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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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9화
소림의 뇌현 대사는 왔을 때처럼 떠날 때도 그렇게 훌쩍 떠났다.
워낙 중요한 사안을 던져 놓고 떠났기 때문에 점창의 장로들은 그를 배웅한 후 즉시 상청궁으로 다시 모였는데, 얼굴들이 모두 굳어져 있었다.
꿈속에서조차 염원했던 구룡의 복원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내야 했기에 긴장감이 확 올라왔다.
장문인인 청현자를 중심으로 원형 탁자에 빙 둘러 앉은 장로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구룡회가 개최되면 각 문파에서는 장문인을 포함해 열 명의 인원이 참석하는데, 이는 불필요한 인원을 최소화함으로써 행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함이었다.
인원을 한정한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특정 문파가 무력을 동원하는 걸 막겠다는 취지도 담겨져 있었다.
대화를 통한 결론.
구룡회가 추구하는 것은 무력을 통한 분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화합이었다.
구룡의 복원을 위해서는 다섯 개 문파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그 말은 절반 이상의 문파가 점창을 지지해 줘야 구룡으로 복원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는데, 막상 일이 벌어지자 장로들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칠절문과의 전쟁 이후 점창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력으로 내실을 다졌을 뿐 구룡에 소속된 문파들과 긴밀한 왕래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장로들의 입을 막은 원인이다.
억지로 구룡회의 소집을 성사시켰으나 점창을 위해 나설 문파들을 만들지 못했으니 구룡 복원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대로 구룡회가 삼 년 후에 개최된다면 서서히 준비해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전통의 명문들로 구성된 구룡은 변화를 싫어하고 은연중에 점창에 대한 뿌리 깊은 질시를 가지고 있었다.
백 년 전 천왕성의 야욕을 분쇄하며 무림을 구했을 때 황금 패를 만들어 바치면서 점창을 태두로 받든 사건을 그들은 후대에 들면서 치욕으로 여겼다.
자신들의 문파가 천하제일이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마음은 점창을 질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전 회합 때 점창을 구룡회에서 밀어낸 것도 어쩌면 그 일환이었는지 모른다.
구룡회에 참여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쇄락의 길을 걷던 점창을 그들은 여지없이 무참하게 짓밟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점창을 복원시켜 줄 것인가는 전적으로 구룡문에 달려 있었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점창은 예전처럼 쇄락의 길을 걷던 힘없는 문파가 아니었고 현재 무림을 어지럽히는 천(天)이란 집단의 정체를 유일하게 알고 있었으니 구룡문이 폐쇄적인 집단이라 하더라도 복원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구룡의 복원이 없으면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 테니 말이다.
그러나 희망보다 어려움이 더 크다는 것도 안다.
장로들이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좌중에 침묵이 흐르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장문인인 청현자였다.
“운호가 사천으로 들어와 십방(什防)을 넘었답니다.”
“결국 또다시 그들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구려. 지명 하나로 유추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들의 근거지가 청해와 인접한 북천(北川)이 맞다면 천왕성의 잔재들일 가능성은 구 할이 넘게 되오.”
“백여 년 전 천왕성은 청해에서 밀고 내려와 감숙과 사천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운남으로 향했었으니 사형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행동이 예전과 완벽하게 다르다는 건데 그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아무리 강해도 단일 세력으로 천하를 상대할 수는 없소이다. 자신들의 선조가 실패한 예도 있었으니 각개격파의 전술을 쓰는 것이 분명하오.”
청현자의 질문에 청문자가 신중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좌중에 앉아 있던 장로들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충분히 타당한 답변이었고 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구룡회에 참여해서 천의 야욕을 철저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략에 대해서 면밀히 분석하고 가능성을 최대한 압축해야 했다.
그랬기에 청현자는 사형들을 향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운호가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그들의 예하 세력은 벌써 다섯 문파나 됩니다. 그것도 모두 삼십팔세에 포함되는 강력한 세력들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자들의 예하 세력들이 그것뿐일까요?”
“내 생각에는 더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노출되어 있는 그들의 예하 세력을 보면 강남에 몰려 있습니다. 즉 운호가 집중적으로 탕마행을 나섰던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아마 그들은 강북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당전에 참전한 자들 중에도 있을 수 있겠군요.”
“그렇겠지요. 그리고 아직 참전 안 한 자들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구룡회와 전통의 칠대세가를 뺀 나머지는 전부 의심해 볼 대상이 됩니다.”
“백 년이 훌쩍 넘는 문파는 빼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그들의 힘이라면 어떤 문파라도 장악할 수 있었을 테니 쉬이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소.”
“음…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청문자의 대답에 청현자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삼십팔세 중 구대문파와 수백 년 전통의 칠대세가를 빼고 나면 스물두 개의 문파가 남는다.
그중 다섯 개는 천의 예하 세력으로 판명되었지만 나머지는 어떤 문파가 포함되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적을 알지 못한 채 싸움을 시작하면 언제 어느 때 등을 찔리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현자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꺼칠해진 입안을 차로 헹군 후였다.
“다음 달 초엿새라면 열흘 후엔 출발을 해야 됩니다. 저는 운호 일행을 합류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형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당연히 그래야 하오. 직접 눈으로 본 그 아이들의 증언이 있어야 고지식한 그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저와 운호 일행을 포함시키면 벌써 넷이군요. 다음으로는 누가 갔으면 좋겠습니까?”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청현자는 빙빙 말을 돌린 모양이었다.
구룡의 복원을 위해 출행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정하는 것은 아무리 장문인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랬기에 청현자는 대답을 해온 청면자를 바라보며 의견을 구했다.
청면자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반문을 듣고 나서였다.
장문인이 자신에게 의견을 구했다는 건 자신의 출행이 물 건너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출행 명단에 자신을 넣는다는 건 너무 속 보이는 행동이었다.
괜한 답변으로 졸지에 출행에서 밀려 버렸으니 급한 성격을 뜯어고치지 못하는 한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도 계속 손해 보면서 살아야 할 팔자인 모양이다.
가장 연장자인 자신에게 짐을 넘겨 버린 장문인의 행위가 슬쩍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니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문파의 중요한 일은 연장자가 의견을 내고 장문인이 동의하면 대부분 무탈하게 결론이 나는 법이다.
“아무래도 소림을 방문해서 일을 만든 청문은 당연히 가야 할 것이고 차기 장문인인 운풍도 참가해야 하오. 만약을 대비해서 청무와 운곡, 운검도 참가시켰으면 좋겠고… 운학도 같이 보냅시다.”
“운학을요?”
“운곡과 운검을 보내기 위해서는 운학도 보내야 하기 때문이오.”
청면자의 대답에 뒤늦게 의미를 알아챈 청현자와 장로들의 고개가 크게 흔들렸다.
운곡과 운검은 배분을 무시하고 점창을 위해 키운 비밀 병기들이었다.
물론 사문의 번영을 위해 키운 제자들이었지만 일반 문도들로 봤을 때는 쉽게 배분을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청면자는 운학을 추천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분란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으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답게 청면자의 경륜이 빛나는 의견이었다.
가장 배분이 높은 청면자의 대답에 청현자가 좌중을 향해 시선을 하나씩 돌려 나갔다.
다른 의견이 없으면 그대로 시행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나 청현자의 그런 시선은 청우자에게 다가갔을 때 급격하게 흔들렸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우자가 자신 쪽으로 청현자의 시선이 다가오자 급히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정하지 못하오.”
“사제!”
“칠절문과의 전쟁 때도 사문을 지킨 나보고 또다시 자리보전하란 말이오? 나는 그리 못 하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나도 보내주시오.”
“누굴 빼고!”
“그건 사형이 알아서 하시고. 이번엔 나도 가야겠소.”
“어허…….”
장문인 대신 나섰던 청면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청우자.
점창을 대표하는 검객 중의 하나로서, 칠절문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아온 열혈의 무인이었다.
젊었을 때 시도 때도 없이 개판 치며 돌아다녔던 청무자가 유일하게 무서워한 사람이 바로 청우자였고 평소에는 말이 없고 조용했으나 한번 화가 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서 예전부터 그가 입을 열면 사형들도 말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면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장문인을 바라본 것은 그로서도 청우자의 주장을 반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칠절문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산에 있었던 것을 벌써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픈 기억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제였으니 어찌 단칼에 자를 수 있단 말인가.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 침묵은 이전과 다르게 너무 무거워서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뺀다면 누구를 뺀단 말인가.
물론 빼려고 마음먹는다면 반드시 참석해야 되는 장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라도 뺄 수는 있다.
그랬기에 청현자와 좌중의 장로들은 눈을 감고 고민에 젖기 시작했다.
양보한다고 해서 해결 날 일이 아니니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민은 찢어질 듯 들려온 부름에 금방 깨지고 말았다.
“장문인, 청허 사백께서…….”
장로들이 수명각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에는 운풍을 비롯해서 운학과 운일, 운보 등 점창의 주요 각주들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본산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를 하고 있던 장로들보다 한발 빨리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청현자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운풍을 향해 물었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상청궁으로 달려온 제자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왔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옵니다. 얼른 들어가 보시지요.”
하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운풍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억눌려 있었다.
그랬기에 청현자를 비롯한 장로들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한꺼번에 수명각으로 들어섰다.
오랜 세월 노환으로 누워 있던 청허자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앙상하게 말라 있었는데, 사제들이 연이어 방으로 들어오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사제들, 왔는가?”
기침을 하지 않는다.
근래 들어 그토록 심하게 하던 기침이 사제들을 바라보며 입을 연 청허자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정광은 서리지 않았지만 눈은 또렷하게 살아 있고 음성마저 예전처럼 쨍쨍하게 살아서 나왔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장로들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사람이 죽을 때 잠시 동안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시간이 지나면 천하에서 가장 용한 의원이라 해도 살릴 수 없다고 한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온 평생을 함께했던 사형.
그 사형의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장로들의 얼굴은 서서히 흑색으로 변해갔다.
“청현아.”
“예, 사형.”
청허자는 예전 어릴 적 부르던 그 음성으로 청현자를 불렀다.
장문인이란 고귀한 직책을 가진 사제를 그리 부른 것은 사형으로서의 마지막 길을 가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현자의 입에서 울음이 섞여 나왔다.
아버지처럼 그를 대해주던 청허자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졌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가슴속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런 청현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청허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를 청암으로 데려가다오. 마지막으로 천화봉을 보고 싶구나.”
“…사형.”
거부할 수조차 없는 명이기에 서서히 다가가 허깨비처럼 가벼워진 사형을 업고 청현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장로들이 따랐고 마당에 늘어서 있던 운자배 제자들이 길을 이었다.
청암에 도착해서 내려놓자 청허자는 한눈에 들어온 천화봉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천화봉.
다시는 보지 못할 정경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놓기라도 하듯 그는 꽃이 떨어져 민산으로 변한 천화봉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히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시선이 천화봉에서 멀어지며 사제들을 향해 돌아왔다.
“청면, 청명, 청우… 청무, 청문. 청현… 이제 너희 여섯만 남았구나.”
“사형!”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음성에 장로들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 같은 부름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청허자는 억지로 손을 들어 그들의 감정을 틀어막았다.
“화려하게 피었던 꽃들도 언젠가는 지게 되니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 한평생 너희들과 행복하게 살아온 나의 죽음이 어이 슬픈 일이겠는가. 내가 죽더라도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
“사형!”
“행복했노라. 그대들이 있어 행복했고 점창에 살아서 즐거웠네. 살아서 구룡의 복원을 보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했구먼… 헉헉… 하지만 사제들이 잘해줄 거라 믿고 나는 이제 가네… 잘들 계시게.”
“크흑… 사형!”
거짓말처럼 스르륵 눈을 감아버리는 청허자를 바라보면서 장로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천화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암.
그 속에서 죽어간 청허자의 모습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원했던 청허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여기저기 털썩 주저앉아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와 같았던 청허자의 죽음을 그들은 절대 눈물 없이 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