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5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54화
들을 건 다 들었고 먹을 것도 다 먹었다.
갈 길이 머니 목적을 달성한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들은 소하령이 목욕을 하겠다고 우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객잔에서 조금 더 머물 수밖에 없었다.
배를 채우고 몸을 씻으니 생기가 돌아 객잔을 나서는 그들의 몸에서는 광이 났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그들의 외모가 빛이 나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섞였을 때의 그들은 인세를 벗어난 용과 봉이었다.
“경로는?”
“서안(西安)을 거쳐 상주로 넘어가자.”
운상의 질문에 운호가 대답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사천에서 멀어질수록 무인들의 시신이 적어지는 것은 전쟁의 영향권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뜻이고 천왕성의 추적권에서도 벗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안심할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절대고수들의 연합과 대규모 병력의 집단 공격만 아니라면 몸을 빼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거지 황만을 만난 것은 흥평에서 벗어나 이틀을 달려 섬서의 성도인 서안에 도착했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우.
개방의 의빈 분타주 황만은 운호가 칠절문과의 전쟁 당시 풍운대의 행적을 묻기 위해 찾았던 인물이었다.
묘하게 음모의 냄새가 나는 자.
뻔히 아는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운호에게 거짓 정보를 흘림으로써 구룡단과의 동강벌전투를 벌이도록 만들어 지옥 근처까지 구경하게 만든 개방의 고수였다.
이마가 넓고 왼쪽 뺨에 난 사마귀는 사 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정확하게 그를 기억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분명 죽었다던 자가 버젓이 살아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음모의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별호가 무골개라고 했던가.
무골개라면 온몸에 뼈가 하나도 없다는 뜻인데 별호답게 황만은 마치 구렁이처럼 유연한 신법을 펼쳐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고민 되는군.”
“그냥 때려잡는 건 어때?”
“저자, 보통이 아냐. 괜히 그냥 잡았다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놔줘야 될지도 몰라.”
“놔주긴 왜 그냥 놔줘. 뼈마디라도 몇 개 부러뜨리면 술술 불 거야. 나한테 맡겨!”
운호의 말에 운상이 주먹 쥔 손을 쓰다듬었다.
맡겨만 주면 즉시 붙잡아서 토설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얼굴에 잔뜩 들어 있었다.
하지만 운호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어 그의 의지를 가로막았다.
“저놈, 누굴 따라가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운상, 너는 하령이 데리고 청안사에 가 있어. 금방 따라갈 테니까.”
“우릴 빼놓고 뭐 하려고?”
“당초부터 의심스러운 놈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만 알아보고 바로 따라갈게. 하령이하고 좋은 시간 보내면서 기다려.”
운호가 한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든 후 황만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청안사는 그들이 가려는 상주 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서안과는 불과 백여 리 떨어져 있는 사찰이었다.
목적지의 중간에 위치해서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운호의 말대로 헤어질 염려가 없는 곳이었기에 운상은 인상을 긁었다.
남고 싶지 않았으나 뻔한 이유로 남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남는 수밖에 없다.
소하령이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지키는 것은 그의 몫이 되어버렸다.
운여는 한숨을 내리쉬고 운호를 따라갔다.
저럴 때는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얼른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랬기에 운여마저 운상에게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몸을 날렸다.
황만은 적색 도복을 입은 도인의 뒤를 은밀히 따르며 비표를 일정 간격마다 남겼다.
도인은 종남파 이십팔숙의 일인인 효문탁(嚆聞託)으로, 어제 화산의 장로인 추홍자와 은밀하게 서안에서 만난 후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개방 서안 지부에 비상이 걸린 것은 벌써 열흘이 넘었다.
소림이 사람을 은밀히 내보내 구룡 쪽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 개방은 전 문도를 풀어 소림과 구룡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는 중이었다.
현재 천하를 사등분했을 때 전쟁의 피비린내에서 벗어난 곳은 소림을 비롯해서 구룡의 주력이 머물고 있는 하남과 섬서, 호북, 산동뿐이었다.
이곳은 대부분 구룡과 칠대세가가 머물고 있기 때문에 천왕성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은 곳이었다.
천하북동을 바라보는 천왕성과 개방의 전략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이들을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벽하게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개방은 이미 오래전 천왕성과 손을 잡고 천하대계를 꿈꿔왔다.
그 옛날 개방은 구룡회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무림인들에게 존경과 경외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개의 문파 중 하나에 꼽히며 전성기를 구가할 때 개방은 그냥 거지들의 집단이 아니라 무위자연을 꿈꾸는 풍진세상의 기인들로 불렸었다.
그러나 최강 절기인 강룡십팔장이 칠십 년 전 방주인 용무개에 의해 유실되면서 개방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왔고, 현재에 와서는 문파로서의 존립조차 위협받는 실정에 이르렀다.
그런 개방에게 달콤한 유혹을 던지며 다가온 것이 천왕성이었다.
떡밥이라는 것도 알고, 잘못 받아먹으면 개방 전체가 무림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방주인 신풍개는 천왕성의 제의를 서슴없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개방으로서는 탈출구가 없었다.
이대로 목숨을 연명하며 사는 것이 지겨웠고 선조들의 위패를 볼 때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개방의 영광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 가능성이 일 할에 못 미친다 해도 반드시 변화를 꾀해야만 했다.
강호가 피로 잠기고 무림이 도탄에 빠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으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았다.
무인들이 그들을 방파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한 거지로 치부하면서 철저하게 무시할 때부터 개방은 무림을 피로 씻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왔다.
비록 강룡십팔장의 유실로 강력한 무인들을 육성하지 못했지만 아직도 개방은 정보 수집과 분석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삼역(天下三域)전쟁에서 천왕성 예하 세력들이 우세했던 이유는 개방의 우수한 정보력이 적들의 전략을 사전에 입수해서 효율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토록 한 것이 원인이었다.
천왕성이 대계를 완성하면 운남과 사천의 남부, 귀주 등 천하의 남서쪽을 불하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준 것도 개방의 그런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신풍개가 천왕성의 제의를 받아들고 고민한 것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하루의 고민도 천왕성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지, 대계 참여의 가부 때문이 아니었음을 개방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만큼 무림에 대한 개방의 원한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황만은 서안을 완벽하게 벗어난 효문탁이 종남산(綜南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신법을 펼치자 품속에서 꺼낸 전서구의 다리에 급히 쓴 서신을 매단 후 창공으로 날렸다.
서안을 벗어난 이상 이제 자신의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장안과 수양 등에 산재되어 있는 개방의 제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 효문탁을 따를 것이고 추적은 그가 종남파로 완전히 돌아간 후에야 끝이 난다.
꼬르륵…
추적을 중단하고 몸을 돌리자 그때서야 점심조차 굶었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몸으로 다가왔다.
서안 분타를 맡으면서 먹는 거 하나는 정말 최상으로 먹을 수 있었다.
섬서는 사시사철의 과일들이 널렸고 특히 성도인 서안은 인심이 후해서 거지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걸개들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은 유난히 환갑잔치와 돌잔치가 많은 날이라 지금쯤 거처에는 맛있는 음식들로 넘쳐 날 게 분명했다.
본단에서 나온 장로, 명일개가 오늘 서안으로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었으니 돌아가면 거처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 부담되지는 않았다.
명일개는 구 장로 중 막내로서 자신보다 겨우 열 살이 더 많았고 성격도 호방해서 작은 일 가지고는 시비를 걸지 않는 사람이었다.
구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에 정보를 총괄하기 위해 본단에서 파견된 명일개는 개방이 보유한 열댓 명의 절정고수 중 한 명으로, 황만에게만큼은 마치 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어 마음 편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다.
배고픔 때문인지 더욱 빠르게 신법을 펼쳐 돌아온 황만은 곧장 황포교 밑에 마련된 거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리 밑에 지어진 움막은 볏짚으로 지붕을 마련했고 나무 기둥을 받쳐 가래를 얼기설기 만들었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황만이 들어서자 아랫목에 누워 있던 초로의 거지가 천천히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명일개.
어릴 때부터 워낙 뼈마디가 가늘고 몸집이 왜소해서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약한 체구를 지녀 명일개라는 별호가 붙었다고 한다.
명일개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자신의 앞에 주저앉는 황만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황만을 향해 반가운 웃음조차 짓지 않고 곧장 질문부터 해왔는데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놈은?”
“종남산으로 향했습니다.”
“서안에 머문 것은 며칠이었지?”
“이틀이었습니다.”
“이틀이라… 하루를 기다려서 추홍자를 만났다?”
“그렇습니다. 추홍자는 그보다 하루 늦게 들어와 만난 후 곧장 화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었느냐?”
“그자들의 무력은 거의 초절정에 달해 있습니다. 제 능력으로 접근은 칠 장이 한계였으며 지청술을 펼쳐 간신히 들은 것은 점창이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왔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점창?”
“점창에 대해 이야기 나눈 이유를 다방면으로 분석해 봤으나 결국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은밀히 만난 것으로 봤을 때는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저희들의 머리로는 추론이 불가능했습니다.”
“화산과 종남, 그리고 점창…….”
황만의 보고에 명일개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종남과 화산은 같은 섬서에 있지만 점창은 만 리나 떨어져 있는 운남에 있는 문파다.
더군다나 점창은 칠 년 전 구룡에서 떨어져 나가 종남이나 화산과는 연계조차 끊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그들의 입에서 점창이란 단어가 계속 나온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손가락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던 명일개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황만이 고픈 배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우리 예측대로 소림이 움직인 게 구룡회의 소집 때문이라면 점창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구나.”
“구룡회와 점창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구룡회가 열려도 점창은 참여하지 못하잖습니까?”
“아니다.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구룡에서 탈락한 문파도 복원을 원할 경우 구룡회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점창의 꿈은 구룡 복원이다. 그러니 구룡회가 열리면 점창은 반드시 참석해서 분란을 만들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장로님 말씀은 그들이 점창의 복원을 막기 위해 조우했다는 뜻이군요.”
“거의 그랬을 것이다. 점창을 구룡에서 몰아낸 주체가 화산이었으니.”
“음… 구룡에서 점창을 완전히 빼놓고 생각하다 보니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번 구룡회의 소집 목적은 점창의 복원 때문이란 말이군요?”
“바보 같은 놈. 지금 이런 시기에 그자들이 한가하게 그런 것 때문에 삼 년이나 남은 구룡회를 긴급히 소집했겠느냐.”
“그럼 무엇 때문에……?”
“천하분란 때문일 것이다. 점창의 구룡 복원은 그에 따른 부속물에 불과할 테고. 그자들의 회합 목적은 현 무림의 전쟁을 막아보자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몇몇 놈들은 점창의 복원을 막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그럼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통의 구룡이 힘을 합치게 된다면 대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가 문제다. 천왕성의 존재가 노출되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구룡이라도 섣불리 천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막을 수 없다. 명분 없는 제동은 참견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삼십팔세는 구룡의 관여를 참견으로 볼 것이 분명하니 구룡회가 소집되더라도 행동하기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만약 놈들이 천왕성의 존재를 알고 대비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둬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건 천왕성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점창의 마검을 잡기 위해 성에서 여러 번 움직인 정황을 포착했었다. 만약 마검이 우리의 추측대로 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천왕성은 구룡의 출행을 중간에서 차단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겠지. 대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이 큰 모험이다. 구룡회에 참석하는 자들은 장문인을 포함해서 각 파의 최강 고수들이니 아무리 대단한 천왕성이라도 성공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한다. 구룡을 감시하다가 그들이 떠나는 것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나머지는 천왕성이 알아서 하겠지.”
눈을 빛내며 명일개가 입을 다물었다.
면밀한 분석을 끝내고 입을 다문 그의 눈은 매의 눈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이 갑자기 변한 것은 움막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황만이 대화를 마친 후 더 이상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여유 있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운호와 운여였다.
운호는 엉거주춤 일어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황만을 향해 웃음을 내보였다.
“오랜만이오. 잘 있었소?”
“마… 마검!”
“어쩐지 냄새가 지독하다고 했어. 처음에는 거지니까 오랫동안 안 씻어서 그런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천왕성의 개가 되어 똥통에 뒹굴면서 나는 냄새였군. 정말 재밌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