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04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1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04화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지만 분명 장천운이었다.
이 꼭두새벽에 어딜 다녀오는 걸까?
비밀리에 온갖 일을 처리하는 놈이었다. 평범한 일 때문에 밖을 나간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는 발길을 틀어서 장천운 쪽으로 걸어갔다.
“장 대주, 새벽부터 바쁘군. 어딜 다녀오는가 보지?”
“나야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는 길인데, 너는 이 꼭두새벽에 왜 돌아다니는 거지?”
“무사가 수련을 게을리 할 순 없잖아?”
“호오, 이제 정신 좀 차렸나 보군.”
은근히 놀리는 듯한 말투.
백리우진은 속이 울컥했다. 하지만 이제는 함부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단련이 된 터였다.
“보아하니 어디서 된통 당한 것 같은데…….”
장천운의 모습은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찢어진 옷자락이 피로 물들어 있고, 안색을 보아하니 내상을 제법 심하게 입은 듯했다.
게다가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든 걸 보니 나무나 바위를 들이받기라도 한 듯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저 상태라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살심이 독사의 대가리처럼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마 장천운이 공손백과 사계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모험을 해봤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험을 하기에는 들은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왜? 몇 군데 다친 것 같으니까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가 보지?”
장천운이 백리우진의 속마음을 눈치 채고 슬쩍 떠보았다.
백리우진은 기어 나오려던 호승심을 재빨리 억눌렀다.
“하하하, 같은 호위대 대주끼리 싸울 수 있나?”
장천운은 피식 실소를 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성주께 보고 드려야 하니 나중에 보자고.”
백리우진은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장천운이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곁을 스쳐간다. 허점이 서너 군데 보인다.
갈등이 일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놈은 무방비 상태다. 전력을 다해서 구천멸혼수를 펼치면 놈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는 패배본능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자신을 다독인 백리우진은 주먹을 움켜쥐고 장천운이 지나가는 걸 지켜만 보았다.
‘멍청한 놈.’
멀어지는 장천운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다섯 자 거리였다. 백리우진이 공격했다면 양패구상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숨겨놓은 한수가 있다면 더 심각한 상황이 닥쳤을지도 모르고.
그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백리우진은 갈등만 하다가 그 좋은 기회를 흘려보낸 것이다.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는 것부터 배워라, 백리우진.’
장천운이 구천무원으로 다가가자, 외곽경비를 서고 있던 수혼대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봐도 대판 싸우고 온 사람의 모습이다. 저 괴물이 어디서 저 꼴이 되었을까?
내부의 흑월대 이조는 그 정도 반응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 대주?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된통 당한 것 같은데?”
“누가 저 인간을 저렇게 굴렸지? 제대로 굴렸군.”
쑥덕거림 중에는 통쾌해 하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누군지 쳐다볼 것도 없었다. 뻔했으니까.
아마 몇 사람은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기분일 것이다.
장천운이야 사마경에게 들을 잔소리 걱정 때문에 그들을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그래도 사마경의 방 앞 회랑을 지키던 두양양은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장천운의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걸렸다.
구천성이 일원장에서 벌어진 싸움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일원장에서 경천동지의 격전이 벌어졌다. 어지간한 일류고수만 되어도 수백 장 밖에서 기운의 충돌을 느꼈을 것이었다.
그런데 보고조차 없었단 말인가?
누군가가 눈과 귀를 철저하게 막지 않았다면야 어찌 그 일을 모를 수 있겠는가.
“별 거 아냐. 어떤 놈들이 죽자 살자 덤벼서 한바탕 싸웠지. 소성주님은?”
대충 얼버무린 장천운은 사공명신이 입을 열기 전에 턱짓으로 사마경의 방을 가리켰다.
“들어와!”
방안에서 빽,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우우.’
속으로 한숨을 쉰 장천운은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 좌우에 서 있던 구천호령 두 사람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장천운을 기묘한 눈빛으로 곁눈질했다.
그들은 장천운의 망가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어린놈이 잘난 척하더니…….’
‘임자를 제대로 만났군.’
장천운이 방으로 들어가자, 다탁 옆에 앉아 있던 사마경이 벌떡 일어섰다. 구양명과 소연추도 그녀 곁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밤을 지새운 듯했다.
다행히(?) 연송하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밤새 연락도 없이 어딜 갔다 온 거지?”
사마경이 도끼눈을 뜨고 다그쳤다.
“사람을 풀어서 찾아볼까 하다가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아서 기다렸어. 그런데 이제야 들어와? 흥! 그래도 해가 뜨기 전에는 들어왔네. 설마 오늘도 누굴 만나서 술을 퍼마신 건 아니겠지?”
괜한 불똥에 구양명이 움찔했다. 일전에 장천운과 함께 밤새며 술을 마신 장본인 아닌가.
다행히 장천운에게는 마침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몸 상태도 그 핑계를 뒷받침 해줬고.
“어젯밤에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습격?
사마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구양명과 소연추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멍든 것뿐만 아니라 안색도 창백했다. 옷자락도 몇 곳이 찢어져 있고, 피도 제법 많이 묻어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도주하는 그자의 뒤를 몰래 뒤따라갔다가…….”
장천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어젯밤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곳에서 수상한 자와 격전을 벌였는데…… 빠져나오다가 부상을 입어서…….”
장천운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사마경과 구양명은 물론이고 천장에 있던 철무도 놀라서 탄식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장천운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번 붙어봤으니까.
심지어 공손백과 사계가 함께 손을 쓰고도 잡지 못한 고수가 바로 장천운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장천운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었단 말인가?
“……겨우 빠져나와서 내상을 다스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되었지 뭡니까?”
사마경은 언제 다그쳤냐는 듯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장천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서, 내상은 다 나았어?”
“많이 좋아졌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걱정 안하게 생겼어?”
사실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고완과 대결을 벌였다가 정신까지 잃은 터였다. 거기다 독약까지 복용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일원장이라고 했지? 어디에 있어?”
사마경이 입술을 씹으며 물었다. 아름다운 봉목에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지금 가봐야 텅 비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들에 대한 단서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 아냐?”
“아주 철저한 자들입니다. 추적당할 단서는 티끌조차 남기지 않고 없앴을 겁니다.”
“흥! 구천성 코앞에서 감히 그딴 짓을 해? 어쩌면 그자들 말고 또 다른 자들도 있을지 모르겠군.”
“그래서 가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왜?”
“더 깊숙이 숨어버리면 찾기가 그만큼 더 힘들어질 테니까요.”
이마를 찌푸리고 있던 사마경이 뭔가를 떠올리고 눈빛을 번뜩였다.
“가만? 그런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왜 아무런 보고도 없었지?”
평화로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그 정도 사건이라면 당연히 최상층부까지 보고가 올라와야 정상이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마경이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이라면 그들의 조직이 성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다고 봐야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태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사마경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어서 물었다.
그때는 이미 찌푸려졌던 이마도 펴졌고, 분노도 차갑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장천운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냉정해진 사마경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예전의 그녀가 그리워졌다.
비록 제멋대로이긴 해도 그때가 더 여자다웠는데…….
하지만 그녀가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씁쓸함을 삼켜야만 했다.
“본진의 출정이 시작되면,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럼…… 꼬리가 드러나겠죠.”
사마경도 동의한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그럼 출정을 서둘러야겠군. 천운은 출정할 때까지 최대한 부상을 다스려.”
* * *
아침식사가 끝난 후.
장천운은 흑월대원 중 몇 사람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며칠 푹 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장천운이 얇은 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자, 몇 사람의 눈이 일제히 탁자 위로 향했다.
특히 저두심의 눈빛은 횃불이 눈에 박힌 듯 활활 타올랐다.
먹물을 먹인 듯 색까지 검은 암기는 날이 예리하고 탄력조차 좋았다.
어지간한 솜씨로는 흉내도 내기 힘들 만큼 높은 제작기술을 요구하는 암기.
그에 비하면 자신의 표도는 허접한 뒷골목의 잡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멋진 암기군.”
“세 번째 공격을 받았을 때 날아든 화살은 찾지 못했어.”
“이런 암기는 사용하기가 힘들뿐, 제대로만 쓴다면 절정고수의 진기막 정도는 종잇장처럼 뚫어버릴 수 있어. 도대체 누군데 이런 암기를 쓰는 거지?”
저두심이 조심스럽게 암기를 만져보며 말했다.
그에 대해선 청목이 대답했다.
“강호에서 암기의 고수를 말할 때는 사천당가를 우선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사천당가 외에도 암기술로 절정고수가 된 사람들이 몇 있습죠. 특히 이런 특이한 암기로 쓰는 자는 더욱 적고요.”
장천운이 그 말에 몇 가지 단서를 달아주었다.
“키가 다섯 자 예닐곱 치 정도에 나이는 사십대. 마른 몸매에 신법이 무척 뛰어난 자였소.”
청목은 숨을 서너 번 쉴 시간 정도 생각하더니 이름 하나를 말했다.
“일수귀견 하노두. 그자의 인상착의가 대주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노두?”
“그자는 삼십대 초반에 암기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십여 년 전에 갑자기 사라져서 지금은 이름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장천운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모두 세 장, 종이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손우곤과 이적상, 이적문이.
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던 혁련기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오.”
혁련기의 얼굴이 뒷산의 검은 바위처럼 굳어졌다. 구산은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홉떴다.
구양명과 교왕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장천운이다.
저들이 누구기에 그런 장천운의 몸에 칼집을 내고 얼굴에서 핏기를 빼냈단 말인가.
“특히 이자는 일대일로도 나보다 약하지 않았소.”
장천운이 손우곤을 콕 짚어서 말하자 혁련기와 구산의 굳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구천성 외곽의 작은 장원에 살고 있는 자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그자가 장천운과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녔다니.
“정말 수상한 자들이군. 그런 자들이 왜 구천성 외곽에서 지내고 있었던 거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요.”
장천운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눈빛만 차갑게 번뜩였다. 그러고는 질문이 이어지기 전에 청목에게 말했다.
“청목, 첩밀각에 가서 이 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검토해보시오.”
“예, 대주.”
청목을 첩밀각으로 보낸 장천운은 방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는 방안의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맹목적이라 할 만큼 믿었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목숨을 맡겨야할 동료들이니까.
그런데 단 하루 사이, 그 믿음에 금이 갔다.
자신은 정말로 이들을 잘 알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