
운호 일행은 사시(沙市)를 떠나 전력으로 섬서를 향해 움직였다.
마음은 급했고 전황은 수시로 변했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줄기차게 섬서를 향해 나아갔다.
신응들의 전황 정보는 사시를 출발하고 이틀 후까지는 구룡이 맡고 있는 북부 전선에 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산과 무당의 방어선이 뚫려 후퇴하는 중이고 간신히 소림의 주축 방어선만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부터는 당문과 황보세가, 그리고 망성의 공방전에 관한 것들에 관한 정보가 물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곳의 상황이 구룡의 방어선보다 훨씬 급하고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온 것은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당문과 황보세가가 풍검문과 대도문에 의해 전멸되었고 장안이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장안이 함락되었다면 구룡은 더 이상 섬서의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고 곧바로 후퇴해서 산서나 하남을 이차 방어선으로 삼아야 된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운호 일행을 놀라게 만든 것은 전황이 아니라 당문이 한 사람의 무인조차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너무 놀란 일행은 잠을 포기하고 석천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석천까지의 거리는 겨우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동이 트는 새벽녘이었다.
운호는 떨리는 걸음으로 석천의 능선을 살폈다.
석천에는 한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시신이 넝마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흐른 피가 내를 이루었다가 말라 버려 고랑을 만들어놓았다.
살아 있을 거라 수없이 되뇌었지만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안감은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속에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운호는 한 걸음 한 걸음 시신 속을 나아갔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보다 먼저 앞으로 나갔던 운상이 멀리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마라, 운상아…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거기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그냥 다른 곳으로 가다오.
간절하게 바랐으나 운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눈은 충격으로 인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몸마저 부들부들 떨어대는 중이었다.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가야 했다.
친구가 저토록 무섭게 떨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한발 한발 무겁게 움직여 운상이 서 있는 둔덕으로 향했다.
다리는 가기 싫다는 듯 천 근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나 운호는 꾸준하게 움직여 끝내 둔덕에 도착하고 말았다.
거기에 예상대로 그녀가 있었다.
살포시 감은 눈,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눈물이 담긴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육신을 잃어버린 채 덩그러니 땅에 떨어져 있어 어딘지 외롭게 보였다.
풀썩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보다가 기어서 그녀에게 엉금엉금 다가갔다.
기다린다고 했는데, 반드시 찾아올 거라 약속했는데 그녀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얼굴을 비볐다.
눈물이 쏟아져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지만 그녀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어헝, 어헝!
끝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운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통곡이 새벽을 밝히는 태양과 함께 둔덕을 뜨겁게 적셨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주었고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자신으로 인해 불행에 빠진 여인이었다.
약속했었다.
다시는 아프게 만들지 않겠다고.
반드시 돌아와 행복하게 해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었는데 그녀는 이미 팔다리가 처참하게 잘린 시신으로 변해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운호가 정신을 차리고 통곡을 멈춘 것은 거의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운호는 사부님이 떠난 이후 처음으로 원 없이 눈물을 흘려내며 그녀와의 이별을 아파했다.
운상과 운여는 운호의 눈물을 막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서 주변을 경계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슬픈 이별은 누군가 막는다고 해서 아픔이 덜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당운영의 신체를 하나씩 정성껏 모은 후 보자기에 싸서 등에 메었다.
아직 굳지 않은 핏물이 슬금슬금 새어 나왔으나 운호는 개의치 않고 친구들을 등에 매단 채 석천을 빠져나왔다.
얼마나 달렸을까.
석천에서 반시진가량 말없이 달리던 운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제법 커다란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운상과 운여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친구들은 운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운호의 얼굴에는 또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그녀의 시신을 메고 한 시진을 헤맨 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양지바른 언덕을 찾아내었다. 그곳에서 보자기를 내려 그녀의 몸을 정성스레 하나씩 맞춰 나갔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며 끝없이 눈물을 흘려냈다.
얼마나 처참하게 찢겼던지 그녀의 몸을 맞추는 데 무려 반시진이 소모되었다.
새로 가져온 옷으로 예쁘게 갈아입히고 그녀를 가지런히 눕힌 후 자신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얼굴은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더없이 평온했다.
“운영아, 저 하늘을 봐. 우리가 같이 보던 하늘이야. 기억나니?”
말을 끝낸 운호가 당운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내가 죽을 뻔했을 때 나를 치료해 주고 이렇게 같이 누워 있었잖아. 정말 기억 안 나?”
운호는 다시 당운영의 얼굴을 봤다. 마치 대답을 듣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운호의 독백은 계속되었다.
“너를 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고 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어.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얼마나 속으로 기뻐했는지 아마 넌 모를 거야. 왜냐하면 네가 좋아한 것보다 내가 널 훨씬 좋아했었으니까.”
천천히 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사랑이 가득 담긴 그의 손길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눈에서 멈춘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냐고? 왜긴 부끄러워서 그랬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자라서 숫기가 없어서 속에 있는 말을 잘 못해.”
운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코로 내려왔다.
“바보 같다는 거 알아. 그래서 널 아프게 만들었다는 것도…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었지.”
코를 간질이듯 말하던 운호의 손길이 조금 내려와 입술로 향했다.
“늦었지만 지금 말해야겠어. 지금 하지 못하면 영원히 말하지 못할 테니까.”
운호는 차가워진 그녀의 입술에 깊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운영아, 사랑한다.”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동시에 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운호는 끝없이 눈물을 흘려냈다.
당운영을 붙잡고 울부짖는 그의 음성은 마치 어미 잃은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구슬프고 가여운 것이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대신 너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내가 죽는다 해도 반드시… 그러니 운영아, 편하게 쉬고 있어.”
운호가 돌아온 것은 거의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그의 등에 메였던 당운영의 시신과 잔뜩 싸들고 나섰던 음식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나 마나 어느 곳에 그녀의 시신을 안장하며 도제를 지낸 것이 분명했다.
운호는… 혼자만의 아픈 이별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운호야…….”
“난 괜찮다.”
“정말 뭐라고 위로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게 어찌 너의 잘못이란 말이냐. 미친 듯이 돌아가는 세상이 그녀를 죽였을 뿐이다.”
운호가 고개를 꺾으며 자책을 하자 그동안 차분하게 지켜보던 운여가 끝내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운호의 눈물.
얼마나 서럽고 아프게 울던지 뒤돌아서서 같이 울고 말았다.
놈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놈의 아픔은 자신의 것이었기에 소리 없는 눈물로 운호의 아픔을 같이했다.
하지만 친구 놈의 절망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놈은 여전히 마검이었고 철혈의 사내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여의 외침에 운상 역시 즉각 동조했다.
운호의 잘못이 아니었다.
전쟁에서의 삶과 죽음은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잔인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자 운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푸른 하늘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동안 기다려 주던 운상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운호의 눈에서 슬그머니 다시 눈물이 고일 때였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갈 것이다.”
“어딜?”
“장안.”
“복수하고 싶은 거냐?”
“당연히.”
“풍검문 전체와?”
“그녀를 묻으며 마지막 약속을 했다. 그러니 난 그 약속을 지켜야겠다.”
북풍한설처럼 차가워진 얼굴.
바로 적들을 향해 돌진하며 무적의 신위를 구가하던 철혈의 사내, 바로 마검의 본색이 어느샌가 운호의 얼굴에 돌아와 있었다.
운호가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자 운상과 운여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운호는 한 번 한다고 마음을 굳히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놈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그의 검은 적들의 피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을 테니 애초부터 말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풍검문은 장안에 도착해서 주변 세력을 병탄시킨 후 병력을 장안 외곽에 주둔시켰다.
당문과의 싸움에서 삼백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으나 대부분 낭인과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었기 때문에 주력은 고스란히 살아남은 상태였다.
대도문도 황보세가를 무너뜨린 후 합류해서 장안에 모인 병력의 숫자는 거의 천오백에 달했다.
풍도제는 이 병력을 가지고 내일 아침 안강으로 출전할 예정이었다.
안강의 후면을 치게 되면 소림을 주축으로 버티던 무림맹은 결국 절대적인 피해를 입고 하남과 인접한 산양(山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구룡이 버티던 섬서가 무너진다는 것은 중원 무림의 칠 할이 천왕성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대계의 일각이 완성되는 순간일 것이었고 그 대계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룬다고 생각하니 풍도제가 느끼는 감격은 입으로 말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바로 내일.
천하통일전은 풍검문과 그로 인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컴컴한 밤.
횃불이 대낮을 방불케 하는 전막들을 바라보며 운호는 검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누차 말하지만 제일 순위는 경계병이 아니라 저 횃불을 처리하는 것이다. 화공이 성공하면 싸움이 편해지니까 잘들 해.”
“셋이서 삼방 공격이라… 현명한 건지 무모한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운호의 말에 운상이 중얼거리며 말을 받았다.
얼핏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들의 작전은 어이없게도 삼방 공격이었다.
좌측과 중앙, 그리고 우측.
중앙은 운호가 맡았고 좌측은 운상이, 우측은 운여였다.
하지만 그들의 작전은 너무 뚜렷해서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경계병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이 모두 잠에 빠져든 시간의 기습 공격이었고, 더군다나 화공을 노렸으니 분산해서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이었다.
“기습이 끝나면 중앙으로 모인다. 어차피 화공은 놈들의 전력을 줄이려는 목적일 뿐이니 너무 오래 끌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라. 싸움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 웬 걱정이 그리 많아!”
“최대한 조심해야 된다. 쉽게 끝날 싸움이 아니니까 몸조심하란 말이야!”
“끝장을 볼 생각이군.”
“난 오늘 풍검문을 세상에서 반드시 지울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낸 운호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는데 기세를 풀어놓자 공간이 압축되어 모든 기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런 자세로 구름을 타고 수없이 펼쳐진 전막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훗날 무림 역사에 한 장을 장식했던 마검의 장안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