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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76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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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6화

벌판에 도열한 적의 병력은 한눈에 봐도 천에 가까웠다.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동안 석천에 방어선을 친 이후로 풍검문은 십여 회에 거쳐 공격을 시행했지만 지금처럼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풍검문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당문이 가지고 있는 암기와 특수 무기들은 대량 살상용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이 동원될 경우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압도적인 병력이 동원되었을 때 구룡의 지원 병력들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 풍검문이 대대적인 공격을 편 세 번의 공격에서 화산과 무당, 그리고 소림이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석천을 방어한 적이 있었다.

당문도 많이 죽었지만 풍검문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저렇게 많은 병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낭인들과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상당수 가담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적의 병력을 확인한 당청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삼 일 동안 움직이지 않는 풍검문의 행동이 구룡에 대한 전면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벌판을 가득 채우고 나타난 병력을 보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직감.

천왕성의 주 공격로가 구룡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음을 적들의 병력 숫자를 확인한 후 직감할 수 있었다.

구룡의 지원을 틀어막고 석천을 치는 계획이다.

석천이 뚫리면 장안까지 진격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고 천왕성의 집요한 공격에 직면해 있는 구룡은 이들을 막을 여유가 없다.

장안이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면 구룡의 방어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장안은 섬서의 심장이기 때문에 어디든 비수를 들이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청은 서서히 눈을 돌려 가문의 병력을 확인했다.

진지에 붙어선 채 마지막 남은 공성 무기들을 거치하느라 여념이 없는 식솔들의 얼굴에는 죽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구궁수전을 비롯해서 매화산통 등 대량 살상 무기들은 이제 두 번 쓸 분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나 아직 치명적인 독으로 무장된 투골정과 귀왕령 등은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물론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풍검문은 그보다 훨씬 많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도열한 적들을 보던 당청은 내당 당주이자 친동생인 당황이 다가오자 무심한 눈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둘째야, 운영이는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그 아이라도 살리고 싶어서…….”

“양이도 죽었고 순이도 죽었습니다. 형님의 아들들이자 제 조카들이 제대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어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제 딸을 살리잔 말씀입니까!”

“황아…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다를 것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울 뿐이지요. 어느 목숨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우리 이제 미련 같은 거 버립시다.”

“미련은 없다. 그러나 네가 아플까 봐 걱정될 뿐이다.”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운영이도 괜찮을 겁니다. 저로 인해서 그 아이도 지랄 같은 삶을 살았으니 더 이상 삶에 미련 같은 건 없을 겁니다.”

“그런가…….”

말을 그친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산 아래 벌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풍검문의 병력들이 거칠게 돌격을 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운영은 공격해 오는 적들의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나비 가면을 얼굴에 썼다.

아버지인 당황은 중앙 방어진지로 떠나면서 그녀를 향해 떠나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딸에게 진정으로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의 고통이 가슴으로 받아들여져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후 아버지의 커다란 가슴에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어요.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니 저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세요.’

입을 떼어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마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분이니까.

등을 돌려 걸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잘려진 왼팔이 흔들렸고 등은 굽어 예전의 당당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망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여기서 이대로 죽는다면 영원히 그를 볼 수 없을 테니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명이란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잔혹성을 가져 그녀를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운호를 사랑했던 것도 운명이었고 그를 떠나 풍검문에 시집을 간 것도 운명이었다.

자신을 에워쌌던 불운과 불행도 모두 운명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간 것도 모두 운명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운명은 이곳에서 삶을 마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늘 가슴속에 들어 있던 짐을 이젠 벗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억지로 그의 약속을 받아냈으나 즐겁고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를 배신하고 남의 여자가 된 몸이었다. 아직도 사랑한다며 떼를 썼으나 그러한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착한 그 사람은 자신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받아들이며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참으로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녀는 자신보다 더 아름다웠고 현명해서 십미(十美)에 포함될 만큼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과거의 인연과 실수를 핑계로 압박한 것은 오로지 그녀의 욕심 때문이었다.

과거의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받아들인 그의 어리석음이 그녀의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놓게 될 줄은 그땐 전혀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리움과 미안함.

욕심 때문에 그를 되찾으려 했었으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그녀는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혼란 속에서 그녀는 가문의 식솔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봐야 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적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살아가면서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를 자유롭게 놔주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그랬기에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는 가족들을 남겨놓고 도망가야 할 이유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세상에 와서 가슴이 떨리도록 아름다웠던 추억이 있었고 언제나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으니 절대 후회되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적들이 백 보 앞으로 다가오자 구궁수전과 매화산통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당문이 자랑하는 타격 무기들의 가공할 위력은 절정고수라도 피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에 풍검문의 전위에서 돌격하던 자들이 부지기수로 쓰러져 갔다.

하지만 구궁수전과 매화산통은 단 두 번밖에 쓸 수 없었기에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풍검문은 곧바로 당문의 방어선으로 돌진해 왔다.

투골정과 귀왕령이 쏘아진 것은 적들이 근접해서 신형이 확연히 나타났을 때였다.

쐐애액!

스치는 것만으로도 금방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로 강력한 독이 내포된 암기가 벌 떼처럼 날자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와 함께 풍검문의 무인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질 수 있는 암기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오십여 명이 쓰러졌고 계속되는 공격에 또다시 그만한 숫자가 쓰러져 갔다.

이것이 당문의 위력이다.

정상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신주십강에 포함되는 풍검문이라 해도 절대 만만하게 상대할 수 없었을 정도로 당문의 암기는 지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 커다란 전력의 차이는 암기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난전으로 치닫게 했다.

난전은 당문의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덮어버리듯 풍검문의 무인들은 당문의 무인들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싸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당문 무인들의 반격은 너무나 처절해서 수많은 풍검문 무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특히 전면에서 서서 한 자루 금룡편을 휘두르는 당청의 위용은 전신을 연상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무림십왕의 일인, 독왕 당청.

그의 독문병기인 금룡편은 황금색 편기를 날려대며 공중을 완전히 장악한 채 수많은 적들을 혈무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적불가의 위력.

가공할 그의 위력에 적들은 전진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방어선을 뛰어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한줄기 섬광이 편기를 제압하면서 풍검문의 전진은 다시 시작되었다.

거대한 칼.

무인들의 숲을 건너 단숨에 나타난 거대한 칼의 주인은 다름 아닌 풍도제였다.

그의 칼은 나타나는 순간 이미 금룡편을 반이나 잘라내서 당청을 뒤로 일 장이나 튕겨내었다.

부지불식간의 기습.

절대고수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었지만 풍도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청의 등을 향해 칼을 찔러내었다.

단 일격에 치명상을 입은 당청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연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허리를 곧추세운 채 풍도제를 향해 비웃음을 흘려냈다.

“여전히 비겁한 놈이로구나.”

“귀찮아서 그랬으니 이해해. 정면으로 싸우면 시간이 걸릴까 봐 그랬다.”

“크흐흐. 명성이 아깝다. 풍도제란 이름은 개에게나 주거라.”

“나는 명성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자, 그만 가라. 네 눈으로 식솔들이 죽어가는 걸 보는 것도 가슴 아플 테니…….”

풍도제의 칼이 진격세로 뻗어지자 도기들이 부챗살처럼 나뉘며 순식간에 폭사되어 나왔다.

도기들은 마치 하늘에 유성우를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 합쳐지며 당청의 몸을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당운영은 방어선의 우측에서 분전을 거듭했다.

그녀의 옆에는 호안을 쓴 당문혁과 용안의 당문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모두 당문칠비에 속하는 무인들이었다.

당문의 암천 당문칠비의 생존자들은 오직 그들뿐이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우측 방어선은 그들의 분전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중이었다.

선두에서 그들이 적들을 차단하면서 남은 무인들이 적절히 투골정과 귀왕령을 뿌려댔기 때문에 풍검문의 무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장을 보려는 듯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낭인과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전면에 섰기 때문에 막는 게 어렵지 않았으나 점점 무력이 강한 풍검문의 본진이 나타나면서 싸움은 훨씬 치열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 치열함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투골정과 귀왕령이 떨어지면서 순수한 무력으로 싸움이 벌어지자 당문 무인들은 풍검문의 검귀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죽이고 죽는 전쟁의 참혹함이 둔덕을 휩쓴 두 시진은 석천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지 오래였다.

헉헉…

당운영은 잘린 왼팔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 핏물로 가득 찬 웅덩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가슴이 쩌억 벌어진 당문혁이 석천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주변을 돌아보자 살아남은 당문 무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리 찾아도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아버지도 분명 저곳 어딘가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한차례의 번쩍임 끝에 당문혁의 목이 떨어져 내렸고 곧이어 신형마저 무너졌다. 사촌 오라버니인 당문혁은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비접을 손에 들었다.

지아비였던 석천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는데, 미소 속에 담긴 것은 여전한 증오였다.

추혼비접.

그 옛날 장안평에서 운호의 몸에 상처를 입혔던 그녀의 비접이 석천을 향해 날아올랐다.

워낙 심한 부상을 입었고 기혈이 엉켜 본신의 위력은 반조차 나타나지 않았지만 비접은 아름답게 석천을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운영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운호를 만난 것도, 석천을 만난 것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석천의 잔인한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여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운명 속에서 사랑했고 악연 속에서 증오했으니 삶은 진정 덧없는 것인가 보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목의 통증 속에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며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객잔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어리숙한 웃음을 지은 채 다가오던 운호의 모습이었다.

벌써 오 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그와 함께하며 설레었던 많은 밤들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는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자신과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곤 했었다.

영혼의 향기가 너무나 달콤해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사람. 그런 사람의 곁을 이젠 영원히 떠나야 한다.

눈물이 떨어져 내렸으나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온기를 잃어버려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어도 이젠 영원히 당신을 볼 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잊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과 함께했던 추억과 사랑을.

잘 있어요…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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