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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4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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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7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몸이 굳어졌고 주변의 모든 것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서서히 다가와 멈춘다.

그런 후 나를 봐달라는 듯 천천히 나비 가면을 벗고 예전 그 아름다웠던 눈으로 운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월이란 시간 속에서 더 아름다워졌고 더 성숙해져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런가?

그렇구나. 정말 오랜만이구나.

늘 귓가를 맴돌던 음성이 그녀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왔지만 운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있었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잊은 줄 알았다.

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고 새로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했으니 잊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모든 마음을 다해 사랑했고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그녀는 그동안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잠재우며 운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떨린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일까.

그녀의 눈길은 그 옛날 자신을 사랑하던 때 보여주었던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아프다. 마음 한구석에서 통증이 생겨났고 그 통증은 점점 범위를 확산하며 가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무 말도 없군요. 내가 부담되나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오.”

“그럼… 왜?”

“당신을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던 모양이오.”

“늘 이야기 듣고 있었어요. 마검이란 이름으로 전설을 만들어가는 당신의 무위를 들으면서 너무 기뻤고 언젠가 꼭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피하지 않는 눈.

시선을 마주친 그녀의 눈은 한 치의 미동도 보이지 않으며 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정말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렇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처음에 무섭게 떨리던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변한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의를 보이며 당장에라도 공격을 재개할 것 같았던 당문 무인들은 당운영의 입을 통해 나타난 자들이 현재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마검 일행이란 걸 알게 되자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깊은 신음을 흘려냈다.

누가 현 강호에서 전설을 만들어가고 있는 점창삼신룡을 상대로 도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지금까지 강호를 종횡하며 펼쳐 낸 전과는 그야말로 무적의 길이었으며 신화였으니 불과 백 명도 되지 않는 전력으로 도발한다는 것은 만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운호는 아련한 눈으로 당운영을 바라보았다.

역시 현명한 여자다.

감정의 여파를 추스르고 순식간에 상황을 분석한 후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 당문 무인들이 함부로 공격하는 것을 막아낸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대했던 마음이 그녀의 의도를 알게 되면서 사라지자 대신 허탈감이 몰려왔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그녀는 혼인을 했고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보고 싶었고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인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의 단순한 한마디, 보고 싶었다는 말에 이렇듯 가슴이 떨리는 건 아직도 그녀에 대한 감정이 남았다는 뜻이다.

뜻밖의 감정에 마음이 답답해져 왔으나 그럼에도 운호는 그녀와 비슷하게 가라앉은 눈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드러내어 상대할 수 없는 여인이었고 상황이었으니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을 숨겨야 한다.

“생명의 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송구하기 짝이 없소. 우리가 본 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으니 정말 오랜만이오. 그래, 부군이신 석천 대협께서도 잘 계시겠지요?”

“그 사람은… 잘 있어요.”

“다행이구려.”

뭔가 대답이 석연찮다.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대답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일부러 꺼낸 단어였다.

그녀를 데려간 풍검문의 장자 석천의 이름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으나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의 이름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얼굴이 흐려졌다.

금방 다시 원상태로 회복했으나 운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뭔가가 있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는 이쯤에서 당문 무인들에게 왜 자신들이 이 싸움에 끼어들었는가를 알려줄 필요성이 있었다.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당문의 수뇌부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당문 무인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열다섯 명의 호법 중 하나인 당문기였는데, 그는 운호가 자신을 바라보자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마주 바라보았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말을 듣고 행동을 결정하지 않으면 수많은 가문 무인들의 목숨을 헛되이 버릴 공산도 있다.

비록 대화를 통해 마검이 당문에 악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점창과 당문은 결코 우의로 다져진 관계가 아니었다.

그 말은 마검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숙고를 통해 행동을 결정해야 된다는 뜻이 된다.

“나는 점창의 마검 운호라 하오. 내가 두 문파의 싸움에 끼어든 것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소. 이것은 내 개인적인 일일 뿐 점창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 또한 밝혀두는 바이오.”

“마검의 여자라… 그게 누군가?”

“청성의 한설아 소저요.”

“허어…….”

당문기는 자신의 질문에 지체 없이 대답하는 운호를 바라보며 무거운 탄식을 흘려냈다.

슬쩍 옆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운호의 뒤편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자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검과 같이 다니는 자들. 두말할 필요 없이 무풍검과 팔비검이었다.

처음에는 마검의 명성에 가려 보이지도 않던 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혜성처럼 떠오르더니 지금은 당당하게 절대고수의 반열에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마검의 행사를 막지 않을 것이다. 점창에 불이익이 갈지도 모르는 행사를 하면서도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운호와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었다.

자신 역시 젊었을 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사랑이란 것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었으니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면 마검 일행은 당문을 상대로 살육을 벌일 가능성이 컸다.

겨우 우세를 점한 싸움에 마검 일행이 가세한다면 이 싸움은 해보나 마나 무조건 당문이 지게 된다.

그랬기에 그는 한숨을 길게 흘려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그의 강호 경험이 노련하다는 걸 알려준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라면 먼저 나서지 않아야 될 때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는 처사였다.

“어쩔 생각이신가?”

“이쯤에서 싸움을 그치고 물러섰으면 좋겠소.”

“마검, 그대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림의 불문율을 어기고 계시네. 이리하면 점창에 부담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시는가!”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오. 그러니 나머지는 당문의 선택에 맡기겠소.”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기껏 한 여자 때문에 사문의 명예에 먹칠을 할 생각인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나?”

“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오.”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물러나지. 하지만 알아둬야 할 걸세. 오늘 이 일은 점창에 반드시 따질 테니 그때가 되면 책임을 피하지 말게.”

강호의 여우답게 그는 즉시 손을 들어 당문 무인들을 뒤로 뺐다.

그런 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그들을 이끌고 지체 없이 쌍류를 벗어났다.

물러나면서 자존심을 숙이지 않았고 마검을 상대로 싸움을 피했으니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당운영이었다.

그녀는 사숙의 지시를 받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용면의 사내가 어깨를 붙잡아왔을 때서야 신형을 휘청였는데, 뭔가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떨리는 눈, 허깨비처럼 변해 버린 육신.

용면의 사내에게 안겨 떠나는 그녀의 입술은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참하게 떨리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운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였다.

“당신… 정말인가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인가요…….”

 

당문 무인들이 떠난 후에야 운호 일행과 청성 무인들의 해후가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안면이 있던 사람들도 꽤 있었기 때문에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그들은 아직도 운호 일행을 만나게 된 것이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수자가 앞으로 나선 것은 그들이 돌아가면서 모두 인사를 마친 후였다.

“내가 알기로 그대들은 안휘에 있던 걸로 들었는데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다니 진정 놀라운 일일세. 어찌 된 건지 영문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청성 무인들의 의문이 이 하나의 질문에 모두 담겨 있었다.

어쩐지 귀신을 본 것처럼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소문이 빠르더라도 운호 일행의 움직임보다 빠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운호는 만수자의 질문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꺼내어 이야기해 줬다.

천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피했고, 오직 막사검에 관한 것들만 이야기했는 데도 청성 무인들의 입은 열어진 채 다물어질 줄 몰랐다.

요마왕을 비롯해서 마창의 이야기와 일검마, 살막과 혈염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마치자 만수자는 연신 감탄을 터뜨리다가 기어코 운호의 손을 잡아왔다.

“이토록 청성을 생각해 주다니 진정 고마운 일일세. 욕심에서 벗어나 대의를 살핀 그대들의 기상은 분명 점창의 정대한 기풍에서 나온 것이겠지. 청성은 점창에게 진 빛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네.”

“아니올시다. 잃어버린 물건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줬을 뿐인데 그게 어찌 칭찬받을 일이 되겠습니까.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허어. 허어!”

운호가 조심스럽게 막사검을 꺼내어 만수자에게 넘겨주자 주변에 서 있던 광검 백건과 호풍검 유혁을 비롯해서 청성의 무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눈은 감동으로 붉게 젖었는데, 진정으로 운호 일행을 향해 경의를 보내왔다.

막사검을 건네받은 만수자는 격동에 젖어 몸을 떨었고 연신 신음을 흘려내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막사검을 잃어버리면서 겪어야 했던 고충과 고통은 청성을 끝없는 무저갱 속으로 빠뜨릴 만큼 거대한 것이었으니 검을 찾은 그의 심정이 어떠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운호 일행은 청성으로 가자는 만수자의 제의를 뿌리치고 길을 나섰다.

만수자가 청성으로 가자는 이유는 막사검을 돌려준 것에 대한 치하를 제대로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지만 운호 일행은 그의 바람을 단숨에 거절했다.

칭송을 받자고 한 짓이 아니었으니 받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막사검의 신비인 공청석유를 아무런 허락 없이 셋이서 나란히 배 속에 고이 모셔둔 마당에 얼굴이 부끄러워져서라도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한설아만 데리고 급히 대읍(大邑)으로 향했다.

잠시 동안만 동행하다가 청성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부탁을 하자 만수자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대읍은 청성산과 오십 리 정도 떨어진 도시였기 때문에 청성의 암안(暗眼)으로 꽉 차 있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간다면 언제든지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고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도 즉시 대처가 가능했으니 막사검을 돌려준 운호 일행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의 동행이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추억에서 넘어와 현실이 되면서 일행을 기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운호 일행과 다르게 한설아의 얼굴은 무엇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고 다르게 보면 슬픔에 잠겨 있는 것도 같았다.

그랬기에 운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설아, 표정이 좋지 못해. 부상당한 곳이 아파서 그런 거야?”

“아니에요.”

“그럼?”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아요.”

한설아는 말을 마친 후 굳게 입을 닫았다.

여자의 본능이 미친 듯 작동하며 당운영을 대하는 운호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주시하도록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그녀를 만나면서 마치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경직되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감정이 흐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운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내용과 전혀 다르게 당운영에 대한 걱정과 우려로 가득 차서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절대 감지하지 못할 것들이었지만 그녀는 운호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좋게 해석하고 싶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린 그녀를 배려하는 운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은 쓰렸지만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숨이 막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떠나면서 물었던 당운영의 작은 목소리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정말 그녀를 사랑하나요?

 

경황이 없어서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운호를 바라보며 한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런 것이었다.

왜 결혼한 여자가 그런 걸 묻는단 말인가.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남자에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운영의 질문을 받고 석상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운호를 발견한 후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자신이 들었으니 운호 역시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운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보냈다.

아무런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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