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55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55화
황만이 놀란 것은 명일개가 놀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절대 노출되면 안 되는 비밀이 노출되었으니 이제 개방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방 지부의 본거지는 단순한 거지 소굴처럼 보이지만 이중 삼중의 경계망이 쳐져 있고 요즘처럼 일급 경계 태세가 가동된 상황에서는 훨씬 많은 숫자의 방도들이 경계를 선다.
그럼에도 마검이 아무런 방해 없이 들어왔다는 것은 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이 모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가 없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모두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동안 보여줬던 마검의 행동을 본다면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마검은 질풍처럼 천하를 종횡하며 수많은 무인들을 도륙한 철혈의 사내였다.
자신이 지부를 방문하면서 경계망이 일급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황포교 주변에는 거의 오십에 달하는 방도들이 흩어져 있었다.
서안 지부 병력의 반 이상이 경계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명일개의 안색은 침중하게 변해 있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모두 죽였는가?”
“이래서 무림의 소문이 무서운 거라니까. 나를 마치 살인귀처럼 여기니 이러다가는 도적을 포기하고 속세로 내려와야 되겠어. 도대체 왜 내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요?”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냐?”
“그까짓 거지들을 왜 죽이겠소. 멍청한 자들을 모신 것이 죽을죄라면 세상에 고개 들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나저나 이제 당신 정체나 들어봅시다?”
“나는 명일개라고 한다.”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숨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오늘 이 자리는 마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이 결정될 테니 당당하게 대하고 싶었다.
무력으로 상대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마검은 이미 강호에서 십제의 반열에 올려놓은 절대고수였으니 겨우 절정에 오른 자신에게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존재다.
그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눈을 부릅뜰 수 있었던 건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가진 자는 용기를 보일 수 없지만 두려움을 버린 자는 누구보다 강렬한 용기를 지닌다.
그의 태도를 보며 운호가 쓴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으로 저리 나오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념과 체념이 동시에 가슴을 채우면 사람은 저리 변한다.
목숨을 포기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귀신이 눈앞에 나타나도 두렵지 않은 법이다.
“당신들 개방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었고 한때는 무림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천왕성의 개가 되었다니 진정 믿기지가 않소. 도대체 그 이유가 뭐요?”
“점창이 그걸 묻다니 오히려 내가 이해되지 않는구나. 점창은 무림에서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었고 심지어 구룡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났다. 묻겠다. 그때 너희들의 심정은 어떠했느냐?”
“…개방도 그렇다는 말이오?”
“점창은 그나마 다른 무공들이라도 있어 버틸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강룡십팔장이 없는 개방은 문파의 존속조차 어려울 정도였고 무림은 그런 우리를 문파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천왕성의 개라고 했느냐? 크크크… 개가 아니라 돼지라도 좋다. 이 원한만 갚을 수 있다면 개방은 뭐가 되어도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가당치 않은 변명이오!”
“변명이 아니라 주장이다. 개방의 전 문도는 죽음을 염두에 둔 싸움을 하고 있다. 그것이 어찌 변명이라 할 수 있단 말이냐!”
운호의 일갈에 명일개의 입에서 피를 토할 것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버틴다, 당당하게.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허리는 꼿꼿하게 펴져 당당하게 운호를 향하고 있었다.
신념에 가득 찬 그의 목소리는 예전 칠절문과의 일전을 위해 산에서 내려올 때 사숙이신 청문자께서 풍운대를 향해 터뜨린 일갈과 비슷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단순한 원한 때문에 무림 전체를 피로 물들인다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하나 그것은 진정 어리석은 짓이오. 무인은 무인의 길을 가야 하오. 남의 힘을 빌려 원한을 갚는다는 건 무인으로 할 짓이 아니란 말이오. 분명 그대들은 결과가 어찌 되든 더 이상 무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오. 어리석은 판단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개방을 세상에서 지우게 되었으니 어찌 선조들을 볼 수 있을까. 당신들은 죽어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오.”
“우리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명일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운호의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타구봉이 들려 있었는데 얼마나 닦았는지 윤이 번들번들 나고 있었다.
개를 쫓는 데 쓴다고 했던가.
개방의 타구봉법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가 타구봉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살기가 뭉텅거리며 새어 나왔다.
청안사의 가을은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산을 가득 덮은 홍단은 마치 불붙은 것처럼 붉어져서 눈을 자극했고 푸른 하늘은 홍단과 어울려 더욱 높게 보였다.
“오라버니, 참 예뻐요.”
“…응.”
“무슨 대답이 그래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고민 없어. 단지 나는 네가 더 예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야. 청천보다, 홍단보다 네가 더 예뻐서 어떤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운상의 대답에 소하령의 얼굴이 산에 핀 홍단처럼 붉어졌다.
수줍은 미소가 얼굴에 피었고 몸은 저절로 웅크려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예쁘다는 칭찬을 받는다는 건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찬사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소하령은 슬쩍 다른 곳을 바라보는 운상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아름다운 눈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운상은 시간이 갈수록 천하의 어떤 미남자보다 매력적으로 변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삼 같이 있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어려운 순간들의 연속이었으나 언제나 즐거운 시간들이기도 했다.
이제 하남으로 들어서면 그녀는 운호 일행과 헤어져 안휘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얻어낸 정보들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호천십문을 결속하는 중요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
마음은 운상과 함께하기를 원했지만 현실은 다시 멀고 먼 길을 돌아 은하문을 향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운호는 그들에게 시간을 준 것인지도 몰랐다.
꿈결 같은 시간들. 운상과 사찰의 주변을 거닐며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는 시간들이 그들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생각의 꼬리가 멈추지 않았다.
헤어져 홀로 안휘로 향할 생각을 하자 감정의 편린들이 그녀를 괴롭히며 상념에 젖게 만들었다.
따뜻한 감촉이 손에서 느껴진 것은 혼자가 될 외로움에 스르륵 눈으로 습기가 올라올 때였다.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을 잡아온 운상의 손길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따스해서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령아.”
“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바보.”
“너도… 날 좋아하니?”
“대답 안 할 거예요.”
“왜?”
“대답해 주면 오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녀의 대답에 운상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친구들과 대부분 행동을 같이했고 같이 다녔음에도 개인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노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질문을 하면서도 하염없이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그녀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쩔까 하는 걱정에 물으면서도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적인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대답을 해준 것이 훨씬 좋았다.
그녀의 손을 잡았던 오른손을 풀어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눈썹이 아름다웠다.
천천히 손을 옮겨 그녀의 코와 귀를 만졌고 곧이어 목덜미로 내려가 그녀를 안았다.
마치 허깨비처럼 그녀는 힘없이 그의 품으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용기가 생겼다.
이대로라면 그녀와 꿈속에서 했던 것처럼 입맞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긴 몸을 떼어내고 눈을 맞추자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겨졌다.
그녀는… 그녀는 정말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뭐하는 짓이야!”
우측 숲길을 뚫고 두 개의 인형이 날아오며 소리를 지른 것은 운상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로 천천히 다가갈 때였다.
기겁을 하고 고개를 돌리자 운호와 운여가 짓궂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기가 막힌 순간에…
정말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헛기침을 하며 소하령을 급히 뒤로 숨겼으나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부끄러움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운상이 운호를 향해 더듬거리며 말을 꺼낸 것은 그런 그녀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갔다… 왔냐?”
“그래!”
“왜, 인마!”
“좋은 시간 보내라고 했더니 아주 가관이구만.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늑대한테 토끼를 맡기고 갔었어. 그렇지, 운여야?”
“흥!”
“어라, 왜 맞장구 안 쳐?”
“너는 되고 친구는 하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은 뭐냐. 넌 양심에 찔리지도 않냐?”
“헉!”
운여의 반응에 운호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전혀 예상외의 반응에 저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나름대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롯이 자신만의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운여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운상이야 이번 한 번뿐이지만 자신은 당운영, 한설아와 함께하면서 그의 속을 헤집어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즉시 운여의 눈을 피하며 운상을 바라봤다.
난감함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조급한 마음도 들었다.
황만을 추적하느라 반나절이나 소비했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나야 했다.
“떠나자.”
“벌써? 갔다 온 건 이야기해 줘야지!”
“그건…….”
운호가 주절거리며 말을 꺼내 황포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추려서 말해주었다.
최대한 줄여서 말해주고 출발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은 운상의 눈은 놀람으로 인해 찢어질 듯 커졌다.
듣다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림에 산재한 조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인원이 많은 곳이 개방이었다.
그런 개방이 천왕성 편에 서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비록 고수들의 숫자는 적다고 하나 그들이 수집하고 분석하는 정보는 오히려 강력한 문파 서너 개와 맞먹는 위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듣고 나서 그저 고개를 끄덕인 후 출발할 정도로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쨌는데?”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나왔다.”
“왜 그냥 나와. 끌고라도 왔어야지. 지금 우리가 어딜 가는지 잊은 거야?”
“데려와도 소용없다고 판단했다. 그 사람들은 숭산으로 데려가도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 정도였어?”
“나를 바라보는 그들 눈에는 살려는 생각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 자들을 데려와 봤자 무슨 소용이야.”
“하긴… 그런 정도라면 안 되지.”
“그러니까 그만하고 가자. 시간 없다.”
더 이상 운상은 운호를 추궁하지 않았다.
친구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 목숨을 걸 정도의 의지를 갖는다는 건 그들의 가슴속에 신념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신념이 있는 무인은 누구도 꺾지 못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