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48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8화
대읍(大邑)에 도착해서 객잔에 들러 식사를 마친 운상과 운여는 소하령을 데리고 시내를 구경하겠다며 불쑥 나가 버렸다.
전장의 상흔은 없었지만 대읍 역시 전쟁의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 차 언제든지 시비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천(天)의 이목이 언제 따라붙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운호는 친구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친구들의 배려를 그런 이유 때문에 거절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설아는 친구들이 나간 후부터 더욱 안색이 나빠졌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 치료를 하면서도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할 만큼 그녀에게서는 찬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상처는 작지 않아서 오는 내내 치료를 했고 객잔에 도착해서도 붕대를 갈아주어야 했으나 그녀는 운호의 치료까지 거부했다.
그녀에게서는 작은 신음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직 입술을 꼬옥 깨문 채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의 해후였으니 반가워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지금의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를 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쌍류에서 처음 봤을 때의 기절할 것 같았던 반가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몸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맹렬하게 차가워져 갔다.
무엇이 문제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에 화가 난 것처럼 거칠어진 숨소리, 굳어진 얼굴이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알려주고 있었다.
운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사문의 명운이 그에게 달려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 천왕산을 찾아야 했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그녀와의 해후를 겨우 맞이했는데 이런 상황에 부딪치자 난감함이 몰려왔다.
그녀와 함께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시간을 두고 오해를 풀 수도 없기에 운호는 벽에 기댄 채 방바닥을 바라보는 한설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을 거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고 두려웠다.
이대로 그냥 헤어질 수는 없다.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미인도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저승사자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설아, 도대체 왜 그러는지 말해봐.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거야?”
“…….”
“나는 곧 떠나야 돼. 설아가 늘 보고 싶었어. 다시 만나면 힘껏 안아주고 싶었는데 잔뜩 날이 선 가시가 되어 있으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말해봐. 왜 그러는지 알아야 변명이라도 하지.”
“정말 내가 보고 싶었나요?”
“응, 매일처럼 설아의 꿈을 꾸었어. 나는 설아가 보고 싶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청성으로 달려가는 상상을 하곤 했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런데 왜… 왜 그랬어요?”
“뭐가?”
“당 소저를 만났을 때 왜 그랬냐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눈만 껌벅이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말한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아파한 거구나.
다른 사람은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한설아는 당운영을 보면서 느꼈던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을 눈치챘던 모양이었다.
미안했다.
새삼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했는지 알게 되자 그녀의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의 미안함이 몰려왔다.
당운영이 물었던 마지막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한 것은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랑이 남아 있거나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져 있었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왔다는 자신의 말에 충격을 입고 해초처럼 흔들리며 중심을 잃어버렸다.
그런 여인을 향해 잔인하게 비수를 꽂고 싶지 않았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자신으로 인해 아파했으며 결국 남의 여자가 된 사람이었다.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녀, 당운영이다.
그녀가 왜 자신의 한마디에 충격을 입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휘청이는 그녀를 향해 대답해 주지 않은 것은 분명 연민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불쌍했다.
운호는 한참을 고개 숙인 채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후 샛별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설아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아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하지만 설아, 지금의 나는 오직 설아만을 생각하고 있어. 그녀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사람이잖아. 그러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가요?”
“조금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고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한때는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아무런 감정도 없을 수 있겠어.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을 선택했고 나 역시 설아를 선택했으니 많은 것이 변했잖아. 그녀가 아프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겠지. 행복하게 산다면 다행이란 마음을 가질 거고. 하지만 그게 다야. 나는 이미 설아를 사랑하고 있으니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설아, 그 정도는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정말… 정말인가요?”
떨리는 그녀의 눈이 예뻤다.
이미 그녀의 눈은 순한 양으로 변해 끝없이 운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처럼, 운호를 사랑하며 목숨을 던질 때처럼 그녀는 운호만을 바라보며 사랑을 갈구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달콤했고 감미로운 그녀의 젖은 입술은 자신의 내공을 무섭게 증진시켜 주었던 공청석유의 향기보다 더욱 진했고 유혹적이었다.
두 시진이 넘어서야 돌아온 운상과 운여는 나갈 때의 분위기와 완전히 변해 버린 한설아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오므렸다.
한설아의 얼굴은 붉게 변해 있었는데 금방 시집온 색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도망가듯 객잔을 나서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한설아의 모습에 분노와 실망, 슬픔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피하면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당운영과 관련이 있을 거란 추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상과 운여는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끼어든다고 해서 해결될 내용이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과 두 시진 만에 한설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떨기 수선화처럼 함초롬히 앉아 그들을 향해 시선을 던져 왔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반가움에 젖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까는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이제 와서 집 나갔다 돌아온 오라버니를 본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운상의 목소리는 곱게 나오지 않았다.
“흥, 이제야 우리가 보이는 모양이구려.”
“오라버니, 시비 걸지 마요. 우린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이잖아요.”
“아이고, 귀신 보듯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시오.”
“호호,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죠?”
“못 지냈소.”
“잘 지냈으면서 뭘 그러세요. 세상이 알아주는 백매화와 같이 다녀서 그런가?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이던데요.”
놀리려고 했더니 오히려 뒤쪽에 서 있는 소하령과 싸잡아서 반격을 해온다.
어느샌가 그녀는 예전의 활기찼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냐, 이거. 우리 예상보다 훨씬 좋아 보이잖아.”
“그러네. 운호, 이놈이 역시 능력이 있어. 아무리 봐도 너보다 뛰어난 것 같다.”
“거기서 왜 그 소리가 나와!”
“부러워서 그런다, 인마. 봐라. 나만 없잖아. 그러니 안 부럽겠어!”
운여가 과장된 몸짓으로 씩씩대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운상이 즉시 뒤로 물러나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긴 운여의 속이 편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짝이 있는데 자신만 없으니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쩌겠는가.
여인을 유혹하는 재주를 기르지 않고, 용기가 없다면 미인을 얻을 수 없다는 천고의 진리를 모르는 한 운여는 당분간 여인을 만나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런 이유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우리 셋 중에서 내가 제일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왜 나만 짝이 없는 거지. 이건 뭔가 세상의 조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분명해!”
운호의 마음을 확인한 한설아는 헤어지면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내는 것이 어찌 서운하지 않겠냐만 그녀는 밝은 웃음으로 다시 돌아와 달라는 부탁을 남기며 운호를 배웅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그녀의 체온이, 입술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또다시 오랜 이별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럼에도 떠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지나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오면 다시 돌아와 그녀를 안고 깊고 깊은 입맞춤을 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점창 산문에 소림의 뇌현 대사가 나타난 것은 오시가 훌쩍 넘었을 때였다.
하남에서 운남까지의 거리는 만 오천 리나 되었으니 그의 홍색 가사는 먼지로 가득 덮여 있었다.
경종이 울렸고 곧이어 타종이 따랐다.
구룡회에서 퇴출된 후 타 문파의 손님이 거의 없었던 점창으로 본다면 근래 가장 중요한 선객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상청궁에는 청자배 장로들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뇌현 대사의 신분을 감안한다면 실무를 보고 있는 운자배는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 그 이면에는 방문 목적의 중요성도 한몫했다.
청문이 정중하게 선객을 마중했고 청현자는 장문인답게 선방에서 뇌현 대사를 맞아들였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깊이 갈무리된 눈을 가진 뇌현 대사의 입이 스르륵 열렸다.
“오다 보니 점창의 기운이 예전에 비해 크게 커진 듯합니다. 참으로 경하드릴 일입니다.”
“별말씀을… 산도 그대로고 전각도 그대론데 달라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허허, 장문인의 겸양이 소승을 부끄럽게 만드는구려. 문파의 성세는 문인들에게 달렸는데 오다 보니 제자들의 면면이 모두 정대하고 정기로웠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키웠으니 얼마나 흡족하시겠소. 소승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그리 높게 봐주시니 감사드리오.”
청현자가 앉은 자리에서 가볍게 허리를 숙이자 뇌현 대사가 마주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본론이 나온 것은 배석했던 청문자와 청무자, 청우자가 뇌현 대사와 안부를 주고받은 후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는 뇌현 대사의 음성은 어느새 딱딱해졌고 느려졌다가 빨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 중요성 때문에 가벼운 흥분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소림은 점창의 방문을 받은 후 천검회와 팔황문을 감시해 왔습니다. 수많은 목숨들이 그들을 감시하면서 사라져 갔지만 결국 얻어낸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의 연관성도 밝히지 못했고 그들의 뒷배로 말씀하신 천이란 조직의 실체도 알아내지 못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소승이 귀문을 찾아온 것은 소림이 더 이상 세상의 혼란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져 수많은 무인들이 마치 이슬처럼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발생한 일이라면 반드시 막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량수불.”
뇌현 대사의 발언에 점창 장로들의 입에서 동시에 도호가 흘러나왔다.
산에만 있었지만 천하가 피로 물들어간다는 소식을 수시로 들었다.
점창에서 운영하는 비응은 성세가 회복되면서 더욱 많이 퍼져 나갔는데, 그들로부터 무림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작금의 쟁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점창의 장로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뇌현 대사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점창 장로들의 도호 소리가 잠잠해졌을 때였다.
“그래서 소림은 결단을 내려 구룡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회의의 개최는 한 달 후인 다음 달 초엿새로 정했으니 점창은 그때 예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신비 세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소.”
“우리는… 구룡회가 개최되면 복원을 논할 것이오.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소이까?”
뇌현 대사의 말을 따라붙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청우자가 물었다.
구룡 복원을 말하는 그의 눈은 마치 불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구룡으로 향한 사자들에게 소림 장문의 친필이 대동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저간의 사정과 점창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그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