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69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69화
나극수는 검을 들고 진지를 형성하고 있는 칠부 능선으로 나갔다.
오르는 길은 나무를 베어 시야를 확보했고 오부 능선부터는 바윗길이니 공격해 오는 적들의 신형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검을 치켜든 채 긴장된 눈으로 산 아래를 바라보는 수하들의 몰골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미안했고 불쌍했다.
강하고 멋진 수장으로 남고 싶었지만 자신의 몰골은 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제대로 된 위로의 말조차 하지 못했다.
수하들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같이했던 수하들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보려 하지 않았다.
안다, 그 마음.
그들은 알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먼저 적들을 향해 자신이 뛰어들 거란 사실을…
먼저 가는 수장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그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친동생처럼, 또는 자식처럼 함께 살아왔던 수하들의 죽음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만큼 뼈저리는 아픔을 그의 가슴속에 새겨놓았다.
그럼에도 한마디 말조차 꺼내어 그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전쟁에 나선 무인에게 동정은 치욕이며 두려움은 패배의 지름길이었으니 언제나 의연하고 당당하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럼에도 숨겨놓은 고통은 점점 커져 이제 감당할 수조차 없을 만큼 커졌다.
이제 이 한 번의 싸움이 끝나면 더 이상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슬픔과 분노를 내려놓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배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수하들에게 못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자 눈물은 참을 수 있었으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검병을 부여잡았다.
날아오는 적들의 신형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뒤쪽에서 귀를 자극하는 청명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위에 왼발을 걸쳐 놓고 언제든지 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할 때였다.
“우리가 좀 거들어도 되겠소?”
너무 놀라 뒤를 돌아보자 흑색의 전도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일곱 명의 무인들이 귀신처럼 나타나 있었다.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전면은 수하들이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었으니 이들이 넘어온 건 문주가 지키는 오솔계 쪽이 틀림없었다.
흑의의 전도복, 거기에 붉은 독수리.
나타난 자들은 점창의 인물들이 틀림없었다.
“그대들은 점창 사람들이오?”
“그렇소.”
“여기 온 이유는?”
“도와주러.”
“당신들만 온 거요?”
“그렇소.”
“진정 이해할 수 없군. 저들의 숫자가 보이시오? 잘 안 보인다면 우리 쪽 숫자는 명확하게 보이겠지. 당신들 여덟이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여긴 지옥이오. 당신들이 와준 것은 고마우나 죽을 자리에 왔으니 또한 반갑지 않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우리는 죽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하러 왔소. 그러니 반가워해도 되오.”
운곡의 평온한 대답에 나극수의 얼굴에서 천천히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의외의 출현에 놀랐기 때문에 기도를 살피지 못했는데 막상 나타난 자의 표정과 음성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평온한 것을 뒤늦게 알아내고는 검미를 찡그렸다.
뭔가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고수의 기운.
평온함 속에서 풍겨 나오는 서늘하고도 무거운 기세는 분명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고수의 기도임이 분명했다.
갓 이립을 넘은 나이.
아니다. 몇은 이립도 넘지 않을 만큼 젊다.
도대체 이런 나이에 어찌 이렇게 막강한 기도를 자연스럽게 흘릴 수 있단 말인가.
새삼 풍운대가 풍기는 기도에 몸이 떨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면밀히 살피자 하나하나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전륜왕에 비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무인들이다.
나극수의 음성이 잘게 떨려 나온 것은 운곡의 시선이 산으로 접어든 붉은 전포 무인들에게 향했을 때였다.
“대단한 기도요. 이 정도의 기도를 나타내다니 당신들의 정체가 도대체 뭐요?”
“우리는 점창의 풍운대라 하오.”
“나는 풍운대란 이름을 처음 듣소.”
“그럴 겁니다. 풍운대란 이름을 걸고 강호에 나온 것은 처음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오. 하지만 아주 초출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초출은 아니다?”
“풍운대란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탕마행을 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니까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오.”
“탕마행… 그렇다면 당신들이…….”
“자, 적들이 거의 다 왔으니 죽지 않으려면 먼저 싸워야 되지 않겠소.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보시오.”
운곡이 웃음으로 답한 후 슬쩍 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전포 무인들은 이미 오부 능선을 넘어 바람처럼 방어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풍운대는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적들을 향해 마주 뛰어나갔다.
일격일살.
그토록 무서운 기세를 내뿜으며 돌진하던 일운강의 검귀들이 풍운대의 질주에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무풍지대처럼 휩쓸어 버리는 풍운대의 위력은 가히 경천동지.
누가 저들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불과 일다경이 지났을 뿐인데 이미 붉은 전포의 무인들, 일운강의 검귀들은 땅바닥에 차갑게 식은 육신을 셀 수 없이 내려놓고 있었다.
뒤쪽에서 검을 빼 들고 있던 나극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떠억 벌렸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검을 뽑은 자들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그의 궁금증은 점창삼신룡이 과연 이들 중에 들어 있냐는 것이었다.
최근 일 년 동안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점창삼신룡의 신화는 무림에 살고 있다면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강호를 횡단하며 시행한 게 바로 탕마행이었으니 풍운대 속에 그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의문이 걷히고 개안이 시작된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인으로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스스로 알아서 쓰러지기라도 하듯 일운강의 검귀들은 풍운대의 공격에 픽픽 나가떨어졌다.
특히 가장 전면에 선 세 사람은 신위는 가히 폭풍과도 같았다. 검에서 뻗어 나오는 검기의 비산은 마치 우박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인데, 단 일수에 두셋씩 쓰러져 갔다.
자신의 식견으로는 저들의 무력이 어느 정돈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소문으로만 듣던 점창삼신룡이고 자신들은 죽음을 면했다는 것을.
운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검기들을 튕겨내고 공격해 온 자를 확인했다.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던 검귀들보다 훨씬 지독한 살기를 내보내고 있는 자들.
생각할 것도 없이 이자들이 적색 전포 무인들의 수장임을 알았다.
선두에서 일운강의 검귀들을 상대해 본 결과 이들은 그동안 겪었던 천검회나 팔황문의 부대에 비해서 훨씬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왜 신마문이 유리한 지형을 지니고도 이토록 고전했는지 금방 이해될 정도로 강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검귀들도 운호를 공격해 온 자들과 비교하자 어린아이로 여겨질 정도였다.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세 명의 사내가 날아왔는데, 그들의 검에서는 연신 검기의 산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검귀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었으나 어깨에 달린 견장이 다르다.
금색의 용이 그려진 견장은 햇빛에 반사되며 눈부시게 빛났는데, 그들이 뿜어내는 검기와 함께 운호의 눈을 극렬하게 자극해 왔다.
얼굴에 담겨 있는 분노가 슬퍼 보였다.
수많은 수하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지 그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사일검법의 방어 초식, 비화를 펼쳐 공격을 막아낸 운호는 곧장 분광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는 중삼식까지만을 연환시키며 상대했으나 공격해 온 자들의 무력을 봤을 때 단 일격에 격살하기 위해서는 분광이 필요했다.
전쟁.
피가 흐르는 전쟁에서는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보다 일격에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 알았다.
동정은 필요 없다.
전쟁은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괴물이니 그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더한 고통과 슬픔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콰앙!
아무리 강력한 고수라도 절대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한 이상 운호의 일격을 받아낼 수 없다.
피를 뿜으며 날아간 사내들은 사지가 잘린 채 일어서지 못했는데 얼마나 강력했던지 충돌의 여파로 얼마 남지 않은 일운강의 검귀들이 뒤로 튕겨 나갈 정도였다.
전투는 불과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악귀처럼 덤비던 천왕성의 직속부대 일운강이 처참하게 쓰러지자 천문의 전투부대와 그들에게 빌붙었던 중소 문파의 무인들은 공격을 멈추고 후퇴를 했다.
전장에는 싸움의 중심이 되는 곳이 있고 남악 전선의 중심은 바로 이곳 성산이었다.
그 성산 싸움이 일방적으로 끝나자 나머지 거점을 공격하던 천왕성 측의 병력이 주춤거리다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너무나 어이없는 결과.
이번 공격으로 성산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시켰던 천왕성의 공격이 단시간 내에 실패로 끝나자 싸움은 금방 소강상태로 빠져 버렸다.
또다시 피로 물든 능선.
수많은 시신과 남은 자들의 통곡이 마치 지옥처럼 여겨질 만큼 잔인하게 펼쳐졌다.
풍호당의 무인들은 또 한 번의 싸움으로 겨우 오십 명만 남았다.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자들이 사십에 육박했으니 그렇게 살아남은 것도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불과 한 시진 만에 양측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거의 이백오십에 달했다.
신마문에서 입은 손실이 칠십이었으니 백팔십이 천왕성 병력의 손실이었다.
거의 일방적인 승리.
하지만 얼굴에 웃음을 매단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팔 한쪽이 끊어진 나극수가 긴급하게 지혈을 한 채 운곡에게 다가와 허리를 깊이 숙인 것은 살아남은 수하들을 수습하고 난 후였다.
그는 천문의 비혈당주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팔 한쪽을 잃었지만 끝끝내 버텨내어 목숨을 부지했다.
만약 풍운대가 일운강의 공격을 철저하게 차단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비혈당주의 칼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 감사하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
“목숨 빚은 평생을 갚아도 부족하다 배웠는데 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 것이오.”
“그나저나 이제 남은 병력으로는 이 능선을 방어하기 힘들 것 같은데 어쩌실 요량이오?”
“문주님의 뜻에 따를 것이오. 남악 방어선을 지키느라 우리 신마문은 전력의 대부분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을 지키기 힘들 것 같소. 후방을 지키는 은하문이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 문주님도 방어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어두운 표정.
현실을 직시하고 판단하는 나극수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도 더 이상 싸우기 어려울 정도의 부상을 당했고 살아남은 오십여 명도 전신이 상처로 뒤덮여 움직이기가 쉬워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성산을 지키는 무인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남악 다섯 개의 방어진지에 살아남은 병력은 이제 겨우 삼백에 불과했다.
천이백의 병력이 은하문과 교체되어 방어선을 펼친 것이 십 일 전이었는데 겨우 이 할만 살아남았으니 단시간 내에 얼마나 치열한 접전을 펼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운곡은 나극수의 대답을 들은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산 아래에 펼쳐진 벌판을 바라보았다.
남부 무림맹만 입은 타격이 아니다.
천왕성 측도 남악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양측의 사상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나 그것이 어찌 남악 방어선에만 생긴 일이겠는가.
전 전선이 이토록 치열하지는 않았겠지만 전면전이 벌어진 이상 중원 중심을 가로지르며 형성된 전선은 무인들의 시신으로 가득 덮였을 것이다.
운곡이 발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신마문의 부당주가 부상자를 이끌고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린 이제 가야겠소. 당주께서는 몸 보중하시오.”
“어디로 가십니까?”
“행선지는 없소. 그저 무림맹이 위험에 처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오.”
“허어! 오솔계까지 가려면 한 시진은 족히 걸릴 테니 서둘러야 되겠구려. 정말 고맙소. 신마문은 당신들의 도움을 기필코 잊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