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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7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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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4화

풍운대는 미련 없이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왔다.

강호의 정의를 위해 참전한 전쟁이었지만 아직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중 그 누가 얘기하더라도 비겁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하게 싸웠으니 미련은 남지 않았다.

최선두에 서서 수많은 적들을 죽였고 자신들 역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떤 누가 그들에게 비겁하다는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떠나는 그들의 눈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

같이 싸운 사람들을 죽음 앞에 남겨놓고 후퇴를 한다는 것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문의 명은 그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들의 목숨은 구룡의 요청에 의해 사문이 혼돈의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점창산을 붉게 물들였다가 덧없이 사라져 간 홍단처럼 그렇게 흩날려야 된다.

후퇴의 길은 험난했다.

미리 운극이 후퇴로를 설정하고 경로를 안내했음에도 부상당한 몸으로 잠시도 쉬지 않은 채 달릴 수밖에 없었으니 엄청난 고통이었다.

특히 운호를 업은 운여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역시 제법 많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운호마저 업고 달렸으니 호흡이 끊어질 듯 거칠어졌다.

운호는 기식은 살아 있었으나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기혈까지 엉켜 있어 치료가 급한 상태였지만 일행은 멈추지 못했다.

이대로 천왕성의 추격에 따라잡히면 살아날 방도가 없을 정도로 풍운대는 전투력의 칠 할 이상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전력으로 벗어난 것이 주요했던지 천왕성은 상덕(常德)에 도착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이제 천자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응급치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자산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장가계와 인접해 있는 험산 중의 험산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서 풍운대를 잡기에는 불가능한 지형을 가진 곳이었다.

산자락이 한눈에 보이는 상봉에 자리를 잡은 채 풍운대는 거기서 오 일을 보냈다.

거듭되는 전투로 지친 육신을 달랬고 온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느라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오 일은 금방 지나가고 말았다.

운호는 언제나 보여주었던 기적 같은 회복력으로 오 일이 지나자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형들조차 아직 제대로 운신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그는 벌써 끊임없는 운공으로 엉킨 기혈조차 어느 정도 풀어낸 상태였다.

운곡을 비롯한 풍운대의 얼굴은 너무 기가 막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운상과 운여는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운호의 믿지 못할 회복력을 워낙 많이 봐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예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중이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운곡의 지시로 운호가 상덕(常德)에 다녀온 것은 오시 무렵이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달려올 때는 그렇게 멀었던 거리가 몸이 회복되자 불과 한 시진밖에 걸리지 않아 운호는 산을 내려간 지 반나절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운호가 돌아오자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운기행공을 하던 풍운대가 모두 모여들었다.

먼저 입은 연 것은 운곡이었다.

“어떻더냐?”

“파한문은 칠 할이 죽었고 겨우 삼 할만 전곡을 빠져나와 익양의 모산파와 합류했답니다. 주봉을 지키던 패천방은 적들과 교전을 벌이다가 파한문이 패퇴하면서 망성(望城)으로 후퇴를 했다고 합니다. 운극 사형의 예측대로 이차 방어선은 망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네 개의 문파가 전부 망성에 집결했구나. 전선이 점점 좁혀지고 있으니 싸움도 더욱 치열해지겠다. 천무도는?”

“다행히 살아서 후퇴했지만 부상이 심하다고 하더군요. 왼팔이 잘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천무도까지 잡아내다니 도대체 놈들의 무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구나. 정말 무서운 자들이다.”

“문제는 천왕성의 병력이 망성을 차단한 채 주력 중 일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응의 전서에는 그들이 아무래도 우리를 노리는 것 같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를 노린다고? 벌써 육 일이나 지났는데?”

“놈들의 정보망은 대단합니다. 호북에서 우리의 행적을 찾지 못했으니 여기에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워낙 우리한테 크게 당해서 원한이 깊을 테지요.”

“음…….”

운호의 보고를 들은 운곡의 입에서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들을 맞아들였다가는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을 테니 저절로 고민이 깊어졌다.

천왕성은 운호를 비롯해서 사제들의 절대적인 무력을 확인했기 때문에 추격을 벌인다면 그에 상응하는 무인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운곡이 고민에 잠겼을 때 운몽이 나섰다.

“사형, 호북으로 빠져나갑시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중부 무림맹의 관할 지역으로 가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거기라면 놈들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 수밖에는 없겠구나.”

“서두르시죠. 가시권 안에 들게 되면 잡히는 건 시간문젭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됩니다.”

“할 수 없지.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힘들더라도 가는 수밖에. 준비해라. 떠나자!”

 

석천(石泉)에 방어선을 편 당문의 무인들은 형편없는 몰골로 위치를 사수하고 있었다.

당문은 청당전을 시작했을 때 직계와 방계, 그리고 산하 중소 문파의 무인들까지 전부 합해 삼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보유했었으나 이제 남은 건 겨우 백오십뿐이었다.

주력 무인들도 대부분 유명을 달리해서 남은 것은 문주인 당청과 내원당주 당황을 비롯해서 겨우 이십여 명이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의 상태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당운영의 아버지이자 당문삼무의 일인인 당황은 왼쪽 손목이 잘렸고 왼쪽 옆구리에 창자가 삐져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어 겨우 목숨을 보전하는 중이었다.

나머지 대다수도 전부 한두 군데씩 부상을 입고 있어 당문의 진영은 마치 부상 병동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문제는 이런 당문을 구룡이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병력을 지원해서 방어를 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구룡 중 누구도 나서서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구룡을 건드린 당문의 행동은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풍검문에 당해서 전멸할 처지에 빠진 것을 구해준 것은 당문이 예뻐서가 아니라 전력 보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세력이 하나라도 더 살아남아야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소림 방장의 주장으로 당문은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허름한 전막에 마주한 두 노인의 모습은 예전의 성세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정광은 날카로웠고 위압적이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무림십왕의 일인이자 당문주인 독왕 당청과 그의 동생 당황이었다.

“벌써 삼 일짼가. 오늘 역시 조용하구나.”

“놈들이 구룡이 맡고 있는 방어선을 때리고 있답니다. 여기는 외곽이기 때문에 주 공격로에서 빠진 모양입니다.”

“병력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일이 아니었어. 이쪽 방어가 강하다고 생각했다면 칼날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구룡 쪽으로 공격이 집중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습니다. 놈들이 계속 공격을 해왔다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다친 자들에 대한 치료는 어찌 돼가고 있는가?”

“쉽지 않군요. 가문에서 가져온 비상 약품마저 모두 동이 난 상태라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탭니다.”

“그럼 이대로 버텨야 된다는 뜻이구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당황이 붕대로 둘둘 말려진 자신의 왼팔을 슬쩍 내리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형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는 행동이었지만 당청은 이미 그의 왼팔을 확인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중이었다.

“고통스럽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오래전 상처라 이제 아무는 중입니다.”

거짓말이다.

계속되는 싸움으로 인해 잘려진 왼 손목에는 이제 창이 생겨 진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붕대마저 제대로 갈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는 계속해서 악화되는 중이었다.

안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없으니 괜한 걱정을 만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아니라 해도 가형이자 문주인 당청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당황의 대답을 들은 당청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작게 흔든 후 한숨을 지었다.

“가문에서 가져온 암기와 독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구나. 이제 몇 번만 더 싸우면 그마저도 쓸 수 없겠다.”

“언제 우리가 암기에 의지해서 싸웠습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가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다. 과욕으로 수많은 식솔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죽어서도 선조들을 뵐 면목이 없다.”

“형님!”

“가문의 영광이란 미명 아래 검을 든 것은 온전히 내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이냐.”

“그러기에 더 사셔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가문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형님의 죄를 용서받는 길입니다. 헛된 생각을 하시게 되면 선조들뿐만 아니라 이슬처럼 떨어진 수많은 식솔들이 형님을 원망하게 될 겁니다.”

“어헝… 어헝!”

당황의 말을 들은 당청이 스르륵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 곡을 쏟아냈다.

요즘 들어 부쩍 늙어버린 당청의 얼굴은 눈물이 범벅되자 논밭에서 비를 흠뻑 맞은 촌부처럼 변해 버렸고 그의 곡소리는 너무 구슬퍼 듣기 힘들 정도였다.

가문의 오래된 숙원을 이루고자 평생을 노력해 왔던 결과가 당문의 몰락으로 나타나자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눈을 감으면 죽어간 동생과 수족들의 망령들이 떠올라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은 오로지 고통과 회한, 그리고 분노만이 남을 뿐이다.

 

당운영은 멍하니 산 아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과 푸른 하늘.

고개를 들면 천국이었으나 눈만 내리면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능선에는 아직도 치우지 못한 시신들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고랑이 파일 정도였다.

수많은 가문의 주력 무인들이 죽어갔고 당문칠비 중에서도 자신을 포함해서 단 세 명만 살아남은 상태였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키운 비밀 병기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적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안겨주며 맹렬하게 산화해 갔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공포였다.

적들의 공격은 집요했고 무서웠으며 강력했다.

천왕성의 무인들은 그동안 무림을 종횡하며 겪었던 무인들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무공을 장착했는데, 그 위력이 너무 강맹해서 제대로 받아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문의 전력은 지난 석 달 동안 오 할이 소멸되었다.

청당전을 벌이면서도 고스란히 유지되어 왔던 병력이 천왕성과의 단기간 싸움에서 덧없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목숨을 위협받는 전쟁을 치를 때마다 언제나 그가 떠올랐다.

수많은 상처를 헤아리며 그가 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자신을 자책하며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 바람은 신기루처럼 끝없이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힘들수록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밤이 되면 스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반드시 오겠다는 약속을 믿었다.

다시는 아파하지 않도록 해주겠다며 그는 자신의 입술에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떠났다.

그 입술, 그 감촉.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손.

자신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던 넓은 가슴.

모든 것이 그립고 또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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