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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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2화
천왕성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운곡의 예측대로 두 시진이 지난 후부터였다.
공격 병력은 무려 삼천.
그중 천은 안록산에 남아 있는 패천방을 견제하기 위해 빠져나갔고 남은 이천 병력이 전곡으로 다가왔다.
너무 많다.
전곡을 지키는 파한문의 병력은 모두 합해 칠백에 불과했으니 거의 세 배에 달하는 병력이다.
물론 공격해 오는 자들의 선두 병력 천여 명은 서부 무림의 중소 문파에서 참여한 무인들이기 때문에 전력에 커다란 도움은 되지 못하지만 황색 무갑으로 통일한 황무전과 흑색 무갑을 착용한 신기전은 천왕성의 진력 중 하나로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였다.
운곡은 다가오는 병력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뒤쪽에 배치되어 있던 파한문 무인들은 적들의 공격 병력을 확인한 후 이미 사색으로 변해 있는 상태였다.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은 상황.
이대로 싸움에 돌입한다면 파한문은 천왕성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운곡이 믿는 것은 파한문주 천마도 황무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었다.
황무가 살아 있는 한 파한문의 전 병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전곡을 방어할 것이다.
“많군.”
“그렇군요. 병력도 많지만 기세가 강합니다.”
“기세가 강하다는 것은 고수들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공격을 주저하던 놈들이 주저 없이 공격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한 대비책을 마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제 생각에는 저자들인 것 같습니다.”
“…음.”
운검이 손을 들어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자 운곡의 입에서 침중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왕성 병력의 중간쯤에서 거대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세 명의 노인이 용갑을 입은 채 완벽하게 기세를 풀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대단한 노인들이구나.”
“일부러 기세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저 정도라면 절대의 경지에 들어선 자들인 것 같습니다.”
“뒤를 따르는 놈들도 무서운 자들이다. 내가 봤을 때 저자들은 우리를 노리고 온 것 같구나.”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세 명의 노인과 열 명의 무인이 따르고 있었는데 모두 용갑을 입어 다른 자들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물론 복장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이천의 병력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운곡과 운검의 대화였지만 뒤에 도열해 있던 풍운대는 모두 들었다.
이미 적들은 백 장 앞까지 진출해 왔기 때문에 일촉즉발의 기운이 전곡을 가득 채우는 중이었다.
전곡은 일종의 계곡이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었다.
깎아지르는 절벽들이 양쪽으로 솟구쳤고 폭이 삼십 장에 달했는데, 거대한 바위들이 중간중간 가로막아 방어막을 구축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파한문의 병력들은 적들이 근접해서 다가오자 스물에 달하는 강비전을 준비하고 대기했다.
강비전은 대규모 살상 무기로서 한 번의 장전으로 스무 대의 강전을 날리는 특수 무기였다.
타격 범위는 오십 장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다가온다면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이전 싸움에서 노출된 강비전에 대해 완벽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장방패(長防牌)를 장착한 채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쏘아진 강비전은 별다른 위력을 보이지 못해 천왕성의 병력은 여유 있게 전곡의 입구까지 다가왔다.
삼십 장은 백여 명이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으나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좁은 통로이기도 했다.
그 말은 우세한 병력의 활용도가 극히 제한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두에 섰던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먼저 공격을 해왔지만 밀집 방어로 맞선 파한문의 병력에 막혀 손해만 보고 물러섰다.
이렇게 제한된 장소에서는 개인의 무력이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데, 그들은 파한문의 정예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몇 번의 똑같은 행태가 반복되자 천왕성은 중소 문파의 무인들을 뒤로 물리고 흑색 무갑을 받쳐 입은 신기전을 전면에 내세운 후 집중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역시 다르다.
신기전의 공격은 파한문 병력의 방어선에 충격을 입혀 점점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는데, 밀어내는 힘이 너무 강력해서 피해가 속출했다.
전곡의 길이는 오십 장이었지만 신기전의 공격에 이미 십여 장이 밀려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대로 둔다면 불과 반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돌파당할 판이었다.
풍운대가 전면에 나선 것은 신기전의 파상적인 공격에 방어선이 이십 장 정도 뒤로 밀려났을 때였다.
운호와 운상을 중심으로 기러기처럼 날개를 편 풍운대는 전 전선을 아우르며 순식간에 신기전의 선두를 쓰러뜨린 후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무소불위의 무력.
검기를 난사하며 전진하는 풍운대의 공격에 신기전은 막대한 피해를 보면서 연신 뒤로 물러섰다.
살아서 움직이는 자, 풍운대의 전권에 놓이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신기전은 연신 뒤로 밀리다가 병력의 우위를 가지고 반격을 해왔으나 더 많은 피해를 양산시킬 뿐이었다.
순식간에 파한문의 방어선이 풍운대의 전진에 힘입어 다시 십여 장 앞으로 당겨졌다.
계곡 안은 쓰러진 무인들의 시신으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가득 찼으나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더 많은 적들을 죽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무인들의 숲을 가로지르며 용갑의 무인들이 나타난 것은 풍운대에 의해 삼십여 명의 신기전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였다.
팽팽한 대치.
운호를 중심으로 진형을 구축한 풍운대가 적들의 출현에 따라 잠시 전열을 정비하자 천왕삼공이 앞으로 나서며 품자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뒤를 열 명의 무인들이 비슷한 형태로 늘어섰는데, 풍운대가 만들어놓은 진형과 흡사한 것이었다.
천왕십수.
천왕성이 자랑하는 특수 타격대 중의 하나.
절대의 경지에 근접할 만큼 무시무시한 무력을 지닌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연마해 온 합격진이 있는데 바로 천마혈진이라는 것이었다.
천마혈진의 위력은 천왕성주 요환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력해서 갇히는 순간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려진 절진이었다.
일공의 입이 열린 것은 천왕십수가 귀신처럼 그들 뒤에 내려앉은 후 풍운대와 마주 섰을 때였다.
“너희들이 풍운대냐?”
“그렇소.”
“과연 훌륭하다. 점창에서 너희 같은 자들을 길러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정체를 밝히시오.”
“우리는 천왕삼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뒤에 선 아이들은 천왕십수라고 하지.”
“당신들은 우리 때문에 온 거요?”
“물론.”
“늙었지만 아직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았으니 조심조심해서 움직인다면 조금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죽을 자리를 일부러 찾아온 걸 보니 그대들의 수명이 다된 모양이오.”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재밌기도 하지만 검도 무척 예리하오. 그러니 조심해야 될 거요.”
말을 받아주던 운호가 흑룡검을 슬쩍 떨쳤다.
아직 피가 묻어 있던 그의 검은 맺혀졌던 핏방울이 떨어져 나가자 퍼런 나신을 드러냈다.
풍운대의 수장은 운곡이었으나 운호가 대답을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일공이 그를 바라보며 말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품자형으로 늘어섰던 천왕삼공의 몸이 팽이처럼 돌며 접근한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워낙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나 그들이 움직이자 운호와 운상, 그리고 운여의 검이 동시에 전면을 향해 쏘아졌다.
운호에게 집중된 공격이었지만 결국 천왕삼공의 검이 분리되며 운상과 운여의 검을 차단했다.
그대로 공격했다면 운호에게 어느 정도 치명타를 입혔겠지만 절대의 반열에 올라선 운상과 운여의 검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강력했다.
자연스럽게 신형들이 나뉘어져 접전으로 들어갔다.
천왕삼공과 점창삼신룡의 싸움.
나중, 무림 역사에 회자되었던 전곡전투의 백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단숨에 척살하려던 시도가 무산되자 일공은 쓴웃음을 지은 채 운호의 앞에 섰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그를 합해 천왕삼공이라 불렀으나 그의 무력은 친구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천왕이십오성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닌 사람을 합해 천왕오강이라 불렀는데 일공은 그중에서도 세 번째로 꼽히는 무적의 고수였다.
그의 독문무공은 천신무한검법(天神無漢劍法)으로, 천왕성의 삼절에 꼽힐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녔는데 이십오 년 전 단 한 번 검을 뽑아 상대를 척살한 이래로 지금까지 시전된 적이 없었다.
천지를 갈라 버리는 위력의 절대검법.
천왕성주 요환은 그의 천신무한검법을 견식한 후 천왕검법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절기라며 감탄을 터뜨렸다고 한다.
일공은 검을 운호의 미간에 겨눈 채 가만히 서서 움직임을 주시했다.
십제의 반열에 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직 이립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로 젊었으니 그런 사실을 믿지 않았는데 막상 검을 들고 마주 서자 산악을 대하듯 대단한 신위가 나타났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대조차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검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강적.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자들보다 무서운 자다.
검을 진격세로 만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격로가 눈에 들어왔으나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그에 따른 반격이 얼마나 대단할지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쪽에서는 싸움이 벌어져 천지를 가르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쉽게 움직이지 않고 운호의 대응을 지켜보았다.
고수는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운호는 일공이 다가와 전면에 서자 숨 막히는 긴장감을 느꼈다.
십오천강에 포함된다는 마창과 혈염공을 상대해 봤지만 일공은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감으로 그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마치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일공은 무허의 경지를 나타내며 운호를 압박해 왔다.
천천히 심호흡을 마치고 흑룡검을 치켜들었다.
검을 치세우는 단순한 동작마저도 이토록 힘든 것은 일공이 은연중에 내뿜는 기세가 운호의 행동을 제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운호는 흑룡검을 치세워 일공의 미간을 향해 마주 겨냥했다.
팽팽하게 터질 듯한 기세의 대립.
그들은 서로의 기세에 의해 쉽게 움직이지 않고 한참 동안 대치하다가 옆에서 날아온 돌멩이가 그들의 검 사이로 끼어들자 폭발하듯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일공의 검은 하늘에서 쏘아져 내리는 우박처럼 검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허수는 전혀 없고 모든 검기는 진수였고 살수였으며 패수였다.
운호는 분광에 이어 회풍으로 맞서며 일공이 뿜어내는 검기를 튕겨냈다.
공청석유의 기연 속에 내공이 오기조원에 달한 운호의 사일검은 예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공의 검기들은 운호의 분광과 회풍을 파고들며 조금씩 전신에 상처를 만들어냈다.
무서운 검법이다.
극에 달한 회풍으로도 완벽하게 적을 제압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적의 검은 심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왼쪽 가슴을 훑고 빠져나가는 검기를 따라 들어가며 회풍의 멸자결을 펼쳤다.
자신의 몸은 피로 도배되다시피 상처를 입었지만 일공의 몸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맑은 호수처럼 깊이 가라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
그렇다. 그의 눈에 들어 있는 것은 자신감이 분명했고 그 원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우세를 점하는 자신의 검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해서 분광과 회풍을 가지고 상대한다면 이긴다는 보장을 하지 못할 만큼 전세는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승부.
이제 승부를 봐야 할 때였다.
연이어 멸자결을 펼쳐 일공을 뒤로 물러나게 만든 운호는 지금까지의 검세를 거둬들이고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공을 향해 일도양단의 자세로 검을 내리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